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질없는 질문
육십을 살짝 넘긴 어느 귀부인이 해준 이야기이다. 얼마 전 장롱을 정리하다가 몇 년 전에 잘 갈무리해 넣어둔 코트 주머니 속에서, 잃어버린 줄 알았던 다이아몬드 반지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큰 마음을 먹고 장만한 다이아몬드 반지를 잃어버렸을 당시의 당황스러움과,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뜻밖의 상황에서 반지를 되찾은 놀라움에 대한 젊잖은 수다를 듣다가 문득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김승희 시인의 ‘우표 한 장의 사랑’
‘가을이면 문득 작년에 넣어둔 / 옷장 속의 긴 코트를 꺼내 입고 / 바람처럼 괜히 / 길 모퉁이로 나서지, / 하얀 장미꽃 그림자같이 / 초췌한 陽光 속을 걸어가다 보면 / 호주머니 속에 작게 접힌 작년의 종이쪽지가 손에 잡히지, / 나프탈린 냄새로 절여진 / 불쌍한 내 사랑 / 하얀 방부제 속에 파묻혀 / 일 년이나 일 년 동안이나 / 창백하게 봉인된 금지된 내 사랑’
해를 넘겨 다시 꺼내 입은 코트 주머니에서 발견한 다이아몬드 반지와 한 장의 종이쪽지, 어느 것이 더 반가울까? 혹은 어느 것이 더 많은 생각의 파문을 일으킬까?
복음서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 건너편 그러니까 호수의 동쪽 연안으로 가셨는데 그곳에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과 마주 한다. 강한 쇠사슬로도 묶어 둘 수 없을 정도로 미쳐 날뛰는 그는 무덤에서 살면서 밤낮으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곤 해서 그 소리가 멀리 마을과 농장까지 들리는 공포스러운 상황이었다. 예수님은 가련한 그를 치유하여 고통에서 자유롭게 해 주셨다. 그런데 그 소식을 전해 들은 고을과 인근 촌락 사람들은 예수님께 떠나 주시길 청했고 예수님은 배에 올라 갈릴리 호수 서쪽 연안으로 되돌아가셨다고 한다.
인간과 세상을 초월하는 힘의 존재를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고대인에게 신의 존재는 하나의 주어진 사실이었으며, 자신의 기준으로 이해할 수 없는 모든 것을 쉽게 기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고대인들은 그런 기적에 대해 ‘어떤 놀랍고도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왜 일어났는가’ 보다는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에 더욱 집중하였다. 그런데 그토록 놀라운 기적을 목격한 갈릴리 호수 동쪽의 고대인들이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을까?
마르코 복음서에 나오는 ‘마귀들과 돼지 떼’라는 이 기사에서 예수님이 방문했던 지역은 갈릴리 호수와 요르단강 동쪽 데카폴리스 가운데 하나인 게라사라는 곳으로 이방인들의 고장이었다. 그리스 도시 연합체인 데카폴리스는 그리스어로 ‘10’을 의미하는 ‘데카’와 ‘도시’를 의미하는 ‘폴리스’, 즉 그리스 문화권의 ‘열 개의 도시 연맹’으로 당시 헬레니즘 문화와 무역의 중심지였으며 로마 시대에는 셈족에게 로마 문화를 퍼뜨리는 거점이었다. 아마 당시 갈릴리 호수와 요르단강 서쪽의 유대 지역보다 경제적으로 번성하였을 것이다.
복음에서 예수님이 악령에게 그 사람에게서 나갈 것을 명령하자 악령은 그에게서 나와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돼지 떼는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당시 유대인들은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여겨 꺼렸지만 이방인들에게 돼지는 신에게 바치는 제물이었고 식량이었으며 재산이었다. 이 기사에는 ‘산기슭에는 놓아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고 그래서 악령으로 인해 호수에 빠져 죽은 돼지가 이천 마리쯤이라고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경제적으로 번성한 데카폴리스의 주요 도시 게라사의 이 사람들은 실은 대규모 양돈사업자들이었으며 예수님의 기적으로 인해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입은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들은 아마 기적의 신앙적 혹은 사회적 의미보다 그 기적으로 인한 기존의 경제적 질서의 혼란이 두려웠던 것은 아닐까.
한편 마르코 복음사가는 ‘마귀들과 돼지 떼’ 기사에 이어서 ‘하혈하는 부인의 치유’라는 기사를 소개하고 있다. 갈릴리 호수 서쪽 유대 땅으로 돌아온 예수님이 많은 군중에 둘러싸여 길을 가는데,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로 고생하는 여인이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라는 생각으로 예수님 뒤로 가서 옷에 손을 댄다. 그러자 여인은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한다. 당시 병의 치유는 죄와 벌 그리고 용서와 구원에 관한 의미를 지닌 것이다. 복음서는 갈릴리 호수 동쪽과 서쪽에서 있었던 일을 통해 재물이라는 경제적 가치와 구원이라는 존재론적 의미를 대비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다시 ‘우표 한 장의 사랑’
시인은 작년에 옷장 속에 넣어두었다가 꺼내 입은 긴 코트 호주머니 속에서 손에 잡힌 종이쪽지를 만지작거리며, ‘가을 햇빛 아래 / 이 종이쪽지를 건네준 사람이 / 누구였던가 난 잊어버렸지만 / 이 종이쪽지를 쓴 사람의 손길이 / 얼마나 덧없이 향기로왔던지를’ 기억할 수 없었고 가을 햇빛 아래 차마 그 종이쪽지를 꺼내 그리운 전화번호를 읽어볼 수도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시인은 이렇게 시를 이어 간다.
‘국립박물관 4층 불교회화실 / 진열장 속에 보관돼 있던 / 은으로 쓴 화엄경을 난 기억할 수 있네, / 어두운 청색 감지 위에 / 은으로 쓴 화엄경, / 너무도 풍부한 슬픔 위에 / 화려하게 자수된 / 불멸의 은빛 극락조, / 그렇게 영원한 것은 / 어둠 속에 차디차게 빛나며 / 작년의 긴 코트 호주머니 속에 / 반짝반짝 금석문처럼 남아’
S.J. 칼 라너 교수는 ‘복음을 듣는 사람’은 과연 어떤 인간이기를 기대하는가 라는 질문을 하면서 이는 윤리적 질문이 아니라 인간의 실존과 존재론적 질문이며 인간이 인격이고 주체라는 사실이 복음의 전제라고 말한다. 시인이 말하길, 우표 한 장이 붙어 있는 그 종이쪽지는 ‘어두운 청색 감지 위에 은으로 쓴 화엄경처럼 불멸의 은빛 극락조였으며 차디 찬 어둠 속에서도 반짝반짝 빛나는 금석문’이라고 한다. 지적 양심을 지닌 한 인간의 존재 전체 그리고 신으로부터 인간이 직접 받아 불멸이며 부활하는 시인의 영혼에 배달된 메모였을지도 모른다. 시인은 ‘힘껏 껴안을 수도 없고 뜨겁게 부딪칠 수도 없는’ 사랑이 가을이면 점점 더 우표 한 장의 그리움을 닮아 정처 없이 바람의 가출을 일삼는다고 노래한다.
다시 처음의 부질없는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해를 넘겨 다시 꺼내 입은 코트 주머니에서 발견한 다이아몬드 반지와 한 장의 종이쪽지, 어느 것이 더 많은 생각의 파문을 일으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