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하지 않는 이유’라는 질문에서 시작하는 공중보건과 자살예방
자살에 관련된 많은 데이터들과 사례들, 그리고 이론들을 접하면서 많이 들었던 질문은 이것이었다. “사람들은 왜 죽으려고 할까” 경제적으로 힘들어서, 우울해서, 아파서, 절망 가운데 있어서, 관계가 무너져서. 이 질문은 너무 익숙하고 실제로 많은 통계와 연구들은 이 질문에 지금까지 성실히 답해왔다. 그리고 우리는 계속해서 추적해 왔다. 누가 더 위험한지, 어떤 요인이 위험을 높이는지, 어떤 집단에서 자살률이 높은지.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10만 명 중에 약 29명, 그리고 전 세계의 자살률은 10만 명당 8.9명이다. 이 자살률 통계를 들여다보다가 어느 날 문득, 조금 다른 질문이 머릿속에 남았다.
“그럼 왜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지 않을까”
같은 우울점수, 같은 스트레스 상황, 같은 상실을 겪고도 대다수는 자살로 이행하지 않는다. 역학적으로 보면, 이것은 예외가 아닌 표준(reference)적인 상황이다. 자살은 극단적인 사건이지만, 그 극단에 이르지 않는 경로가 훨씬 더 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질문은 다음으로 이어진다.
“무엇이 사람들을 아직 살아있게 만드는 걸까”
모든 중요한 질문에는 이미 먼저 질문 한 사람이 있다. 이 질문을 처음으로 체계화한 것은 미국의 임상 심리학자 마샤 리네한(Marsha M. Linehan)이었다. 그는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왜 죽고 싶은가” 대신 이렇게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아직 살아있나요?”
그 질문들을 모아서 만들어진 도구가 “자살하지 않는 이유 (Reasons for Living Inventory, RFLI)” 설문지이다. 위험요인을 주로 다루는 역학자들의 입장에서는 매우 흥미로운 설문지인데, 이는 위험요인이 아닌 보호요인(protective factor)을 직접 측정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는 이후 정신역학에서 다뤄지기 시작한 회복탄력성이나 긍정성, 보호요인 중심의 정신건강 연구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리네한은 앞의 질문에 대한 수많은 응답을 분석해 사람들이 말하는 ‘살아야 하는 이유’를 여섯 가지 범주로 정리했다.
1. 관계와 책임 (Responsibility to Family, Child-related Concerns)
“아이들이 아직 어리잖아요. 내가 없어지면 저 아이들 인생이 어떻게 될까요..”
“부모님이 나 하나 키우려고 평생 고생했는데, 그걸 이렇게 끝내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내가 없어지면 우리 남편(아내)이 감당해야 할 게 너무 많을 것 같아요.”
2. 도덕적/가치적 이유(Oral Objections)
“교회에서 자살은 죄라고 배웠어요”
“이건 옳지 않은 선택이라는 생각이 계속 들어요”
“어떤 일이 있어도 스스로 생을 끊는 건 넘지 말아야 할 선 같아요”
3. 미래에 대한 기대(further Expectations)
“지금은 최악이지만, 1년 뒤도 이럴 거라고는 장담 못하잖아요”
“아직 해보지 못한 게 남아 있어요”
“언젠가는 이 터널에서 끝나지 않을까 싶어요”
4. 회복과 대처에 대한 믿음(Survival and Coping Beliefs)
“예전에도 더 힘든 시기가 있었는데 버텼어요”
“완전히 무너지진 않을 것 같아요”
“지금은 너무 벼랑 끝 같지만, 하루씩은 넘길 수 있을 것 같아요”
5. 고통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Fear of Suicide)
“죽는 게 무섭기도 하고, 혹시 실패해서 더 큰 장애가 남을까 봐…”
“그 과정을 견딜 자신이 없어요”
“상상만 해도 너무 고통스러울 것 같아요”
6. 사회적 평가에 대한 염려(Fear of Social Disapproval)
“동네에서, 직장에서 소문이 날까 봐”
“사람들이 우리 가족을 어떻게 볼지 생각하면…”
“그러면 내가 너무 이기적인 사람이 되는 거 아니에요?”
이 분류는 오랫동안 자살연구의 주류였던 “누가 위험한가”, “어떤 요인이 자살을 예측하는가”라는 질문을 넘어, 자살 위험요인의 반대편에서 설명할 수 있는 명명 가능한 보호요인 범주를 처음으로 제공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이 “살아야 하는 이유”를 말할 때 반복적으로 참조되는 개념적 표준의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동시에 분명한 한계도 있었다. 대규모 코호트, 사망자료, 국가 통계에서는 이 질문이 핵심 변수로 사용된 적이 거의 없으며 WHO나 CDC, 통계청 같은 공중보건 표준 프레임에 포함이 된 적도 없었다. 즉, 임상이나 심리학의 언어였을지언정 역학이나 공중 보건의 표준은 아니었다.
