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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오도 Dec 19. 2021

아홉 살 소녀에게

제9회 브런치 북 출판 프로젝트 대상 수상 소감

내 이름으로 된 책 한 권, 내가 이런 걸 구체적으로 꿈꾼 적이 있었나? 글을 쓰다 보면, 운 좋게, 어쩌면, 책 한 권쯤 낼 수도 있겠지만, 아니면 어쩔 수 없고, 라는 생각을 했을 뿐, 간절하거나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 피아니스트가 아니어도 피아노를 사랑할 수 있듯이 책 한 권 못 내도 매일, 조금씩 쓰는 사람이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늦은 밤, 책상 앞에 앉아 있으면 아들 녀석이 문을 열고 들어와 한 번씩 묻곤 했다. “엄마, 뭘 그렇게 매일 써?” 남편은 조금 더 아프게 쿡 찔렀다. “작가도 아니면서 뭘 그렇게 써?”


정지우 작가의 '글쓰기 책'의 제목이 〈우린 글쓰기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이다. 엘리트 선수가 아니어도 취미로 축구나 야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왜 글을 쓴다고 하면 출간 작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정지우 작가의 말대로 글을 쓰는 행위를 우리는 너무 특별한 무엇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글쓰기는 독서 같은 취미생활이 될 수 없을까?


이런 생각의 팔 할은 진심이었지만, 이 할은 한발 빼기였다. 한 선배로부터 ‘낮은 물에서 노는 사람’ 같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낮은 물에서 헤엄치며 칭찬받기를 좋아하는 사람. 이 정도면 충분히 물을 즐기는 편이라고 합리화하는 사람. 깊은 물은 위험하다고 말하며 절대 들어가지 않는 사람. 그러면서도 깊은 물에 대한 동경만은 버리지 못하고 마음 깊이 쌓아두는 사람. ‘책 한 권’을 쓰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깊은 물에 입수해 어줍지 않은 수영 실력을 드러내야 하는 일 같았다. 허우적거리며, 우스꽝스러운 꼴을 보여야 하고, 공연히 물만 먹고 나올까 무서웠다. 취미로 쓰는 글은 안전하고, 자유로운데, 왜 굳이 책 한 권을 쓰며, 사서 고생을 해야 하지? 위험한 일처럼 보였다.


4월 어느 날, 10주 과정의 ‘소행성 책 쓰기 워크숍’을 우연히 알게 된 날, 온종일 심장이 두근두근거렸다. ‘책 한 권’에 대한 욕망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도 인정하지 못하고, 며칠을 끙끙거렸다. 결국 두근거리는 내 심장을 한번 믿기로 하고, 신청을 해버렸다. 혼자서 깊은 물로 들어갈 용기는 없지만, 괜찮은 코치가 옆에 있다면 한 번쯤 도전을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린이 풀장에서 벗어나 조금 더 깊은 곳으로, 푸른 바다까지 헤엄쳐 가보기로 했다.


낮은 물에서 땅 짚고 헤엄치던 사람이 깊은 물에서 얼마나 허우적거렸던지. 혼자였다면 금세 수영복을 벗어던졌을 것이다. 물속에서 함께 해준 이들 덕분에 깊은 물에서 유영하는 즐거움을 맛보게 되었다. 헤엄치기의 목표를 정하고, 체력을 단련하고, 필요한 영법과 호흡을 익히듯 책의 주제를 정하고, 글감을 뽑아내고, 일정한 분량이 될 때까지 계속 썼다. 수영을 잘하려고 했다면 마치지 못했을 것이다. 내 힘으로 바다에 한번 가닿아 보자는 마음만 붙잡았다. 이번 브런치 북 출판 프로젝트의 수상은 이 헤엄치기 노력의 결실이다. 공식 발표가 나기 전에 이메일로 먼저 수상 소식을 들었고, 창비 출판사와 작성한 계약서를 등기로 배달받은 후에도 수상 사실이 잘 믿기지 않았다. '운영상의 착오가 있어서 수상이 취소되었다'는 이메일을 받는 꿈을 꾸기도 했다.


글쓰기는 늘 내게 숙제였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끝마칠 수 없는 숙제 같은 것. 그래서 매일 조금씩 해둬야 하는 것. 초등학교 2학년 때, 우연히 독후감으로 상을 받았다.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를 읽은 아홉 살 여자 아이의 마음을 붉은 선이 그려진 200자 원고지에 또박또박 썼을 뿐인데, 어른들에게 대단한 칭찬을 받았다. 나의 독후감 원고가 오랫동안 복도에 전시되어 있었다. 시골 학교의 작고, 귀여운 ‘독후감 경진 대회’가 어린 내게 남긴 인상은 귀엽지만은 않았다. 그 ‘사건’을 계기로 선생님들은 자주 무슨 무슨 전국 글짓기 대회에 나를 추천했고, 그런 권유가 없어도, 혼자 방바닥에 엎드려 뭔가를 쓰는 아이가 되었다.


