그 끝없는 비애를 이기기 위하여
일상으로 돌아왔다.
내 머리 위에서 부서지던 여름의 햇살과 바다의 파도소리와 눈앞에 끝없이 펼쳐지던 평원과 나를 감싸던 초록의 향연이 가득했던 여름휴가를 뒤로하고, 나는 다시 4평 남짓인 나의 연구실로 돌아왔다. 지난 4일의 휴가는 나의 몸과 마음을 모두 쉬는 리듬으로 바꾸어두었다. 굳이 눈을 뜨지 않아도 되는 아침, 정다운 가족의 목소리, 토스트 냄새, 흐르는 공기조차 느리게 도는듯한 호텔방의 공간과 그 창가사이로 보이는 바다, 한여름밤의 현악 4중주, 나라는 존재까지 잊게 만드는 미술관의 아름다운 조형물들, 느린 시간, 시간이 멎은듯한 공간에서 줄글 사이를 눈으로 노니며 행복했던 서점, 그 어떤 작위적인 표정을 짓지 않아도 되는 이완감과 매 순간 꺄르륵거리던 가족들과의 대화.
이 모든 것들은 이제 또다시 과거의 시간이 되었다.
담담히 컴퓨터를 켰지만, 누군가 내 등뒤에서 큰 바위덩어리 하나를 달아놓고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캘린더를 연다. 이번 주에 있을 국제회의 발표와 학부생 설명회, 기초의학자 모임, 학생 미팅 등 보기만 해도 배 아래가 아파오는 것 같은 일정들이 내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오전에 아이와 통화하면서, “엄마가 일하기 싫어서 걱정이야”라고 했더니 아이는 “엄마, 그러면 일단 해야 할 일 하나를 골라서 딱 2분만 해봐”라고 대답해 준다. 단호한 그녀의 말이 내 마음에 강하게 꽂혔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몰랐지만, 해야 할 일들을 주섬주섬 리스트에 적는다. 이메일을 연다. 응답해야 할 메일을 하나하나씩 처리하며 또 해야 할 일들을 더 리스트에 채워 넣는다. 그러다 탁, 펜을 놓고 하는 생각. 아 더 쉬고 싶다.
동시에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스멀스멀 새어 나온다. 휴가 중에는 항상 가족과 함께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가득했던 반면에 갑자기 그 안락한 둥지에서 내쳐져 돌바닥 땅에 떨어진 새끼 새 한 마리가 된 느낌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들은 나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으며 움직였고, 나는 어디를 바라봐야 할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그 기분. 그래도 다시 한번 날개를 파닥파닥 움직여보기 시작한다. 일단 무조건 해야 하는 것 중에 가장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을 아무거나 잡고 시작해 본다. 밀려놓은 원고 코멘트를 두 개 하고, 메일들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그래도 휴가를 다녀온 뒷빨인지, 글을 읽는 게 은근히 반갑다. 평상시보다 차분하게 글을 읽고 글을 쓴다.
그리고 스스로 생각한다. 이미 내 리듬이 늘어져있다면, 이제 다시 싱크(sync)를 시킬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게 아닐까. 그동안 매너리즘에 빠져서 읽었던 논문들을 다시 마음을 다잡고 읽고, 더 적극적으로 코멘트하고, 기록하자는 생각과 함께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루틴을 한번 잡아보자 다짐한다. 매일 30분 동안 달리기, 프랑스어 듀오링 고하기, 영어 팟캐스트 15분 듣기, 그리고 한 시간 동안 매일 글을 쓰는 것. 이런 루틴은 일단 진입장벽을 낮게 하여, 처음부터 거대한 목표를 잡는 게 아니라 그냥 내가 “단순히” 해볼 수 있는 선에서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마치, 실제로 여행을 가는 것보다 여행을 계획할 때가 더 재밌는 것처럼, 어느 순간부터는 이런 루틴을 계획하는 것 자체가 재미있어진다. 실제로 이 계획들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시간배치를 어떻게 하고, 하기 싫은 상태에서 가장 하기 쉬운 것부터 캘린더에 배치하고, 서서히 몰입하는 시간을 계획하고, 중간에 쉬면서 뭘 할지를 넣고, 이동을 어떻게 하고, 특히 무엇을 해야 내가 주어진 시간에서 가장 즐거울 수 있을지를 생각한다. 마치 아침에 출근하기 전에 이 옷 저 옷 몸에 대보면서 그날 나의 기분에 가장 맞는 착장을 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좀 전에 우리 딸이 일러주듯 “2분만 해봐”라고 했던 말 덕에, 나는 지금 오늘의 루틴으로 잡았던 “하루 1시간 글쓰기”를 하고 있다. 다시 무엇에 몰두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고, 오늘 흐르는 시간에 내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덧입혀진다는 생각이 든다. 매일 일을 한다는 것은 어쩌면 시시포스의 신화처럼 슬픈 인간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쉼은 달콤하고, 휴가는 삶에 필수적이다. 그런데 이 와중에 일상을 다시 맞이한다는 것은 어쩌면 슬픈 일이다. 그러나 오래 쉬고 다시 뛰려면 천천히 다시 다리를 움직여야 하지 않을까? 다만, 이런 휴가를 끝마치고 나서의 비애는 생각보다 크다. 그럴 때 나를 다독이는 이 사실, “휴가 끝나고 온 첫날”은 세상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리듬의 첫박자일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