이렇게 역학의 영역에 이 척도가 확장되기 힘들었던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여러 나라, 여러 연령대, 여러 문화권에서 이 설문을 적용하기 시작하면서, 앞에서 말했던 이 여섯 가지 구조가 모든 집단에서 동일하게 재현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문화에서는 도덕과 사회적 비난이 하나로 묶였고, 어떤 집단에서는 가족 책임과 미래 기대가 분리되지 않았다. 역학자의 언어로 말하면 “측정 구조의 불변성(measurement invariance)”이 흔들린 것이다. 이것은 도구의 실패라기보다, ‘자살하지 않는 이유’라는 개념 자체가 맥락 의존적임을 보여주는 증거에 가깝다. 또한 이 지표는 인구 수준 자료에 거의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구집단 전체를 설명하는 도구로는 쓰이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구집단 자료를 종합해 보면 자살하지 않는 이유는 생애주기와 성별에 따라 다른 분포를 보인다. 아동과 청소년기에서는 “관계”가 가장 강력한 보호요인이다. 특히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 중요하다. 청년기가 되면 “대처와 회복에 대한 믿음”이 핵심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는 여러 이유가 동시에 ‘자살하지 않는 이유’로 작동하기도 한다. 중년기에 이르면 ‘책임’이 중심이 된다. 자녀, 부모, 생계부담은 보호요인임과 동시에 위험요인으로도 작용한다. 노년기에 다다르면 ‘도덕’, ‘가치’, ‘역할;, ‘의미’가 다시 중요해진다. 동시에 사회적 고립이 커질수록 보호요인은 급격히 약화된다. 즉, 역학적으로 보면 자살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의 고정된 특성(trait)이 아니라 생애에 따라 이동하는 상태(state)이다.
역학의 기본원리는 단순하다. 위험요인과 보호요인은 인구집단마다 다르게 분포한다. 그렇다면 자살 예방도 “모두에게 같은 메시지”일 수 없다. 청소년에게는 연결을 복원하는 개입, 청년에게는 대처능력을 키우는 개입, 중년에게는 책임을 분산시키는 사회적 지원, 노년에게는 역할과 소속을 회복하는 구조가 필수적이다. 이것은 개인의 의지 문제가 아니라, 집단 특성에 맞춘 공중보건 전략이다.
현재 내가 책임연구자인 소아청소년 정신건강 코호트에서도 이 “자살하지 않는 이유”척도를 적용하고 있다. 이 데이터들을 보다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인했다. 많은 아이들과 청소년들은 설문에서 제시된 이유들 중 어느 것에도 강하게 동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딱히 죽고 살 이유가 있는 건 아니지 않아요? ” “그냥 아직 살아있는 거지요.” 이러한 상태는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까. 실제로 지금까지의 “자살하지 않는 이유” 도구가 가장 잘 포착하지 못했던 지점이 바로 여기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살아있는 이유를 명확하게 언어화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구집단 수준의 데이터를 보면, 이 집단의 크기는 결코 작지 않다. 그리고 이들 중 일부는 자살 위험이 “0’인 것이 아니라 불안정한 균형 위에 놓여있을 수 있다.
이 관찰은 자살 예방의 방향에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만약 상당수의 사람들이 자살하지 않는 이유를 명확히 말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면, 자살 예방은 ‘삶의 이유를 발견하게 하는 일’에만 머무를 수 없다. 이런 사람들에게 “살 이유를 찾아보세요”라고 요구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역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도 위험할 수 있다. 이유를 말로 정리하지 못하는 상태는 결심의 부재가 아니라 아직 버티고 있는 상태를 표현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필요한 것은 의미를 탐색하게 하는 질문이 아니라 그 상태가 무너지지 않도록 환경을 지탱하는 개입이다. 접근 가능한 도움, 안전한 공간, 누군가 곁에 있다는 분명한 신호, 그리고 오늘 하루를 넘길 수 있게 만드는 조건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공중보건학적 개입은 어떻게 설계되어야 할까. 핵심은 ‘자살하지 않는 이유’를 개인의 내면적 서사로만 다루지 않고 인구집단에서 관찰되는 분포와 상태의 차이로 번역하는 것이다. 즉, “자살하지 않는 이유” 설문지를 “누가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라, “어떤 사람들에게 어떤 보호경로가 얼마나 작동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보호요인 프로파일로 보고 그 프로파일에 따라 개입의 목표, 채널, 강도, 시점을 달리해야 한다.
