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지애 Apr 24. 2024

인위적 희생의 결과는 모두의 불행이었다.

아빠와 화해하기


아빠의 분노에는 힘듦, 짜증, 비난이 섞여있다. 늘 비장하다. 스몰토크는 불가능.


출근 할 땐 어김없이 화가 나 있다. 퇴근하고 들어오면 더욱 화가 나 있다. 주중에는 화를 낼 준비를 하는 사람같고, 주말에는 어김없이 우리에게 게으르다며 화를 냈다. 외식을 할 때는 탄산음료를 시킨다고 화를 냈고,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먹는다고 화를 냈다. 예능 프로그램을 본다고 화를 냈고, 치킨이나 피자와 같이 영양가 없는 음식을 시켜 먹는다고 화를 냈다. 아빠가 물어보는 한자의 음과 뜻을 모른다고 화를 냈다.


칭찬에도 인색했다. 내가 중학교 때 전교 1등을 할 때는 '시골 전교 1등이 전교 1등이냐?' 했고, 고등학교에서 영재반에 들어갔을 때는 '스무 명이 있는데, 한 학교에 영재가 그렇게 많느냐?' 했다. 우리 삼 남매에게 아빠는 어중이떠중이라고 했다.


공부를 중위권 정도로 했던 막냇동생을 차로 따로 불러내 '남자는 능력이 없으면 무시당한다.'며 정신 차리라는 말을 분노로 전했다. 막내 동생은 집으로 오자마자 방에 있는 모든 책들을 집어던지며 고함을 지르고 울었다.


수능을 치기 몇 주 전, 나를 따로 불러냈다.


아빠가 돈이 없다.

서울에 있는 국립대(=서울대)가 아니면
서울에 있는 대학은 어렵다.
수능을 못 쳐도 우리 집에 재수는 없다.'


못 박았다. 정확하게는 나에게 쓸 돈이 없었던 것 같다.아빠의 바람대로 우리 삼 남매는 재수를 하지 않았고, 모두 등록금이 싸기로 유명한 국립대학에 진학했다.


아빠와 함께 살았던 지난 20년을 돌아본다. 1박을 하는 여행 한번 없었고, 공연 한번 본 적이 없다. 할머니를 위해선 땅을 사고, 집을 지었지만.


엄마는 지금도 아빠에게 한 달 생활비를 여러 회차로 나누어 받는다. 나는 서울 임용시험에 한 번에 합격해 24살부터 월급을 받아 생활했다. 첫째 남동생은 ROTC로 복무하면서 돈 2천만 원 모은 후, 중위 전역과 동시에 대기업에 입사했다. 막냇동생은 졸업 후 곧바로 공무원 준비를 하다가 한번 낙방을 한 뒤 아빠 친구회사에 붙들려가 취직이 되었다.


내가 부모라면 그 흔한 휴학 한번 없이 대학을 졸업하고 ROTC로 복무한 첫째 아들에겐 해외여행이라도 좀 다녀와라, 쉬어라 했을 것 같다.


공무원 시험 준비로 고생했을 둘째 아들에게는 20대 중반, 아직 젊디 젊으니 세상 경험을 쌓아라 하며 기다려주었을 것 같다. 네 흥미와 적성은 모르겠고, 일단 뭐라도 하라는 식의 취직 닦달은 하지 않았을 것 같다. 자기 탐색의 시간을 주었을 것 같다.


아빠는 막내 동생이 한 달을 쉬는 꼴을 못 보고 곧바로 친구 회사로 끌고 가 전공(중국어)과 무관한 공업 관련 회사에 취직을 시켰다.


'젊을 때 고생은 사서 한다'라는 말로 막내 동생이 자신의 인생을 좀 더 여유 있고 느긋하게 탐색해 보고 시행착오를 겪어볼(다양한 아르바이트 등) 시간을 주지 않았다.


강제취직사건은 아빠가 아들을 위하는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라 아빠 자신을 위한 결정이었음을, 그 기만을 나는 알아차렸다.


2012년 9월, 발령을 받고 처음 서울에 올라왔을 때를 기억한다. 나는 중랑구에 5000만 원짜리 전세를 주고 원룸에 살았다. 낡았고 어둡고 습했다. 창문은 양 손바닥으로 가려졌다. 옆방 남자의 소변 누는 소리도 들렸다. 여름에는 모기가 바글댔고 겨울에는 동파가 잦았다. 못 씻고 학교에 출근한 적도 있다. 알고 보니 내 방은 옆방과 가벽을 세워서 만든 불법 증축 건물이었다.


돈을 보태 지애가 좀 더 쾌적한 곳에서 살게 하자는 엄마의 말에 아빠는 일침 했다.


 나는 처음 수의사 됐을 때,

돈이 없어서
남의 동물병원 부원장으로 일하면서
신문지 깔고 바닥에서 잤다.
그만하면 됐다.


내 월급으로 4천만 원을 모을 때까지 4년간 나는 그곳에 살았다. 그 당시 나는 내 신변이 걱정되어 서울시에 문의해 SECOM을 설치했다. 밤이 되면 SECOM 리모컨을 늘 가까이에 두었다.  


우리 가족은 가난했다. '아빠가 수의사라며?' 그 말이 그렇게 허무하게 들릴 수가 없었다. 무언가를 누려서는 안 되었고, 느긋해서도 안되었고, 낭비는 더더욱 안되었다. 물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비장하게, 아끼며, 성실하게만 살았다.


