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의 광기와 오른손의 슬픔’
슈테판 츠바이크의 글을 읽으면 한결같이 이런 느낌이 든다. 가을밤 가끔씩 들르는 가벼운 공부모임에서 예의 바르고 진지하며 또한 선해 보이는 낯선 인물이 어떤 새로운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하다가 다양한 자료들이 제시되고 매우 지적이며 통찰력 있는 그의 의견과 주장을 들으면서 그 주제의 의미에 깊이 몰입하게 된다. 그러다가 문득 저 사람은 대체 누구이기에 이렇게 중요하고 지적인 문제에 대해 저토록 호소력 있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하고 그를 쳐다보면, 그는 그 주제 이외에 다른 어떤 것에도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엄격한 옷차림과 진지한 목소리로 그 주제에 대한 경탄과 울분 그리고 격정적인 반대와 숭고한 지지를 ‘용감하게 진술’하는데 깊이 몰입하고 있었다.
19세기 말 오스트리아 빈에서 유태계 방직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슈테판 츠바이크는 1차 세계대전을 겪고 다시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나치의 탄압을 피해 영국과 미국, 브라질 등지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도중 극심한 우울증으로 부인과 함께 자살했다. 그는 쇠락해가는 자신의 시대와 유럽 문명에 대한 안타까움, 인간의 자유로운 정신을 가로막는 일체의 전제적 억압에 대한 반대, 인류의 도덕적 자주성에 대한 지지를 호소한 위대한 유럽인이었다고 한다.
<체스 이야기>는 뛰어난 소설가이자 전기작가인 독일 문학계의 거장 슈테판 츠바이크의 단편소설이다. 다각적인 조사를 통해 확보한 흥미로운 자료들과 그 자료들을 읽어내는 작가의 지적인 통찰력과 탁월한 구성 그리고 뛰어난 문장력과 숨가쁜 언어의 리듬감이라는, 그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에 더하여 <체스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고 중요한 주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체스 이야기>의 내용은 간단하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초인 폴란드 침공 전 히틀러가 보헤미아를 점령한 1939년 뉴욕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는 대형 여객선에서 있었던 일이다. 나는 그곳에서 두 사람을 알게 된다. 한 사람은 지성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고 심지어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의 문법과 단어마저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체스 챔피언 첸토비치, 그는 기계와도 같은 체스 기술자이며 지루하게 상대방을 압박하여 승부를 가르는 냉혈한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B박사이다. 몇 가지 에피소드를 거쳐 B박사는 체스 챔피언 첸토비치와 선상에서 세 차례의 체스 공개 시합을 벌였는데, 이미 첸코비치 쪽으로 기울어진 중간에 B박사가 우연히 훈수를 하며 개입한 첫 시합은 무승부, B박사가 직접 시합을 벌린 두 번째는 B박사 승리,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나의 조언으로 B박사가 시합 도중 포기하면서 첸코비치의 승리로 끝나고 이야기도 끝난다.
그런데 이 이야기 안에는 또 다른 이야기가 들어 있다. 첫 시합 후 나는 B박사로부터 그의 과거 이야기를 들었다. 액자 속에 들어 있는 세 가지 이야기이다.
빈에 살던 B박사는 2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직전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테이블, 문, 침대, 세면대, 안락의자, 창문 그리고 벽’만으로 이루어진 호텔방, 외부의 공간과 시간과는 철저하게 차단된 無의 세계에서 사 개월 동안 고립되어 신문을 받았다. 첫 신문 이후 호텔방에 돌아오면 예측할 수 없는 게슈타포의 신문에 대응하기 위해 조사자의 질문과 자신의 대답을 반복해서 생각했고 신문이 계속되면서 이전의 신문 내용과 연결하여 다시 생각을 무한 반복했다. 이런 반복으로부터 정신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없는 소름 끼치는 무의 압박, 즉 신문 후 호텔방으로 돌아와 질문과 대답에 대한 생각과 망상의 병적인 반복에 빠진 정신적 괴로움이 최악이었다고 그는 회상했다. 그리고 바로 그것, 육체의 고통보다 정신에 가해지는 고통으로 뇌를 무력화하는 것이 게슈타포가 노리는 점이었다. 감금된 사람들은 정신이 녹아내리면서 스스로 진술하겠다고 조사자에게 매달리게 된다는 것이다.
B박사는 우연히 조사자의 외투에서 책을 한 권 훔친다. 그가 위험을 무릎 쓰고 훔친 책은 백오십 편의 챔피언 시합을 모아둔 체스 교습서였다. 그는 한편씩 외우기 시작한다. 매일 블라인드 체스를 두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의 정신은 활력을 되찾는다. 체스 대가들의 기술과 전략을 익히면서 체스의 예술적 이해와 재미를 알아가기 시작한다. 고립되었던 무의 세계는 활기찬 호텔방으로 변모했고 그는 조사자들에게도 여유롭고 당당하게 대하기 시작한다.
