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봐도 성실하고 열심히, 그리고 굴곡은 있었겠지만 그래도 비교적 순탄하게 살아오신 고령의 노부부다. 오후 3시 지하철 노약자석에 앉아계신 두 분의 옷차림을 봐도 그렇고 드문드문 나누시는 대화 내용을 들어봐도 그렇다.
사실 두 분의 대화를 일부러 들으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보청기를 사용하는 남편을 위해 할머니가 큰 소리로 반복해서 말씀하시니 본의 아니게 듣게 되었다. 어느 집 자식이 그래도 잘 살고 있고, 혈압약은 잘 챙겼는지 뭐 그런 내용들이다.
그런데 듣기가 불편하신 할아버지가 혈압약 가격을 말씀하실 때 문득 ‘저분은 은퇴 전에 어느 조직에서 숫자를 다루는 핵심적인 참모 역할을 오랫동안 하셨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그는 ‘만 팔천구백삼십 원’이라는 본인부담금액을 정확하고 빠르게 발음했고, 정확한 숫자 전달을 위한 끊어읽기에도 매우 능숙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는 청각에 문제가 있지만 특이하게도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가고 있어, 할머니는 그 금액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단번에 그가 말한 숫자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게다가 그는 비록 지팡이를 짚고 있었지만 내리실 역이 다가오자 하차문을 향해 신속하게 이동했다.
그는 조심스럽고 조용하지만 정확하고 은밀한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또한 사전 동작 없이 민첩하고 눈에 띄지 않게 움직일 수 있는 사내임에 틀림없다. 단언컨대 그는 지금은 은퇴했지만 지난날 매서운 능력을 발휘했던 고수였으리라.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내릴 역이 임박해 할아버지가 하차문으로 향하자 할머니는 바로 강한 멘트를 날리셨다.
“차가 멈추면 일어나라니깐!”
아! 공무도하! 공경도하!
차창 밖을 내다보니 계속 혼나고 계셨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