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선열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죄스러움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참전용사다. 어렸을 적부터 할아버지가 자랑스러웠다. 할아버지가 들려주시는 전쟁 이야기도 무척 재미있었다. 특히 할아버지의 무용담은 더 재미있었다. 한 가지 더 흥미로운 사실은 보통 무용담을 이야기하면 적군을 얼마나 무찔렀는지 얼마나 큰 공을 세웠는지 이야기를 할 텐데, 할아버지는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다. 포로가 된 이야기, 탈출한 이야기, 적군을 피해 숨은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철없을 때는 시시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 생각해 보니 할아버지는 겁이 많았던 게 아니라 정이 많았던 거다.
으레 그런 상황이 되면 생존을 위해서라도 폭력성향을 띄게 된다.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상황. 달리 선택지가 없다. 나 같았으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며 합리화시켰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는 적군을 무찌르는 것보다 도망치는 것을 택했다. 그 당시 동료들 눈에는 비겁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어찌 보면 가장 현명한 선택이다. 누구도 다치지 않는, 누구도 가족을 잃는 슬픔을 겪지 않는 가장 현명한 선택. 손자병법 삼십육계 중 으뜸은 줄행랑(주위상책)이다. 어쩌면 할아버지는 그 의미를 정확히 깨닫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생활은 순탄지 않았다. 마땅한 배움이 없었고 기술도 없었다. 더구나 전쟁 후유증 때문인지 한 직장에 오랫동안 있지 못하셨다. 미군과 어울리며 배운 영어로 통역을 하는 일도 하셨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가족들은 늘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다.
어찌 보면 아버지가 할아버지에게 가지는 부정적 감정 역시 당연할지도 모른다. 할아버지는 전쟁 후에도 가족보다 나라를 위해 사는 사람이었다. 그 결과는 지독한 가난의 대물림. 더 슬픈 건 그럴수록 할아버지에 대한 불신과 반감이 깊어졌다. 한 대를 거스른 나는 할아버지를 전쟁영웅으로 생각하지만 아버지는 그렇지 못했다. 평생을 원망하며 사셨다. 그 시대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는 하나 서로 간에 골이 깊어졌고 결국 풀지 못했다. 그리고 작년 4월, 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다.
할아버지를 영천 호국원으로 모셨다. 장례가 끝나고 할아버지께 편지를 썼다. 아이들에게도 할아버지와 나라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는 좋은 교육이 될 것 같았기에 자주 올 거라 약속했다. 1년 지났다. 그 사이 허리가 불편한 아버지는 3번 다녀가셨고, 나는 한 번도 가지 않았다. 호국선열을 위한 묵념의 시간이 나에게는 고해의 시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