아빠는 대동물을 전문으로 했다. 이 목장 저 목장으로 출장 다니며 소, 돼지를 치료해 주었다. 더위를 많이 타는 아빠는 더운 여름날 냄새나는 돼지똥을 밟고, 소꼬리에 맞아가며 일을 했다. 엄마는 말했다.


 남들 다 버는 돈,
모든 남편들이 하는 일인데 뭐가 힘드냐?

소꼬리에 맞아 살이 파이고, 개한테 물려 이빨자국이 난 상처를 삼남매에게 보여주면서 '아빠가 이렇게 힘들게 일한다.'라며 으름장을 놨다.


삼 남매는 눈만 꿈뻑꿈뻑했다. 늘 우리에게 화만 내는 아빠에게 '힘드셨군요!' 할 수 없었다. 정서적 지지를 받아본 적이 없으니 줄 수도 없었던 걸까?


늘 화가 나 있던 아빠. <심리학이 분노에 답하다> 책을 보며 원인 감정을 더듬어 본다. 어렸을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나는 아빠가 밉지는 않다. 나도 여유를 누리지 못했지만 아빠는 더욱 누리지 못하셨기 때문이다. 열심히 반듯하게 사는 모습을 보며 배운 점도 많다고 생각한다.


다만, 아빠가 분노를 하면 나는 지금도 어렸을 적 기억이 떠오르며 눈물이 흐른다. 내 마음을 다독여주고자, 아빠를 조금이라도 이해해 보고자 분노라는 커튼을 열어젖혀 본다.







아빠의 분노에는 자기 요구, 두려움, 희생이라는 원인 감정이 숨겨져 있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자기 요구 

나는 돈을 벌어야 한다. 부인과 자식 세명을 먹여 살려야 한다.


두려움

내가 가족을 다그치지 않으면, 느긋한 여유를 부리면 결국 가난해질 것이다.


희생 

내 형제들과 부모도 나만 바라보고 있다. 힘을 내서 아침부터 밤까지 열심히 일하자.




아빠는 두려웠다. 처자식을 건사하지 못할까 봐. 어렸을 적처럼 가난해질까 봐. 아빠는 종종 철밥통이라며 공무원을 비난하곤 했다. 사실 그 비난에는 정년이 보장되고 정해진 날 월급을 받아 생활하는 안락한 삶에 대한 부러움이 섞여있었던 것 같다. 사업체 운영은 월급생활자와는 완전히 다른 필드이므로.


아빠는 두려워서 통제광이 되었다. 삼 남매가 아빠의 통제 안에서 벗어날 것 같을 때마다 아빠는 분노했다. 삼남매는 아빠의 계획대로 움직여야 했다. 아침 기상 시간에서부터 대학 진학, 취직 준비까지. 우리는 시키는대로 하는 동물이 아닌데. 가족회의는 꿈도 못 꿨다.


책임감으로 어깨가 무겁고 미래가 두려웠을 아빠. 천진한 우리 삼 남매가 여유롭고 느긋하게 즐기는 모습을 편안하게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때론 자신의 두려움을 누르느라, 때론 분노를 표출하느라 에너지를 소진했다. 다정하게 대해 줄 정서적 자원이 없었을 것이다.


아빠는 자발적 희생의 적정치를 넘어서는 인위적 희생을 했다. '-해야 한다'는 식의 이성적 헌신이었다. 그 인위적 희생의 결과는 우리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심리학이 분노에 답하다>에서는 '인위적 희생'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적정치 안에서의 헌신은 자발적이고 유쾌하다. 하지만 적정치를 넘어서면 사람은 인위적으로 행동하는데, 계속되다 보면 자기 강요가 시작된다.
이 경우의 헌신을 '인위적 헌신'이라고 한다. 인위적 헌신은 하고 싶지 않지만 미래, 관계, 이익을 고려하거나 책임감 또는 도덕감 등 의 이유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이성적인 헌신이다.


아빠의 분노는 드러난 현상에 불과하다. 그 이면에는 자기 요구, 두려움, 희생이라는 원인 감정이 자리 잡고있다. 유쾌한 자발적 헌신을 넘어선 인위적 희생의 결과는 가혹했다.


아빠는 인위적 희생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평생을 화가 난 채로 살았다.


물론 상황이 힘들었어도 우리 가족에게 보다 다정하고자 노력할 수 있었다. 화는 돈 달라는 친척들에게 내고 우리에게는 ‘함께 열심히 하자. 우리 모두 고생이 많다.’고 말하며 정서적 지원을 해줄 수 있었다.


나는 아빠를 떠올리면 마음이 숙연해진다. 감사하기도하고 씁쓸하기도 하다. 애증같은 모순된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나를 낳아주고 키워준 부모에 대해 모순된 감정을 느끼는 것은 그 자체로 상당히 불편하다. 어쩔 수 없다. 소화시키는 것은 내 몫이다. 아빠가 숙제를 주었다.


훗날 내 딸은 나를 떠올렸을 때 담백하고 산뜻한 웃음을 지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To 아빠,

참 열심히 사셨어요. 남편, 아빠라는 사회적 역할에 최선을 다해주셔서 제가 큰 어려움 없이 대체적으로 잘 자랐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빠가 제게 주신 사랑은 감사히 간직하고, 제게 주신 숙제는 제가 저의 스승이, 부모가 되어가며 하나씩 잘 풀어갈게요.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편안한지가 옳은 행동을 했는지 보다 중요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