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을 연구하는 방식이 달라지면 예방도 달라진다
데이터는 늘었는데, 예방은 왜 더 어려워졌을까
요즘 정신건강 연구는 “데이터 시대”를 맞이했다. 건강보험 청구자료, 전자의무기록, 국가 통계, 각종 코호트(장기 추적 연구) 자료가 연결되면서 과거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규모의 연구가 가능해졌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데이터가 많아질수록 정신건강 문제를 더 잘 예방하게 되었느냐고 물으면, 선뜻 “그렇다”라고 말하기 어렵다. 전에 비해 연구의 숫자는 많이 늘었는데, 전에 비해 괄목할만한 정책성과를 내고 있냐는 질문에 쉽게 답하기 어렵다. 이 시점에서 더 근본적으로 물어야 할 것은 “정신질환은 어떤 구조의 문제인가”, 그리고 “무엇을 사건으로 볼 것인가” 같은 질문을 충분히 논의하고 정리하는 것이 아닐까?
이 문제를 생각하기 위해, 우리는 한 번 암 연구의 경험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암 연구는 한국에서 전염병 연구와 함께 가장 제도화된 역학 분야 중 하나였다. 특히 암등록사업을 통해 “누가, 언제, 어떤 암에 걸렸는지”를 인구집단 단위로 비교적 체계적으로 기록해 왔다. 중요한 점은 암 연구가 단지 데이터가 많아서 성공한 게 아니라, 질병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를 바꾸어 왔다는 것이다.
암역학이 보여준 것: ‘암’은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과정’이다
초기의 암 연구는 주로 사망자료를 중심으로 했다. 누가 어떤 암으로 죽었는지 보는 방식이다. 그러다 보니 “암이 생겼는지”와 “암으로 오래 살았는지”가 뒤섞여 해석되는 일이 흔했다. 이에 대한 전환점은 암등록체계가 세워지고 나서였다. 암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단일 사건이 아니라, 발생–진단–병기–치료–재발–사망으로 이어지는 과정임을 인지하게 된 것이다. 암등록은 이 과정을 단계별로 기록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연구 질문도 달라졌다. ”무엇이 암을 유발하는가?”만 묻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 질병 경로가 달라지는가?”를 묻게 된 것이다.
이 변화는 예방을 바라보는 방식도 바꾸었다. 예를 들어 흡연은 암 발생의 원인이지만, 검진은 ‘진단 시점을 앞당기는 개입’이고, 치료 접근성은 생존을 좌우하는 요인이다. 즉 암 예방은 한 가지 행동(예: 금연)만으로 접근되지 않고 발생 이전의 예방, 조기 발견, 치료 이후의 관리 등 여러 시점에서 개입하게 된 것이다.
암역학과 정신역학 사이에서
필자는 초기에 암역학을 전공했고, 이후에 정신역학을 전공해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암역학을 기반으로 역학을 배웠고, 이를 정신역학 분야에 확대 적용하며 연구를 하고 있는데, 같은 역학 방법을 써도, 정신건강에서는 문제를 풀어내기에 더 어려운 경우들이 많았다. 암 연구와 정신건강 연구는 겉으로 보면 비슷한 방법을 쓴다. 코호트 연구, 생존분석, 시간에 따라 변하는 요인을 고려하는 분석, 상태가 바뀌는 과정을 보는 분석 등은 둘 당에서 사용된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암에서는 ‘사건’이 비교적 분명하지만, 정신건강에서는 사건이 훨씬 모호하다.
암에서는 “언제 암이 진단되었는가”가 비교적 명확하게 기록된다. 병리검사나 영상검사 같은 객관적 기준이 있고, 암종과 병기 같은 분류도 표준화되어 있다. 물론 조기진단이나 과잉진단 같은 문제는 있지만, 그래도 “암이 생겼다”는 사건 자체가 비교적 단단하다. 반면 정신건강에서는 “발병”이라는 순간을 딱 잘라 말하기 어렵다. 우울이나 불안은 서서히 시작되기도 하고, 악화와 호전을 반복하기도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진단 시점이 단지 증상의 시작이 아니라 의료접근, 도움요청, 문화, 낙인, 제도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정신건강 연구에서 건강보험 청구자료의 진단코드를 이용해 “발생률”을 계산하면, 그것은 실제로는 “발생률(incidence)”이라기보다 의료체계에서 ‘발견된 비율’(ascertainment rate) 일 때가 많다. 이 차이를 모르고 연구하면, 우리는 “질병이 생긴 원인”을 분석한다고 생각하면서 사실은 “진단될 가능성”을 분석하게 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한 오차가 아니라, 연구 질문 자체가 엇나가는 문제다.
암에도 사회경제적 요인이 영향을 미친다. 누가 더 많이 노출되는지, 누가 더 일찍 검진을 받는지, 누가 더 좋은 치료에 접근하는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하지만 암에서는 흡연이나 특정 감염처럼 효과가 큰 위험요인이 뚜렷한 경우가 있다. 이에 반해 정신건강에서는 사회경제적 조건, 관계, 스트레스, 트라우마, 문화, 제도 같은 요인이 평균적으로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무엇보다 이런 요인은 발병뿐 아니라 진단과 치료 경로에도 동시에 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 수면, 음주, 의료이용 같은 것들은 연구에서 흔히 “원인”으로 쓰이지만, 사실은 정신건강 상태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런 경우에는 ‘원인과 결과가 서로 얽혀’ 분석이 훨씬 까다로워진다. 정신건강 연구에서 “시간”을 제대로 다뤄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정신건강은 시간이 흐르면서 누적되기도 하고, 어떤 사건이 촉발점이 되기도 하며, 특정 시기의 경험이 장기적으로 영향을 주기도 한다. 오랜 기간의 스트레스 누적, 갑작스러운 실직이나 관계 단절 같은 촉발 사건, 성장기에 겪은 트라우마 같은 민감 시기 경험과 같은 사건들은 모두 다른 시간의 기준을 갖고 있다. 이런 구조에서는 “한 시점의 노출”과 “한 시점의 결과”만 비교하는 방식으로는 부족하다. 정신건강 연구는 정적인 사진이 아니라 움직이는 영상에 가깝다. 그래서 증상의 궤적을 보거나, 상태가 바뀌는 과정을 보거나,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요인을 전제로 분석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자료 중에서도 종적자료와 코호트자료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서 나온다.
