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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오도 May 18. 2021

중년, 원더우먼이 되다

우아함이 빛날 때

오랜만에 '힙지로'에서 저녁을 먹었다.


“나이 드니까 이런데 오는 것도 괜히 눈치 보이지 않니?”


을지로의 직장인이지만 청춘들의 핫플인 '힙지로'에 오면 주눅이 든다. 데이트 커플들이 '아줌마들' 때문에 분위기 깨졌다고 할까 봐 소곤소곤 말하고, 웃음소리는 호호호,  허리는 가능한 꼿꼿하게 세워본다. 중년이 되면 품위 유지에 많은 노오오력이 필요하다.


노오오력으로 일군 우아한 저녁 식사가 끝날 될 무렵, 와장창, 아아악, 비명 소리가 터졌다. 서빙하던 여자 아르바이트생이 뜨거운 국수 그릇을 테이블 위로 떨어뜨린 것이다. 기름기 많은 빨간 국물이 손님 무릎으로 줄줄 흐르고, 그릇이 산산조각 나면서 국수가락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의자 뒤에 걸어 둔 제이의  재킷과 가방까지 국물이 튀었다.


사고를   아르바이트생은  자리에 얼어붙은  울상짓고 있었다. 화상 입은 사람은 없는지 확인하는 것이 급한데 젊은 사장도 우왕좌왕하면서 테이블  국물만 훔쳐내고 있다.


오지랖퍼인 친구 제이가  벌떡 일어나 사고 테이블로 갔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커플이 다치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괜찮다고 하니 얼른 화장실 가서 옷과 몸을 닦고 오라고 시킨다. 놀라 서 있던 아르바이트생에게 물티슈를 가져오게 해서 여기저기 튄 국물을 닦기 시작했다.


제이의 행동을 보니 은근히 웃음이 나왔다. 젊은 사람들이 울상만 짓는 동안 갑자기 원더 아줌마가 나타나 기운차게 사건의 뒷수습을 해내는 것이다. 젊은 사장이 경이롭게 제이를 쳐다본다. 슈퍼맨, 홍반장, 독수리 오 형제도  할 수 없는 디테일이 살아있는 뒤처리!. ‘힙지로’에서 주눅 들었던 어깨가 봄꽃 열리 듯 활짝 펴지는 기분이 들었다.


제이가 테이블을 대충 치운 후에 여전히 우왕좌왕하는 아르바이트생의 등을 토닥였다. “얼마나 놀랬어요? 괜찮아요?”  하얗게 질려있던 얼굴이 친구의 한마디에 부드러워지는 게 느껴졌다. 최저 임금 받으며 아르바이트하는 것일 텐데 손님에게 뜨거운 국물을 쏟는 마음이 오죽할까? 얼마나 놀라고 걱정될까?


마침 얼만 전 B로부터 딸아이가 아르바이트 중에 와인을 쏟아 변상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던 터였다. 중년 여성인 손님이 실크 블라우스 보상비로 30만 원을 요구해서 사장과 반씩 부담했다고 한다. 옷값 변상을 요구하는 것을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돈을 받으며 했다는 말 때문에 우리는 분개했다.


 "학생, 내가 돈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닌 거 알죠? 다 학생 인생 경험에 도움이 되라고, 그래야 다음부터 더 주의를 할 거 아냐?"  뭐래 정말, 그냥 돈 받고 싶다, 이게 훨씬 낫지. 어디서 교훈질이람. 제이처럼 원더 아줌마의 기질을 발휘하지는 못할 망정 블라우스의 여인처럼 고상한 척, 우아한 척은 하지 말아야지 싶었다.     


서둘러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오는데, ‘피해 커플’도 가방과 짐을 챙겨 나온다. 카운터에 항의라도 하려나 싶었는데 신용카드를 내밀며 “계산해 주세요” 하는 것이 아닌가? 먹지 못했을 뿐 아니라 데이트도 망치고, 옷까지 다 버렸는데.. 계산까지? 우리는 문 앞에서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지켜보았다. 다행히 사장은 손사래를 치며 음식값을 받지 않았다.


“사장이 돈 받았으면 내가 나서서 뭐라고 하려고 했어” 제이의 말에 크게 웃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피해 커플이 계단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제이는 이모라도 되는 듯 다가가 “괜찮으세요? “ 다시금 다정하게 묻는다. 여자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아니 젊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침착해요? 큰 소리 한번 없이.... 정말 복 많이 받을 거예요.” 제이의 말에 젊은 커플은 큰 소리로 웃으며 “감사합니다” 하고 총총히 사라졌다.

 



기분 좋은 봄밤이었다. 바람은 시원하고 어디선가 라일락 향기가 진하게 날아왔다.


문득 중년이 봄밤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낮의 찬란함이 지나간 뒤에 편하고, 느긋함이 있는 시간. 아무 이유 없이 어슬렁거려도 괜찮은 시간.  중년의 시간에는 그런 봄밤 같은 여유가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선행을 베푼다거나, 교훈을 주려는 목적과는 다른, 안전한 다정함이 자연스럽게 발현될 때가 있다. 그럴 때, 실크 블라우스로 멋을 내지 않아도 찐 우아함이 반짝 빛나는 것 같다. 오늘 제이가 좀 그랬다. 중년의 쓸모를 제대로 드러냈다고 할까?  우리는  ‘원더우먼’ 이 된 듯 기분이 정말 좋았다.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웃으며, 아주 긴 봄밤의 산책을 했다  




ps. 제이, 그래도 "복 받을 거예요", 라는 말은 너무 웃겼어.










이 글은 MarkedBrunch를 이용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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