브런치 대상 수상 소식을 시골에 계신 아빠에게 알렸다. ‘브런치 출판 프로젝트 대해 설명하기 어려워 그냥 어떤 출판 프로젝트에 글이 냈는데 당선이 되었고 상금으로 5백만 원을 받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올봄, 고추건조기가 고장 났다고 걱정을 하는 아빠의 전화를 받고, 팔십 대의 아빠가 농사를 얼마나  지을  있을까 싶으면서도, 300 원을 주고 짝거리는  기계를 사드렸다. 아빠가 고추농사로 버는 수입은 모종 값과 농약 , 가을 수확기 인건비를 빼면  년에 몇백 만원도  되는  같지만. 천평 밭농사는 아빠의 즐거운 '취미'이고, 자부심이니까. 그래서 그랬나, 오백만  상금을 크게 강조했다. 그리고 물어보았다.


“아빠 내가 학교 다닐 때 글짓기했던 거 기억나요?”


이런 질문을 아빠에게 해 본 건 평생 처음인 것 같다. 엄마 돌아가시기 전에 엄마에게 자주 했던, 조금 간지러운 질문들. 엄마의 대답이 뻔한 걸 알면서도 엄마 밥 먹고 방바닥에 누워서 실없이 반복해서 물어보던 것들. "엄마 나, 어릴 때 어땠는지 기억나?" 엄마는 늘 같은 대답을 했었다. "그럼, 그럼 다 기억나지. 네가 얼마나 야무졌는지, 너는 몰라."  


갑작스러운 질문을 받고 아빠는 삼초쯤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아, 그럼, 그럼 다 기억하지. 방바닥에 엎드려 뭘 많이 썼지” 아빠의 대답을 듣는 순간 알 수 없는 눈물이 와락 쏟아졌다. 아직 나의 유년을 기억하는 아빠가 건강하시다는 사실이 너무 좋고, 몰래 짝사랑하던 일을 공개적으로 인정받는 것 같은 기분이 한꺼번에 몰려오면서, 기쁘기도 하고 살뜰하기도 한 눈물이 났다.  남동생에게도 수상 소식을 알렸다. 동생은 늘 말수가 없는 아이였는데, 아이 아빠가 된 지금도 여전히 싫다, 좋다 표현을 잘 안 한다. 그런 동생이 수화기 너머로 들뜬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누나, 누나, 정말 축하해. 누나, 예전에도 글짓기로 상 많이 받았었잖아”  


브런치 대상은 현재의 내가 아니라, 방바닥에 엎드려 글을 쓰던 동그란 얼굴의 아홉 살 소녀에게 보내는 상 같다. 야박하고, 실리적이고, 세상 다 산 것처럼 행동하는 내 안에서 작은 등불 하나 들고 서 있는 그 소녀. 나는 그 소녀 덕분에 글을 쓰고, 조금은 더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나의 글쓰기 자아는 그 소녀를 닮고 싶어 한다. 브런치 대상은 최오도 이름으로 수상되었지만, 사실은 아홉 살 소녀가 받아야 할 선물이다.  


어떤 작가는 글을 쓰는 것을 ‘시간의 뚜껑을 열고 그 안을 들여다보는 행위’라고 했다. 아주 드물지만,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할 때가 있다. 글을 쓰던 중에 생각지도 않았던 어떤 이미지가 떠올랐는데, 어떤 건 어제의 경험처럼 선명하고, 어떤 이미지는 베일 너머의 풍경처럼, 꿈의 한 장면처럼 흐릿했다. 문장을 이어서 그 이미지의 오솔길을 따라 가면 울거나, 웃거나, 무심한 표정을 한 어릴 적 내가 있고, 오래 그리워하던 사람들이 나를 반겼다. 색으로 말하자면, 다행히, 그 이미지들은 대부분 따뜻한 노랑이었다.  


단정한 치마에 흰 양말을 신은 젊은 나의 엄마가 장바구니를 들고 오르막을 오른다. 나는 그 뒤를 졸졸 따르며 장바구니에 들어 있는 대파의 끝을 잡아당긴다. 내 유년의 가장 따뜻한 어느 날은 이런 이미지로 나타났다. 외갓집 툇마루에 앉아 있는 나는 외롭고 막연하다. 대전역 플랫폼에서 가락국수 냄새를 맡으며 불안해하는 계집아이도 만났는데 그것은 기억일까, 상상일까? 퇴근길에 아빠가 사 온 충무로 전기구이 통닭과 겨우내 마당에 묻혀있던 겨울 무의 톡 쏘는 향과 맛, 그것들은 지금의 내 입맛을 결정한 어떤 것임을 알게 되었다.


글을 쓰면서, 자주, 회의감이 빠지기도 했지만, 어느 날은 눈물이 나면서 속이 후련해질 때가 있었다. 내가 그 이미지가 말하고자 하는 상징에 충분히 가닿았을 때인 듯하다. 〈우린 조금 슬프고 귀여운 존재〉를 쓰면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노란색으로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는 기억이 있는가 하면 새파랗게 나를 질리게 하는 기억도 많았다. 그럴 때는 혼자서 며칠을 끙끙 앓았다.


초보자의 운으로 과분한 상을 받게 되었다. 앞당겨 걱정하는 편은 아닌데도 봄까지 원고를 잘 마무리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긴 겨울이 지나면, 동네 숲에 지천으로 진달래가 필 것이고, 금세 초록이 숲을 빽빽이 채울 것이다. 그즈음, 내 이름으로 된 책 한 권이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계속 써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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