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과 걱정 비우기
작년은 코로나 19 때문에 모든 마라톤 대회가 취소되었다. 덕분에 동호회에서 예산이 남았다며 랜선 마라톤 대회를 열었고 운 좋게 상금 5만 원을 받았다. 아내에게 필요한 것을 사줄 계획이었는데, 상금은 반드시 운동용품을 구입해야 한다는 조건이 걸렸다. 임신 7개월 차에 접어들어 배가 남산만 해진 아내는 지금 입을 수 있는 게 없으니 내게 필요한 것을 사라고 했다. 서로 필요한 것을 사라고 티키타카를 하다가 결국 나에게 필요한 러닝 셔츠를 구매했다.
이틀 뒤 배송이 완료되었다는 문자를 받았다. 나는 으레 아내가 잘 받아 놓았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하루가 더 지나도 아내는 아무 말이 없었다. 참지 못하고 아내에게 택배 잘 받았냐고 물었다. 그런데 본인은 받은 게 없다고 한다. 요즘 택배 증가에 따라 분실물도 늘었다는데 하루 사이에 누가 가져간 건 아닌지 의심되기 시작했다. 집 앞에도 경비실에도 택배물은 없었고 결국 배송기사분께 전화를 드렸다. 확인하는 과정에서 주소지가 다른 것을 알아차렸다. 배송 내역을 확인해 보니 아뿔싸! 배송지를 전에 살던 곳으로 하고 만 것이었다.
다행히 누가 가져간 것이라는 의심을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인상 험한 아저씨가 주인 없는 물건이라 생각하고 이미 접수해버렸으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이 되었다. 과장님께서 내 이야기를 듣더니 어차피 장 보러 가야 하니 함께 가주겠다고 했다. 혹시나 모를 비상사태(?)에 천군만마를 얻은 것마냥 안심되었다. 그러나 전 주소지에 도착했을 때에도 택배는 없었다. 벨을 누르니 개 짖는 소리만 요란하게 들렸다. 네가 실수하고선 왜 우리 주인을 탓하냐며 나를 꾸짖는 것 같았다.
잠시 고민을 하다가 명함에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글을 적었다. 최대한 공손하게 썼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빨간색 펜밖에 없었다. 마치 혈서 같은 내 글에 읽으시는 분이 투쟁적인 내 모습을 상상하거나 두려움을 느끼면 어떡하나 걱정되었다. 입장 바꿔 생각해도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그냥 명함만 놓고 돌아올 걸...... 후회되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과장님과 장을 보고 숙소로 돌아가는데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택배를 찾았냐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더니 둘째가 끼어들었다.
"아빠, 왜 택배가 없어?"
"아빠가 주소를 잘못 적었어."
"왜 잘못 적었어."
"아빠가 부주의해서 그랬어."
"택배 어디 있어?"
"모르겠어. 아마도 잃어버렸나 봐."
"잃어버리는 어떡해?"
"아빠가 부주의해서 잃어버렸으니 어쩔 수 없지. 아빠 탓인 걸."
아이와 이야기하다 보니 내 부주의에서 시작된 일임을 명확하게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타인을 의심하고 언짢게하고 번거롭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 역시 불필요한 걱정으로 시간과 감정을 소모하고 있었다. 내일 다시 찾아가 보자는 과장님께 그냥 잊어야겠다고 말씀드렸다. 어차피 꽁으로 생긴 돈으로 샀기 때문에 실질적인 금전적 손실이 없었고, 옷은 정말 필요한 사람에게 기부했다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한 결 가벼워졌다.
숙소로 돌아와 장 본 재료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 내 신분을 확인하시고는 택배를 집 앞에 둘 테니 가져가라고 했다. 아! 역시 마음을 비우니 일이 풀리는구나! 불과 몇 분 전에 그냥 잊어야겠다는 생각도 잊은 채 쏜살같이 달려가 택배를 찾아왔다. 옷이 정말 필요한 사람은 나였어!라는 생각과 함께.
택배를 온전히 돌려주신 이름 모를 그분께 감사 문자와 함게 케이크 쿠폰을 보내드렸다. 약소하지만 따뜻한 배려에 대한 보상이라 생각하고(그리고 내 혈서에 대한 미안함을 사죄하는 의미로) 즐겨주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