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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애 Jul 02. 2024

한스 안데르센, 디즈니, 인어공주

2년 전 겨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정여울 작가님의 강의를 듣다 메모해 둔 것이 있다. 디즈니사의 '인어공주(The little mermaid)'는 한스 안데르센(Hans Andersen)의 원작과 많이 다르다는 내용이다. 특히, 가부장적 요소가 두드러지게 각색되었는데 그 예시 중 하나는 이렇다. 


원작에서 인어공주의 아버지는 '왕비를 잃은 임금'으로 잠깐 언급된 후 이어지는 서사에 등장하지 않는다다. 완전한 문장(Sentence)이 아니라 부사절(Clause)의 수식어구 형태로 한번 언급된다. 대신 인어공주에게 꿈을 심어주고, 지혜를 전해주는 중심인물로 할머니가 등장한다. 소설에서 안데르센은 이 할머니를 가리켜 존경할만하고 영리한 여인이라고 묘사한다. 궁정 살림과 손녀 교육을 담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꼬리에 열두 개의 굴을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범상치 않은 할머니다. 


디즈니로 넘어오면서, 할머니는 퇴장하고 아버지가 등장한다. 인어공주의 아버지는 인간세계를 궁금해하는 여섯 번째 딸을 근엄한 모습으로 꾸중하고 훈계한다. 느닷없이 아버지에게 권력이 부여된 것이다. 30여 년의 내 삶을 되돌아본다. 나름의 역경과 극복의 역사가 있었다. 그러나 철저히 우먼박스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여성성'이라는 사회문화적 규범이 제시해 준 박스 안에서 적절하게 성실했고, 알맞은 정도로만 어려움을 극복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공부 잘하는 여자 or 예쁜 여자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여자 or 상대 말을 잘 들어주는 여자

무표정인 여자 or 웃는 여자


나만의 일이었을까? 나는 공부 잘하는 친구가 예쁘기까지 했을 때만 부러웠지, 공부 잘하는 친구가 못생겼을 땐 그다지 부럽지 않았다. 어쩌면 여자는 공부 잘하는 것보다 예쁜 게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딸을 낳고서야 위 문장에서 '여자'를 '사람'으로 바꾸어 본다. 문제의식이 싹트는 순간이다. 대학원 시절 찍은 단체사진을 꺼내 본다. 여학생들은 올망졸망 모여 웃고 있고, 남학생들은 대개 무표정하다. 엄지를 지켜 올리거나 맨 앞줄에 나와 가로로 드러눕는 식이다. 모두 교사였는데도 그랬다.


무언가가 단단히 학습되었구나.


딸을 낳고 키우는 여성 양육자가 되고서야 그동안 내가 반쪽자리 세상을 살아왔을지도 모른다는 경고등이 켜졌다. 사춘기가 시작되었다. 학교 선생님이 학기별로 손에 쥐어주시던 정제된 지식, 권위의 교과서를 덮는다. 


내가 어떤 여성성이라는 규범에 내가 갇혀있었는지

내가 지레 스스로 포기해 버린 가능성들이 얼마나 아까운 것이었는지

내가 남성성이라는 규범으로만 남자를 바라보며 얼마나 상대를 아프게 했는지

여성성과 남성성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지


비단 여자만의 이야기 아니다. 남성을 공격하거나 꼬집기 위함이 아니다. 나에게 소중한 남편, 두 동생, 아빠는 모두 남성이기 때문이다. 우먼박스, 맨 박스에서 걸어 나와 마침내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자기 자신에게 가닿는 예시 하나만큼의 무게로 이 여정을 글로 기록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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