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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잡념

여름은 주춤거리고

by 엡실론

시간은 의심의 여지없이 연속적으로 흐른다. 내가 글을 쓰는 순간에도, 당신이 글을 읽는 그 순간에도 시간은 가고 있다. 다만 우리의 인식은 시간의 속도를 뒤쫓기엔 약간 느린 모양이다. 항상 지나고 난 다음에야 체감하게 되는 것들이 있다.

계절의 변화는 매일 조금씩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느 순간 이런 얘기를 하게 된다. 날이 갑자기 쌀쌀해졌네. 사실 계절이 어느 하루 갑자기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늘 그렇다고 느낀다. 봄도 갑자기, 가을도 갑자기 오는 것만 같다.

좋음과 싫음도 그렇다. 처음부터 좋고 싫고가 확연한 것도 있지만 많은 것들이 어느새 좋아져 있다거나 싫어져 있다. 수동태로 쓴 이유는 감정의 주체인 나조차 감정의 변화를 감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어느새 좋아져 있고, 또 어느 순간 싫어져 있다.

수학을 싫어하는 사람이 많지만, 정확히 어느 순간 어떤 이유로 싫어졌는지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덧셈을 배울 때부터 수학이 싫었던 사람은 많지 않을 듯하다. 기억나진 않아도 분명 어느 단계에서 막혔을 거고 싫어졌을 것이다. 선생이 어렵게 가르쳐서 싫어졌거나, 수준에 안 맞는 문제를 풀면서 쓸데없이 좌절했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생각해보면, 생각보다 얄팍한 이유일 거라고 예상한다.

어떤 사건을 계기로 인생이 바뀌었다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그것 때문에 인생이 바뀐 걸까. 그저 알게 모르게 누적되던 것들이 특정한 사건을 계기로 드러난 게 아닐까. 시간은 연속적이지만 인간은 특정 지점들을 불연속적으로 인식하기에 그렇게 느낄 뿐이다. 사실 삶의 모든 순간은 결정적인 순간이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이 오래된 격언처럼, 흘러가는 대로 살기 시작하면 생각이 행동에 후행한다. 왜 그렇게 살고 있는지 모르게 되는 순간이 온다. 자신의 궤적을 연속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만이 후회가 적은 삶을 살 것이다. 인지하지도 못한 채로 사라지는 선택지들이 적을 테니까.

여름은 주춤거리고, 가을은 머뭇거린다. 그렇게 더웠던 여름도 가 버린 듯하다. 어느새 나는 긴팔 옷을 언제쯤 꺼낼지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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