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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로 잠들지 못하는 밤

고요히 파도를 바라보기

by 에피


잠들기 전, 문득 떠오르는 과거의 한 장면. 실패했던 순간, 말실수, 누군가의 표정이 떠올라 마음이 불편해진 적이 있는가? 나에게 그런 장면은 매일 밤처럼 찾아왔다. 그날의 어색함, 부끄러움, 후회, 그리고 어린 시절의 기억까지. 그런 생각이 떠오를 때면 거기서 오는 당혹감이나 참지 못할 부끄러움을 배우자나 주변인들에게 계속해서 말함으로써 풀고자 하였다. 이때 항상 돌아오는 답변은 “ 또 소가 여물을 게워내 다시 씹고 있구나”라는 말이었다. 이렇게 반복되는 생각, 특히 걱정들은 “반추”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한다.


대학 교수에 임용되고 초반의 시간들은 감정의 롤러코스터였다. 많은 시간들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 도전하고, 당혹해하고, 감정적 에너지의 소비가 크고, 좌절하고, 힘들어하는 시간들이었다. 그런 매일을 보내고 돌아와 저녁 자기 전이되면 바로 잠들 수 없고, 오늘의 일과 과거의 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이어져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일이 잦았다. 특히 사람들과 잘 지내지 못한 것 같은 하루의 끝에는, 초중고대학생, 그리고 인턴, 레지던트 때 마주했던 동료들과의 갈등이나 따돌림, 친구들이나 선배들의 모진 말들과 당황스럽던 상황들이 같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몇 생각의 사이클을 돈 나의 결론은 “나는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는 능력 자체가 선천적으로 없다”였다. (그러나 다시 해가 뜨고, 오래간만에 다시 만난 나의 친구들이나 선배들은 “너는 사람들과 잘 지내던 사람이었다”는 피드백을 주었는데, 그 말을 듣고 진심으로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그 순간에는 ‘이 사람이 예의를 차리려고 한 말이겠지’라고 생각하며 나 자신을 깎아내리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리고 또 저녁이 되면 오늘 있었던 장면들은 다시 과거의 아픈 기억들과 연결되고 “지금, 여기” 존재하는 나의 시공간은 사라져버렸다. 특히 잠들기 전에 반추가 심했는데, 몇 날 며칠은 잠들지 못하는 밤으로 이어지기까지 했다.


괴로운 생각의 되먹임, 그 뿌리는 무엇일까. 진화적으로 볼 때, 이러한 반추 프로세스가 모두 무용했던 것은 아니었다. 반추라는 프로세스가 인간에게 발달되기 시작했던 것은 과거의 실패나 위협상황을 반복적으로 떠올리며 대처전략을 준비하면서부터였다. 원시인은 하루에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며, 위협이 되었던 상황들을 다시 생각해 보면서 그다음 날의 사냥에 대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명의 발전은 인류의 몸에 각인된 프로세스보다 빨랐고, 현대에서는 이러한 반추기능이 병리적으로 전환되었다.


나는 자주 어린 시절의 장면을 몇 번이고 다시 떠올리는 양상의 반추를 하였다. 이러한 양상은 부모나 가까운 사람들과의 애착형성이 실패하고 아이가 반복적으로 자기 자신을 탓하는 생각을 하도록 하게 하는 환경에서 나타날 수 있다.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내가 스스로 혼자서 계속 담아둬야 할 때, 우리의 머릿속에는 이들이 계속 돌아가는 생각 되먹임 현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인지심리학에서는 반추를 비효율적인 사고 스타일로 본다. 이는 어떤 상황을 통제하고 싶은데 그것에 실패할 경우 생각을 계속 반복하는 패턴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또한 반추는 사건이 “왜”일어났는지에만 집중하고 “그래서 어떻게 해결할까”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생각은 결국 우울이라는 감정을 일으키고 다시 이 기분이 반추라는 프로세스를 돌게 만드는 악순환을 이룬다. 이는 세로토닌이나 도파민과 같은 신경전달물질의 불균형과도 관련이 있으며, 또한 뇌구조적으로 Default mode network(DMN)의 과활성화나 전전두엽의 기능저하와 같은 현상으로 연결된다. 즉, 반추라는 작용은 그저 막연히 심리적인 현상이 아니라 실제로 뇌와 신경전달물질들이 관여하는 물리적인 현상의 작용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지금도 이렇게 잠 못 들고 생각의 되먹임에 괴로워하는가?


나는 나이가 들면서 반추가 많이 줄어들게 되었는데, 이는 전반적으로 많은 것들이 변화되어서 그런 것 같다. 특히 예전에 비해 사람들 사이에서의 일을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는 습관이 들었다. 많은 일들을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하고, 주위 시선을 돌리고(특히 나를 즐겁게 하는 것들, 책 속의 이야기나 영화 속의 이야기, 그림, 음악등의 예술세계로 주위를 돌리는 것) 운동을 열심히 하고 제때의 루틴을 확보하는 것, 그것이 나를 반추의 세계에서부터 구해준 것 같다.


그리고 한창 마음이 괴로웠을 때 매일 했던 명상은 반추의 세계에서 나를 빠져나오게 한 하나의 원동력이었다. 명상을 하게 되면서 습득한 기술 중 하나는, 이러한 사고의 콘텐츠에 꼬리표를 달아보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생각의 흐름을 관찰하면서 “나는 지금 지나간 일들을 생각하고 있다” “지금의 생각은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대한 생각이다” 등, 나의 생각에 소제목을 달아보는 연습을 한 것이다. 이러한 연습을 하게 되면 실제로 반추가 일어날 때 “지금 나는 생각의 도돌이표를 하고 있다(즉 반추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게 된다. 그것만 하더라도 생각의 반복되는 파도 안으로 휘말리지 않고 바다 위에서 파도의 철썩임을 관찰할 수 있는 상태가 되고, 파도의 철썩임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대신 그 위에서 고요히 관찰할 수 있게 된다.


지금도 가끔씩 잠들기 전 생각들이 찾아온다. 또한 과거의 장면들도 되살아난다. 그러나 나는 이게 그것들을 “또 지나갈 나의 반추거리(?)”라고 생각하며 그 생각의 파도가 밀려올 때, 과거만큼 두려워하지 않는다. 바다에 항상 파도는 치기 마련이고, 언젠가는 그것들은 지나갈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 철썩임 속에 휘말리는 대신 파도 위에 앉아 소리를 듣는 나, 그것이 나이 들어가며 배워간 나의 새로운 삶의 자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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