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적 의사소통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는 거 아니야?
아 맞아, 넌 감수성이 풍부하지.
요가를 많이 하니까 모든 감각이 다 켜지나 봐.
참 너답다.
애쓰지 않아도 내 눈엔 보이는 것, 온몸의 촉수가 절로 포착한 디테일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언제나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 사람이 몇 있었다. 이후로는 그 앞에선 입을 꾹 닫는다. 너는 내 이야기를 들어줄 귀가 없잖아.사실 멀리 갈 것도 없다. 성장과정에서 우리 부모님은 늘 나에게 '넌 꼭 그렇게 엉뚱하더라.'라며 제갈을 물렸다. '나 이상한가?'를 스스로 검열하는 아이가 되었다.
나는 생각과 느낌을 수용받아본 경험이 적다. 스무 살 전까지. 옳고 그름 느리고 빠름 비정상과 정상을 따지는 부모 아래서 자랐다. 다행히 성인이 된 후 내 이야기에 온몸으로 귀 기울여주는 두 명의 남자친구와 연애를 시작하면서 시원하게 그 굴레를 벗어날 수 있었다. 실타래가 심하게 얽혀있을 땐 실마리를 찾아 풀어내기보단 가위로 뭉친 곳을 개운하게 자르는 것도 해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에게 연애는 놀이보다는 심리적 구원에 가까웠다. 물론 좋은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지애야, 너랑 있으면 마음이 편해
지애야, 너는 나를 비추는 햇살이야
지애야, 네가 보는 세상이 궁금해
지애야, 1900년대에도 너 같은 사람은 없었을 것 같고2100년이 되어도 너 같은 사람은 없을 것 같아
내 생각과 느낌을 어떻게 하면 상대방이 잘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지난한 시간이었다. 스피치 수업에서 발성 훈련도 해보고, 뉴스 원고로 발음 교정도 해보았다. 두괄식으로 말하는 연습을 했고, 접속사를 최대한 쓰지 않고 단문을 사용하려고 의식적으로 말해본 적도 있다. 말소리를 느리게 해보기도 했다가 톤을 높이기도 낮추기도 했다. 이 같은 노력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물론, 대학원 논문 발표와 EBS강의를 할 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어떻게 말하면
내 생각과 느낌을 수용받을 수 있을까?
이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참 지나서야 했다. 그저 들을 귀가 있는 상대는 내 말을 들어준다. 들을 귀가 없는 상대는 '씁!' 하며 내 말을 자르기도하고, '다 지나간 일이잖아.' 하며 묵힌 감정을 풀어낼 기회를 거절한다. '응'이라고 말하지만 스마트폰을 보고 있다. 내 말은 빨라지고, 마음은 조급해지다 결국 슬퍼진다.
언제나 온몸으로 나의 말을 경청해 준 두 사람 덕분에 나는 수용적 의사소통의 목마름과 갈증에서 꽤 많이 벗어났다. 이젠, 상대가 내 말을 자르면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는다. 상대가 반대의견을 제시하면 그 자체가 경청의 반증이라 여길 수 있는 여유까지 생겨 제법 편안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부모만 나를 키우는 것이 아니다.
나에겐 수많은 부모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