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골당에 유골을 보관하는 데에도 기한이 있다고 한다. 대개 30년이라고. 시간이 되면 유골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는데, 일부 사람들은 후손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그제야 공동 유골함을 찾는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고 30년이 흐른 뒤에야 유골에 부여했던 의미를 덜어내고 향하는 곳이 공동 유골함인 것이다.
그걸 엄마는 3일 만에 했다.
살아있는 할아버지를 본 날로부터 3일째 되는 날 공동유골함 앞에 선 것이다. 슬픔의 깊고 얕음 차원이 아니라 심리적 충격이었다. 재해였고 변고였다. 소화시킬 수 없는 뜨거운 쇳덩이를 삼킨 엄마는 49일을 꼬박 앓다 결국 엄마는 할아버지의 여동생들과 함께 동두천으로 갔다.
동두천은 할아버지가 평생 살아온 곳이다. 엄마는 할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지갑, 새벽 6시마다 일어나 기도를 한 후 적어 내려간 금강경 필사본, 눈빛이 살아있는 영정사진을 봉안당 한 자리에 넣었다. 500만 원을 주고. 동두천에서 어떤 일과를 보냈느냐는 나의 말에 엄마는 담백하게 말했다.
할아버지를 동두천 봉안당에 모셨지.
할아버지를 봉안당에 모셨다는 엄마의 말에는 머쓱함이 없었다. 진짜 할아버지 유골을 납골당에 모셨다는 듯 말했다. 할아버지의 본질, 영혼은 뼛가루에 있지 않다고 선언하는 말 같았다. 엄마는 그간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공동 유골함에 할아버지 유골을 버리듯 하고 왔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밤마다 데굴데굴 굴렀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50일째 되던 날, 엄마는 집에서 차로 7시간 거리에 있는 동두천으로 가 봉안당 한 자리를 마련했다. 공동유골함이 아니라, 오직 할아버지만을 기릴 수 있는 공간이다. 그곳엔 할아버지의 분골 대신 손때 묻은 지갑이 있다. 딸은 드디어 아빠를 떠나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