다시 위기가 찾아온다. 더 이상 외워서 복기할 시합이 없어진 것이다. 그는 가상의 시합을 하기 시작한다. 그가 만든 상상의 공간에 투사된 예순네 칸의 체스판 위에서 검은 말과 흰 말은 쉬지 않고 맹렬하게 싸우면서, 이기려는 공명심과 불안감으로 병적인 흥분 상태에 빠진다. 날카롭게 신경이 곤두선 검은 말과 흰 말은 한 판이 끝나면 바로 복수전을 벌리는 지칠 줄 모르는 광기 속에서, 수개월 동안 호텔방에 감금되어 있던 그의 정신 속에서 수천 번의 체스 시합을 벌인다. 그의 정신이 분열된 것이다. 분열된 그의 정신은 야만성을 드러내고 난동을 부리며 손에 상처를 입힌다. 정신을 잃고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된 그는 오스트리아를 떠나는 조건으로 석방된다.
그런 B박사가 선상에서 체스 챔피언 첸코비치와 우연히 체스를 두게 되고 B박사의 약점을 간파한 첸코비치는 세 번째 시합을 끔찍하게 지루한 속도로 질질 끌었다. 그러자 B박사의 정신은 다시 분열되고 끝내 광기를 드러낸다. 나는 즉시 개입해서 그의 손에 난 상처를 가리키며 기억하라고 말했다. 그러자 B박사는 갑자기 잠에서 깨어난 듯한 표정으로 첸코비치와 우리에게 사과하며 양해를 구하고, 겸손하고 알 수 없는 태도로 자리를 떠났다.
‘<왼손의 광기>에서 <오른손의 슬픔>으로’
김승희 시인이 시집 ‘미완성을 위한 연가’의 서두에 쓴 문장이다. 그러면서 ‘광기의 마녀적 탕진, 생명의 초현실적 남용, 그리고 극단적인 자기 파괴의 끝에 새로운 생성으로서의 오른손의 슬픔이 오는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시인에게 광기와 슬픔은 삶의 미완성에 저항하며 추억과 지적 사고를 취사적으로 통합해나가는 구원의 과정이며 창작행위일 것이다. 그것은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에서 일어나는 탕진과 남용, 파괴의 광기이며 이를 통해 끝내 이루어내는 생성 후의 위로와도 같은 슬픔일 것이다. 그래서 희망의 유혹이며 열정인 것이다.
하지만 슈테판 츠바이크의 광기와 슬픔은 다르다. 그는 1차 세계대전 후 통합된 유럽을 꿈꾸었다고 한다. 하지만 히틀러의 등장과 함께 오스트리아 제국이 사라지는 사건을 목격한 그는 1934년 영국으로 망명했고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다음 해인 1940년 브라질로 이주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인간에 대한 깊은 절망으로 1942년 2월 23일 아내와 함께 자살한다.
오스트리아에서 추방되어 뉴욕을 거쳐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여행 중인 B박사는 작가인 슈테판 츠바이크가 투사된 인물이며 또한 당시 유럽 문명을 상징한다. 직접적으로는 첸코비치로 대변되는 히틀러의 전격전과 전제주의적 압제 앞에서 무기력했던 당시의 시대상황에 대한 절망이며, 보다 근원적으로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종말을 고했던 서구 문명의 쇠퇴에 대한 절망이다.
전신, 철도, 증기기관 등 19세기 말 발달된 과학기술의 현실 배치는 인류를 미래로 힘껏 밀고 나갔지만 다른 한편으로 당시 서구사회는 너무 빠른 속도로 인한 통제불능 속에서 전쟁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것도 인간의 퇴보로 받아들여졌던 신경증과 문화적 우울증을 유발하면서, 가속화된 시간과 공간 팽창 속에서 역사상 가장 효율적인 병력동원 시간표에 따라 전 세계는 전쟁으로 돌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속도는 세련되지 못한 것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 불필요한 것’으로 여겼다. ‘사소한 안전장치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충분히 갖추어져 있고 곳곳에 울타리가 안전하게 처져 있어’ 예기치 못한 사태란 결코 일어나지 않고 ‘조용히 이동하는 세계, 한마디로 서두르는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세계’ 속에서 인간은 천천히 걷고 ‘시적인 악센트까지 충분히 살려’ 말하는 ‘안정의 황금시대’가, 갑자기 가속화된 시간과 공간 팽창 때문에 무기력하게 병들어 쓰러지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절망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보여주는 광기와 슬픔은 쓸쓸한 고뇌의 흔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의 고뇌를, 전격적으로 돌진하는 현실 앞에서 뒤돌아 부르는 장엄하고 우아한 과거에 대한 감상적인 애가로만 흘려듣고 지나가기에는 그의 광기와 슬픔이 너무 깊고 절절하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하고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글을 읽으면 항상 이런 느낌이 든다. 낯선 천재가 갑자기 다가와서 나의 일상과는 무관하다고 생각되는 낯선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데, 조금 듣다 보면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숨 막힐 듯한 그의 진술을 통해 그 이야기의 상당성과 중대성을 인정하고 몰입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