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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애 Apr 23. 2024

의례적인 상하관계

과제 분리


설날을 가족끼리 보냈다. 최근에 양가 부모님을 뵈었기 때문이다. 민족대이동의 날답게 설연휴 서울은 한량했다. 평소엔 엄두도 못 내던 곳의 주차장은 여유롭였고, 시내 도로는 물줄기처럼 시원하게 뚫렸다.


설 연휴가 끝난 후 문제가 불거졌다. 매일 같이 걸려오던 시부모님 영상통화가 끊겼다. 우리 부모님은 이전처럼 매일 아침 영상통화를 걸어 춘이의 귀여움을 보고 우리 가족의 안부를 물었지만 시부모님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예상대로 설 연휴에 시댁에 오지 않은 것에 대한 섭섭함을 느끼고 계셨다.


섭섭한 마음을 십분 이해하면서도 머릿속엔 물음표가 찍혔다. 처가댁과 시댁. 설 명절에 우리는 두 곳에 모두가지 않았다. 두 집안의 극명한 반응 차이를 보자 당황스러웠다. 이렇게 다르구나 실감했다. 시부모님도 자녀가 셋이고 우리 부모님도 자녀가 셋이다. 드나드는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모두 교통체증을 심하게 겪어야 도착할 수 있는 먼 곳에서 살고 계신다.


죄송하다는 전화를 드릴까 하다가 마음을 접었다. 나는 과연 무엇에 대해 죄송하다고 말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가 기대를 꺾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애초에 기대가 높았다고도 볼 수도 있다. 기대의 수준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일방에서 설정한 기대였으므로. 풀어드려야 할 서운함이 있고 스스로 소화시켜야 할 서운함이 있다고 생각했다.


처가댁과 시댁.


두 집안의 극명한 반응 차이는 생각할수록 신기했다. 뿐만 아니라 남편은 설날에 처가댁에 가지 않고도 마음의 거리낌을 조금도 느끼지 않았다. 반면 나는 시댁에 가지 않은 것을 글로 쓸 만큼 신경을 쓰고 있다. 딸을 낳고 난 후, 나는 이런 사안에 특히 신경이 곤두선다. 으레 사회문화적으로 처가댁 보다 시댁을 중요하게 여기는 분위기라는 것을 나도 안다. 보고 컸기 때문에 잘 안다. 최근에 뵈었던 것과는 별개로 시부모님이 속상해하실 것도 예상했다.


그러나 나도 부모가 되었다. 부모 대 부모로, 가정 대 가정으로 바라보는 건 안될까?


나는 남편과 결혼했을 뿐 남편의 부모님 지붕 밑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다. 조금 거칠게 말하자면 법적으로 시부모님은 내 가족이 아니다. 민법에서는 가족의 범위를 배우자, 직계혈족 및 형제자매로 규정한다. 예외적으로 직계혈족의 배우자(예 : 재혼한 엄마의 남편), 배우자의 직계혈족(예 : 시부모, 장인장모), 배우자의 형제자매(예: 처형, 시아주버니)가 생계를 같이 하는 경우에만 가족으로 정한다. 우리 가족의 연휴 계획을 존중해 주시면 좋겠다.


<미움받을 용기>에서는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누군가로부터 미움받을 용기를 각오해야 한다고 말한다. 타인의 모든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애쓰는 삶은 자유롭고 행복할 수 없다. 상대방의 눈치를 살피며 원하는 것을 채워주려 노력하고 평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이 나의 인생을 온전하게 살 여지가 사라진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기대에 부응해야 할 의무가 없다.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상대를 실망시켰다. 그러나 미안해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 기대에 부응하지 않느냐고 나에게 당당하게 말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영어권에서 공기처럼 쓰이는 개인(individaul)에 해당하는 단어가 한중일 한자 문화권에는 오래도록 존재하지 않았다. 친족관계와 무관한 독립된 개인이라는개념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신과 전문의들이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이 '상대는 나는 독립된, 분리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세요.'이다. 존재도 분리하고 과제도 분리한다. 관계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부부도, 부모와 자식 사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상대가 독립된 존재라는 걸 인식해야 타인의 삶에 월권 행위를 하지 않을 수 있다.


앞으로 계속될 명절 연휴. 어떻게 보내는 것이 현명할지 남편, 시부모님, 우리 부모님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보고 싶다. 모두의 행복을 어느 정도 채워줄 수 있는 스위트 스폿(Sweet spot)을 찾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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