암의 예방방법과 정신질환의 예방방법이 같을까?
원인을 안다고 해서 예방이 자동으로 따라오지 않는다. 암에서는 흡연처럼 강력한 위험요인이 있고, 금연이라는 비교적 명확한 개입이 있을 때 “원인 규명 → 예방”의 연결이 비교적 잘 성립한다. 하지만 암에서도 예방은 금연만이 아니라 검진, 치료 접근, 생존자 관리까지 포함하는 ‘단계적 전략’으로 이루어진다.
정신건강에서는 훨씬 더 그렇다. 위험요인은 많고, 각각의 영향은 작고, 서로 얽혀 있다. 그리고 예방은 종종 ‘원인 제거’보다 서비스 접근, 사회 환경, 위기 대응 체계에서 결정된다.
예를 들어 현재 우리 사회의 큰 이슈가 되고 있는 자살예방을 예로 들어보자. 자살예방연구에서 우울증은 자살과 강하게 연관이 된다. 암역학처럼 단순하게 적용하면 우울증 치료를 늘려 자살을 줄이는 예방책이 나온다. 이 논리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자살은 우울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급성 위기 사건, 알코올 사용, 사회적 고립, 치명적 수단에 대한 접근성, 위기 시점의 서비스 공백이 함께 작동한다. 같은 우울 증상을 가진 사람이라도, 위기 직후 상담을 받을 수 있었는지, 야간 응급 대응이 있었는지, 치명적 수단 접근이 제한되는지에 따라 결과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즉 예방은 “원인이 무엇인가”보다 “어디에서 경로가 달라질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
선별검사도 마찬가지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초·중·고등학교와 많은 직장에서 우울증 선별검사가 시행되고 있으며, 지역보건소에서는 무료 치매 선별검사도 제공되고 있다. 이처럼 정신건강 선별검사는 지속적으로 확장되고 있고, 이를 경험하는 사람들의 수 또한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선별검사는 잠재적 위험군을 조기에 발견하는 데 분명한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이어질 자원이 충분하지 않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치료 인력이 부족하거나, 낙인과 비용, 시간 제약으로 인해 실제 도움을 받기 어려운 환경에서는 선별검사가 예방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실제로 위험군으로 분류되더라도 누구는 즉시 상담이나 치료로 연결되는 반면, 누구는 수개월의 대기시간을 겪거나 직장과 학교의 제약으로 치료를 지속하지 못한다. 또 어떤 사람은 민간 서비스나 가족의 지원을 통해 비교적 빠른 개입을 받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사실상 아무 변화 없이 위험 상태에 머물게 된다. 이때 선별검사는 위험을 줄이는 장치라기보다, 이미 존재하던 사회적·지역적·경제적 격차를 드러내고 오히려 확대하는 기제로 작동할 수 있다. 즉 동일한 점수의 우울 위험군이라 하더라도 이후의 경로는 개인의 선택이나 의지 문제가 아니라, 접근성, 대기시간, 치료 지속성, 위기 시점 대응 체계 등 시스템의 구조에 의해 결정된다. 정신건강 선별이 실제 예방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검사 자체보다도 검사 이후의 서비스 연결 경로 전체가 함께 설계되어야 하며, 정신건강 예방은 이렇게 관측과 개입, 그리고 그 사이의 경로를 모두 포함할 때 비로소 작동한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모든 연구결과의 시작이 데이터에서부터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다른 나라에 비해 분석이 가능한 정신건강 데이터의 양이 많지 않았다. 다만 핵심은 “아무 데이터나 많이”가 아니라, 어떤 질문을 가능하게 하는 데이터인가다. 암등록이 처음부터 완벽했던 것이 아니라, 연구 질문이 확장되면서 병기, 치료, 재발 같은 항목이 추가되어 왔듯이, 정신건강에서도 데이터 인프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커져야 한다. 정신건강 연구에 특히 부족한 것은 증상의 반복 측정(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중요한 생애사건이 일어난 시점, 위기 시점에 서비스가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대기시간, 접근성, 치료 지속성, 정책 변화가 개인에게 “언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정보들이다. 다음과 같은 정보가 있어야 정신건강의 시간 구조와 경로를 제대로 연구할 수 있다.
나가며
암역학의 성과는 데이터가 많아서도, 통계기법이 뛰어나서도 아니다. 암을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과정으로 보고, 단계마다 다른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맞게 데이터와 방법론을 맞춰 온 결과다. 정신역학의 다음 단계는 암 연구를 그대로 따라 하는 데 있지 않다. 필요한 것은 정신질환의 생성과 관측 구조에 맞는 질문을 세우고, 그 질문을 중심으로 데이터와 방법론이 함께 발전하도록 연구 전략을 바꾸는 일이다.
정신건강 예방은 ‘원인을 찾으면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위험에 노출되고, 어떻게 발견되고, 어떤 경로로 도움을 받고, 어디에서 개입이 실패하는지를 함께 봐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정신건강 예방은 치료 중심의 단순한 처방을 넘어, 다층적인 공중보건 전략으로 확장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