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까망 Mar 16. 2024

파란머리패스(Blueheadpathy)

내 말에 공감하지 않는 자 처단하라!


 달리기를 하면서 알게 된 친구가 한 명 있다. 뭐 지금은 연락을 하지 않고 그 친구가 SNS 상에서 나를 언팔해서 아마도 그 친구의 친구목록에서 삭제가 된 것 같다. 이제 더 이상 친구는 아닌 것 같으니 음...... '파란머리'라고 칭하겠다.


 이 파란머리는 분명 나보다 한 살 어린데 음력 생일을 운운하며 나랑 동갑이라며 친구를 하자고 했고 제주도에서 동갑친구가 없었는데 친구가 생겨서 너무 좋다고 자주 말하곤 했다. 참고로 파란 머리는 여자다.

 파란머리는 추진력이 좋았다. 달리기 동호회를 만들어 제주도에서 달리기 한다는 사람들을 무슨 귤 따듯 모집했다. 파란머리가 디자인 한 동호회 로고를 바탕으로 모자와 티셔츠를 만들어 일부는 판매하고 생일 같은 특별한 날에는 무료로 배포하기도 했다. 파란머리가 어릴 땐 제주도의 상당 부분(이건 내가 과장을 해서 표현)이 집안의 땅이었고 지금도 집 마당에서 달리기를 할 수 있을 정도의 부지가 남아있어 누가보아도 부자라고 느껴지고 사람도 멋지다 보니 "언니 멋져요" 하며 추앙하는 여성팬도 많았다. 나도 물론 파란머리를 지금도 멋지다고 생각한다.


 살다 보면 내 생각과 타인의 생각이 부딪혀 괴리감이 생기는 경우가 있다. 아마도 내 생에 처음으로 '세상사람 모두가 다 같지는 않구나'라고 느끼게 해 준 머리가 파란머리이다.


 하루는 파란머리의 차를 타고 어디로 가던 중 주유소에 들렀고 파란머리는 만 원어치 넣어달라고 했다. 가끔 친구들 중 렌터카 반납 전에 주유게이지 맞춘다고 5천 원, 만원씩 넣는 건 봤었는데 본인차에 만 원어치 넣는 건 처음 보았다. 아무튼 그렇게 주유를 하고 길을 나서는데 주유게이지가 한 칸도 안 찬다면서 가서 따져야겠다며 계속 씩씩거렸다. 그렇게 씩씩거리다 끝날 줄 알았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주유소였다. 파란머리는 우리네 아버지보다 윗 연배로 보이시는 주유원에게 고래고래 소리치며 저번에 넣었을 땐 한 칸 찼었는데 만 원어치 안 넣고 속인 거 아니냐며 내가 여기 몇 년 동안 이용했는데 다시는 이용 안 한다면서 파란머리가 빨간머리가 되도록 열을 올렸다.


 이렇게 본인은 파란머리가 아니라 실은 빨간머리라는 것을 보여준 뒤로 동호회 내에서 엄청난 호박씨를 까고 뱉기 시작했다. 자기편 만들어서 다른 채팅방을 파서 순진한 아이 나락으로 보내버리고 자기랑 사귄 남자도 나쁜 놈 만들어서 매장시켜 버리고 청나라의 서태후가 환생한 것 같았다. 동호회를 탈퇴하고 싶었지만 손가락 하나는 포기하고 나와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달리기 동호회니깐 발가락 하나를 내놓으라 할 건가!)


 어느 날 파란머리가 같이 밥 먹자고 불러서 후다닥 달려가서 착석했다. 사실 파란머리가 나에게는 잘해줬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파란머리는 자기 말을 듣고 이 사람이 내 편인지 아닌지 선별하거나 혹은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그루밍을 하는 게 아닐까 싶은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내 말에 동의해죠!

 이야기는 이러했다. 파란머리가 썸을 타는 검은머리에게 우리 다음에 같이 가자며 식당을 하나 보여줬다고 한다. 그런데 그 검은머리가 검은머리의 어머니와 함께 그 식당에 갔고 그 걸 SNS에 올렸다고 한다. 그 걸 본 파란머리는 "아니 왜 내가 같이 가자고 한 식당을 다른 여자랑 같이 가냐고"라고 말하며 또 빨간머리가 되었다.

 아니...... 어머니가 다른 여자...... 인가? 뭐 남자는 아닌 여자이긴 한데 이성의 개념은 아니잖아...... 혼란......

 이런 게 힘들었다. 파란머리의 주장 혹은 개념에 한 번에 공감하거나 동의가 되지 않았고 혼란스러웠다. 내 생각이 잘 못 된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되고 이게 여자의 마음인가? 어질어질했다.


 확신을 하면 안 되지만 한 가지 확신한 것은 파란머리는 관종이었다. 본인 스스로 관종이라는 것을 아는 당당한 관종 그래도 참 귀여운 구석이 있었는데 요즘 SNS 상에 달리기나 이런저런 운동하는 계정을 보면 아디다스, 나이키 등등 스포츠브랜드에서 후원을 받는 인플루언서를 쉽게 볼 수 있다. 이 파란머리가 하루는 이런 말을 했다.

 "아디다스 후원받는다고 ‘아디다스’ 대빵만 하게 적힌 티셔츠 입고 다니는 거 보면 꼴사납다"와 같은 '나 아디다스 후원받아' 티 내는 사람 보기 싫다는 뉘앙스의 말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파란머리 또한 아디다스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다른 브랜드인데 아디다스라고 하겠다) 또 밥을 먹자고 불렀고 나는 제주도에 없는 KTX를 탄 것 마냥 시속 300km로 달려가서 착석했다. 음식이 나오니 파란머리는 두터운 점퍼를 벗었고 하얀 티셔츠에 '아디다스'라고 적혀있었다. 내가 본 '아디다스' 중 가장 큰 '아디다스' 였다. 밥을 다 먹고 파란머리 가시는 길 조심히 가시라고 배웅을 해드렸다. 아니! 내가 지금 뭘 본 것인가? 차에도 '아디다스' 랩핑을 한 게 아닌가?


 파란머리와 함께 있으면 자연스레 사고의 확장이 이루어져 즐거웠지만? 남 욕하는 걸 보면서 너무 힘들었고 결국엔 나도 그 대상자가 될 것 같았기에 손모가지 내놓는 심정으로 동호회를 나왔고 결국 그 동호회는 엉또폭포 물줄기를 타고 사라졌다. 아마도 내 욕을 한 바가지 했을 것이고 채팅방의 동호인들은 맞장구를 쳐주었을 것이다. 이 관계를 계기로 해서 인간관계를 쉽게 맺지 않는 경향이 생기기 시작한 것 같다.


이전 03화 '그 일' 아직 하세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