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고민이었다. 비공개로 두툼히 쌓여있는 내 일기장. 굳이 공개를 해야 할까? 지난한 고민은 2년 동안 이어졌다. 지난 2월, 작정을 했다. 브런치 작가 선정을 계기로 모두에게 보이는 글을 써보기로 한 것이다. 그 용기의 바닥에는 자문자답으로 떠오른 묵직한 이유들이 있다.
두려움은 반응이고 용기는 결심이다.
내 글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불특정다수에게 날아올 비난과 비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애정을 담아 쓴 나의 글에 날 선 말이 날아와 꽂히면 아플 것 같았다. 익명성의 공간이 아니던가. 책을 읽다 발견한 이 문장. 나를 움직였다.
Fear is reaction, Courage is decision.
내가 발행한 글에 악플이 달린다면 속상할 것이다.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이왕 받은 상처, 그 당연함에서 멈추지 말고 한 발자국만 더 나아가보자. 수동태(Reaction)에서 능동태(Decision)로 바꿔보자. 아마도 터무니없는 악플은 나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 것 같다. 스스로도 개운치 않은 부분을 뜨끔하게 짚어주는 악플 만이 나를 아프게 할 것이다. 의미 있는 악플에는 나에게 도움이 될 부분도 함께 숨겨져 있지 않을까? 악플이 달렸을 땐 내 글을 다시 들여다보면 어떨까?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남이 깨면 계란프라이고 내가 깨면 병아리로 태어나는 것이다.
이참에 개방성을 높여보자.
전통 심리학에서는 성격을 결정하는 다섯 가지 요인이 있다고 설명한다. 일명 Five Factor Model. 그중 첫 번째가 개방성(Openness to experience)이다. 새로운 것에 얼마나 마음이 열려 있는지 보여주는 지표다. 자신이 세운 하나의 원칙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조언이나 충고를 참고하여 원칙을 수정하고 변경할 수 있는 마인드셋이다.
브런치 작가로 글을 발행하면 조회수, 댓글과 같은 피드백이 그림자처럼 달라붙는다. 열심히 쓴 글인데 조회수가 낮을 수 있고, 지나치게 솔직하게 쓴 글엔 악플이 달릴 수도 있다. 충고, 조언, 평가, 판단의 말은 듣기 힘들다. 대학원 2년이 그토록 힘들었던 이유였을 것이다.
협소한 나의 개방성을 이참에 키워볼까? 낮은 조회수와 악플을 수용해 보는 연습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브런치에서 글을 읽는 사람들은 그래도 어느 정도의 소양이 있는 사람들이니 덜 아프게 때리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함께.
다시는 읽지 않는 글이라니.
나의 비공개 글에는 비린내가 난다. 극단의 감정으로 치달은 흔적이 보인다. 너무 싱싱하다. 날것의 생선이라 다시 들춰보더라도 끝까지 읽기 어렵다. 후다닥 덮어버린다. 쏟아내듯, 비워내듯, 배설하듯 한 번 쓰고 다시는 읽지 않게 되는 나의 글이 가여웠다. 잘 조리하면 맛있는 생선구이가 될 수 있을 텐데. 누군가에게 오메가 3와 단백질을 줄 수도 있었을 텐데.
모두에게 보일 글이라는 위상으로 다시 데려온다. 고쳐 쓴다. 자연스럽게 메타인지에 시동이 걸린다. 나의 생각과 감정의 참신함과 푸르름은 건지고 지나치게 날카롭고 거친 부분은 문지르거나 접어 감춘다. 지나가던 사람이 내 글의 뾰족함에 걸려 마음의 올이 풀리지 않도록 매무새를 가다듬는데, 그 과정에서 더 좋은 글이 된다고 느낀다.
쌀밥 같은 글을 짓는 사람이 되어보자.
수십 번의 고쳐쓰기를 가는 과정에서 스스로 성숙한 사람이 되어간다고 느낀다. 손 가는 대로 쓴 글을 읽어보면 무의식 속에 가라앉아 있던 나의 고정관념, 혐오, 편견이 고스란히 묻어 나온다. '아, 내가 이런 편견을 가지고 있었구나.' 내가 나를 보며 깨닫는다. 글을 수정하면서 나 자신도 수정한다. 신선한 성장감이다.
감히 쌀밥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떤 사람이 보더라도 상처받지 않는 글을 쓰고 싶다. 브런치에서 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어떤 맥락에 놓여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이도, 직업도, 성별도, 사회적 지위도 모두 다를 것이다. 내 글이 세상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원한 창문이 되어줄 수 있다면 좋겠다.
나만의 아카이브. 개인이나 기업에서 만든 사립 박물관에 가 보면 창립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다사다난한 스토리를 영화 한 편을 보듯 짜임새 있게 구성해 둔 것을 볼 수 있다. 땅을 사고 건물을 짓진 못해도 온라인 공간에 나의 삶의 궤적을 만들어 볼 순 있지 않을까? 삶의 여정에서 나는 어떤 고민을 했고, 무엇을 느끼고 결심을 했는지를 기록하며 인생의 마디를 만들고 싶다.
창작자(Creater)가 되고 싶다.
소비자, 평가자보다는 창작자이고 싶다. 관람석에 앉아 선수의 경기를 지켜보는 것도 좋지만, 질책을 받더라도 땀 흘리며 필드 안에서 뛰어다니는 플레이어가 되고 싶다. 2년 동안 공부해서 100쪽이 조금 넘는 학위 논문을 완성했을 때도 그랬다. 발표가 끝났을 때 청중은 내 논문에 대해 10분 만에 시시비비를 가려주었다. 2년 간의 노력이 10분 만에 평가되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발표자의 자리에 선 내가 더 멋지다고 느꼈다. 논문발표회, 나 같은 발표자가 없으면 평가자는 필요 없는 것 아닌가.
딸에게 남기는 유언을 겸한다.
어쩌면 가장 굵은 이유일지도 모른다. '딸에게 유언을 남긴다면?' 하나부터 열까지 숱한 말들이 떠오른다. 한두 문장으론 정리가 안된다. 시간만 된다면 매일매일 읽어볼 수 있는 편지형식을 빌어 무한대로 남기고 싶다. 그럼 그 말들을 적어보자. 지금부터 가지런히 쌓아갈 브런치 글은 내 딸에게 남겨줄 유언장을 겸한다.
너를 키우면서 나는 어떤 고민을 했고, 기쁨을 누렸는지 알려주고 싶다. 내가 교직생활을 하면서 어떤 어려움을 겪어냈고 보람을 느꼈는지 알려주고 싶다. 내가 죽은 뒤에도 내 글은 살아남아 내 딸에게 때론 위로가, 때론 사랑이, 때론 등불이 되어줄 것이다. 그래.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데, 나는 글을 남겨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