먼저 “자살하지 않는 이유”가 비교적 뚜렷한 사람들-예를 들어 ‘가족 책임’, ‘도덕적 신념, ‘ 미래 기대’, ‘대처에 대한 믿음’ 중 하나가 강하게 작동되는 사람들-에게는, 개입의 목표가 “이유를 만들어내기”라기보다 이미 존재하는 이유를 유지/강화하고 위기에서 꺼내 쓸 수 있게 하는 것이 된다. 공중보건의 언어로 말하면 이는 ‘보호요인의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을 높이는 전략이다. 예를 들어 청소년에게 “관계”라는 요인이 중요하다면, 학교와 지역 사회는 ‘친구/교사/부모’중 적어도 한 명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 끊기지 않도록 연결 채널을 구조화한다. 단순 캠페인 구호보다, 위기 시 즉시 연락할 수 있는 어른 한 명을 지정하거나, 등교/야간/방학 같은 단절 구간을 메우는 체계(상담 접근성, 온라인-오프라인 연계, 또래 게이트키퍼)를 설계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중년에서 “책임”이 중요한 요인이라면 개입방안은 “책임을 더 상기시키는 메시지”가 아니라 책임을 실제로 덜어주는 서비스(돌붐 부담 경감, 재정/법률/고용 지원, 가족 돌봄 휴가, 부채/채무 상담, 직장 내 유연근무 등)로 연결되어야 한다. 이유가 “대처 신념”이라면, 지역 수준에서 접근 가능한 심리치료/기술훈련(정서조절, 문제해결, 수면/중독 개입)을 확대해 그 신념이 근거 없는 자기 암시가 아니라 “사용 가능한 기술”이 되게 해야 한다.
반대로 “자살하지 않는 이유”가 뚜렷하지 않은 사람들-“딱히 이유는 없어요”, “그냥 아직 살아있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공중보건학적 개입은 완전히 다른 우선순위를 가져야 한다. 이들에게 “삶의 이유를 찾아보라”는 권유는 종종 부담을 늘리고, ‘사는 이유조차 없는 사람’이라는 자기 낙인을 강화할 수 있다. 따라서 개입의 목표는 ‘의미 만들기’가 아니라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먼저 확보하는 것이다. 이는 개인의 내면을 변화시키기 전에 환경과 시스템이 제공할 수 있는 최소보호선을 깔아주는 작업이다. 구체적으로 (1) 위험한 순간에 바로 닿을 수 있는 도움(24시간 상담/응급여계/모바일 접근), (2) 물리적, 사회적으로 안전한 공간(위기 쉼터, 병상 접근성, 안전계획을 실행할 수 있는 장소), (3) 혼자가 아니라는 신호(정기적 체크인, 문자/전화 기반 추적관찰, 지역사회 방문 서비스), (4) 결정적 순간의 ‘시간 벌기’를 가능하게 하는 수단 접근 제한(치명적 수단의 접근성 낮추기, 안전 보관, 고위험 시기 보호자/동거인 개입)을 포함한다. 역학적으로 보면, 이 네 가지는 ‘이유’를 요구하지 않아도 개입가능하며, 인구 수준에서 자살사망을 줄일 수 있는 가능성이 큰 구조적 개입이다. 특히 이렇게 “자살하지 않는 이유”가 특별히 없는 사람들에게는 “살아야 할 이유를 설명해 달라”는 질문보다 “오늘을 안전하게 넘길 수 있도록 무엇을 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먼저여야 한다.
이렇게 보면 “자살하지 않는 이유”는 공중보건에서 ‘선별’의 도구가 될 수 있다. 누군가의 “자살하지 않는 이유” 점수가 높다는 것은 그 사람이 안전하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보호 경로가 작동하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신호다. 반대로 이에 대한 이유가 뚜렷하지 않다는 것이 곧 위험하다는 것이 아니라, 위기에서 붙잡을 ‘고리’가 언어적으로는 아직 마련되지 않았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인구집단 개입은 ‘한 가지 처방’이 아니라, 이 설문지의 프로파일에 따라 (1) 기존 이유를 유지/강화하는 개입과 (2) 이유가 없어도 안전을 보장하는 조건 기반 개입을 이중 트랙으로 설계해야 한다. 그리고 이 두 트랙은 단계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 조건 기반 개입으로 오늘을 넘긴 사람이 시간이 지나며 관계, 역할, 가치, 미래, 대처 같은 이유를 다시 언어화할 수 있게 된다면, 그때 비로소 의미 위주의 개입이 효과를 낼 수 있다. 즉, 공중보건학적 자살예방은 ‘이유를 만드는 일’과 ‘조건을 만드는 일’을 분리해 순서를 조정하는 작업이며, 오늘 우리가 살펴보았던 “자살하지 않는 이유” 설문지는 그 순서를 설계하는데 필요한 지도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