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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오도 Jan 21. 2022

견뎌야 하는 시간

글쓰기에서 책 쓰기로

언젠가 방콕 여행 중에 누에고치에서 수작업으로 명주를 뽑아내는 광경을 보았다.


순백의 누에고치가 냄비에서 동동동 끓고 있고, 그 옆에 앉은 여인은 한 손으로는 물레를 돌리며, 다른 손으로는 누에고치가 풀어내는 거미줄 같은 선들을  낚아 채, 허벅지에 위에서 쓰윽 꼬아 물레의 홈으로 넘겼다. 이와 같은 여자의 반복적인 행위는 마치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는 듯 보였고 물레에 감기는 비단실은 악기에서 흘러나오는 선율 같았다.  인간의 욕망을 때문에 삶아지는 애벌레와 허벅지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계속되는 여인의 노동이 만나 명주실이 되는 광경은 황홀하면서도 눈물겨웠다.


초록색 뽕잎을 먹으며 애벌레는 나비의 꿈을 꾸었을 것이다. 언젠가 하늘로 훨훨 날아가리라는 꿈을 안고 코쿤에 자신을 가둔 애벌레의 꿈은  붉고, 푸른 비단을 향한 인간의 욕망에 무참히 삶아져 종말을 맞는다.


오래전 미국에서 한가롭게 지낼 때, 뜨개방에 다녔다. 처음 의도는 뜨개질하는 심심한 미국 언니들과 수다를 떠는 것, 그러니까 영어와 사교가 목적이었는데, 막상 뜨개질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나는 정말  그 세계로 푹 빠져들고 말았다. 뜨개질은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과정과 닮은 면이 있다.


 오색의 실타래가 대나무 바늘을 통과해서, 겨울밤 연인 같은 다정한 숄이 되었고,  누군가에게 위안을 주는 뜻밖의 선물이 되었으며,  테이블 위를 장식하는 화려한 레이스 덮개가 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은 손가락의 굳은살과 참을 수 없는 어깨 통증을 불렀고, 떴다 풀었다를 반복하는 수많은 짜증의 밤과 연결되어 있다.


7월 출판을 앞두고 '퇴고 지옥'에 빠져 있다. 부서 이동으로 정신없이 분주한 가운데, 허리까지 삐끗해서 퇴근하면 초주검 상태가 되고 만다. 저녁 먹고 샤워하고, 침대로 직행하고 싶은 생각뿐이다. 꾸역꾸역 시간을 쪼개서 써 놓은 글을 퇴고해 보는데 진도는 느리고, 고친 글이 더 좋아졌다는 확신도 들지 않는다. 


오늘 저녁 문득 '견뎌야 하는 시간'에 대해서 생각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거나, 실타래가 다정한 숄이 되는 '기적'은 아니지만, 취미로 쓰던 '글쓰기'가 '책 쓰기'가 되는 것도 한 세계를 넘어가는 일임은 분명한 것 같다. 하나의 세계가 전혀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과정은 유혹적이고 매혹적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애벌레가 죽는 시간이고, 고단한 노동과 인내 그리고 존경이 무한 반복되는 시간이며, 새로운 세계에서는 쉽게 잊힐, 섭. 섭. 한  시간이기도 하다. 다른 세계로 넘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견뎌내야 하는 시간이란 것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지금 그 견뎌야 하는 시간을 견디고 있다. 브런치에 글을 쓰는 모든 작가님들과 함께 그 시간을 건너가는 중이라고, 생각하니 큰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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