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집
오랜만에 남편과 광화문에서 만나 저녁을 먹었다. 식성이 다른 우리는 기분 좋게 만나서는 식당을 정하다가, 곧잘 싸우곤 하는데 어제는 김치찌개에 쉽게 의견 일치를 보았다. 가을 저녁, 김치찌개 먹기 좋은 계절이다. 마침 ‘광화문 집’이 생각났다.
테이블이 다섯 개 정도 되는 1층은 이미 손님들로 꽉 차있었다. 자리마다 김치찌개가 펄펄 끊고 있다. "이 집 찌개 맛은 싱싱한 덩어리 돼지고기를 넣고 팍팍 끓이는 거지" 남편이 아는 척을 한다. 다행히 2층 다락방에 한 자리가 남아 있었다. 몸집이 크지 않은 나도 겨우 올라갈 만큼 계단은 좁고 가팔랐다. 우리가 방바닥에 엉덩이를 채 붙이기도 전에 이모님이 김치찌개 2인분과 계란말이를 들고 올라오셨다.
이모님은 라이터도 준비하지 않은 채, 둥근 쇠로 된 화구와 연결된 가스 밸브를 열었다. 금세 피시식, 피시식, 가스 새는 소리가 맹렬한데도, 느긋하고 여유 있게 옆 테이블에 있는 권총 모양의 라이터를 가져와 불을 댕겼다. 펑하는 소리와 함께 파란 불이 붙고, 부챗살만큼 큰 불이 찌개 냄비를 잡아먹을 듯 달아올랐다. '부르스타' 같은 화구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찐 불꽃이다. 이 집 김치찌개 맛은 좋은 재료와 이모님 솜씨가 팔 할이라면, 이 할은 이 성난 파도처럼 냄비를 통째로 먹어버리는 푸른 불의 맛 이리라.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남녀 한 쌍은 김치찌개 2인분을 금세 해치우더니 제육볶음 2인분을 추가했다. 술이라도 마시려는 걸까 하고 힐긋 보았더니 순순히 저녁 식사 중이다. 김치찌개 2인분 먹자마자, 다시 제육볶음 2인분을 먹는 게 가능할까, 라는 의문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지글지글, 불 위에서 졸여지는 제육볶음 냄새가 다락방에 퍼지자 우리는 계란말이 말고 제육볶음을 추가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대신 남편은 공기 밥 하나를 추가해서 냄비 바닥에서 누룽지 긁는 소리가 날 때까지 싹싹 먹었다.
배가 부르니까, 다락방 계단이 더 가파르고 좁게 느껴졌다. 나에게 조심해서 내려오라는 이모님 얼굴을 보니 적어도 육십 대 중반은 훨씬 지난 모습이었다. “이모님 계단 다니실 때 조심하셔야겠어요.” 했더니 맑게 웃으며 “우리는 매일 수 백 번씩 다니니까 아무려도 안 해요” 그러신다. 이 만원을 계산하는데 어쩐지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광화문 뒷골목에 아직도 이런 실비집이 남아 있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음식 선호가 다른 남편과 한 번에 의기투합해서 오늘처럼 맛있게 저녁을 먹은 것도 실비집의 존재만큼이나 기적 같은 일이지만.
광화문에서 데이트하는 중년 부부들, 강추합니다. 광화문 집에서 가을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