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리는 자가 진짜 주인
친구들과 매실 밭에 둘러앉아 점심을 먹었다. 동네 숲 가는 길 매실밭에서 테이블 하나를 발견하고 그곳을 우리는 아지트로 삼았다. 다행히 밭주인은 우리가 그러는 걸 신기하게 볼 뿐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J 언니는 흰쌀밥에 찹쌀 새알심을 넣은 들깨 미역국과 버섯 조림을 가지고 왔다. C는 커다란 배 2개와 밑반찬, 그리고 핸드드립으로 내릴 커피를 준비했다. 나는 뜨거운 물과 모과차를 가지고 갔다. 아침에 비가 살짝 흩뿌려 소풍이 가능할지 걱정했는데, 점심 무렵에 비는 그치고 회색 하늘만 낮게 내려앉았다. 비에 젖은 땅에서 황토 냄새가 진하게 올라왔다.
나무 위에 까마귀 한 마리가 앉아서 조금 화가 난 듯 깍 깍 울어댔다. 음식을 나눠달라고 요구하는 건가? 까마귀의 심통과는 상관없이 종달새, 참새, 산비둘기.. 내가 이름을 모르는 각양의 새들이 제 목소리를 뽐내며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까마귀야 좀 조용히 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언니, 이 땅이 얼마인지 모르지만, 열 평만 살 수 있으면 좋겠다.” “뭐하게?" "아무것도 안 하게요. 그냥 나무 테이블 하나 가져다 놓게요. 눈치 안 보고, 우리 거 놓으면 좋잖아요?” “
“ 신도시 개발 때문에 평당 천은 할걸? 근데, 왜 사야 해? 봄, 여름, 가을, 겨울, 여기 와서 소풍하고 누리는 건 우리니까 사실상 우리가 주인 아닌가?”
미국의 어느 부자 동네에서 오래 살았던 지인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집주인이 일하러 간 낮 동안 이민자 가족이 그 동네 집들을 돌아다니며 청소를 한단다. 텅 빈 집에서, 가족이 함께 모여 노동하고, 테라스에 둘러앉아 준비해 간 음식을 나누고, 라틴음악이 온종일 흥겨운 가운데, 정원과 수영장에서 대화 소리, 웃음소리가 끝이질 않는단다. 그 광경을 볼 때마다 "아름다운 저 저택의 주인은 과연 누구일까?"라는 질문이 들었다고 했다. 사실상의 주인! 그래. 누리는 자가 주인이지.
지난 3월 내 생일에도 이곳에서 봄 소풍을 했다. C가 구워온 빵에 초를 꽂고,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고, 진달래 피는 곳에 내 마음도 펴라!" 같은 노래를 부르며 봄 생일을 축하했더랬다. 매화 몇 송이가 검은 가지를 뚫고 나와 연분홍 얼굴로 봄을 알리던 날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딱따구리가 나무를 두드리는 소리를 냈는데, 봄에 새들은 찍 짓기로 가장 바쁘다고 C가 알려줬다.
작년 겨울 갑자기 큰 눈이 내리던 날, J와 C는 하던 일을 멈추고 매실 농장으로 달려갔다. 펑펑 내리는 눈을 맞으며 커피를 내리고, 호호거리며 소녀처럼 웃는 모습이 그녀들이 보내온 셀프 비디오에 들어 있었다. 그녀들은 숲의 모든 것은 아낌없이 사랑하고 누리는 사람들이다.
동네 숲의 일부가 창릉 3기 신도시로 수용될 운명이라고 한다. 토지 보상 절차가 한참 진행 중이라는데, 대상 지역에 땅 한 평 없는 우리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매일 산책하고 소풍 하는 땅이 수용되어, 도로가 되고 아파트가 된다는 사실이 우리와 전혀 무관한 일은 아니었다. 소유권이 없다고 누릴 권리까지 없는 것은 아닌데, 우리에게 개발의 의사를 묻기는커녕 (물론 그런 것까지 기대하지는 않지만) 진행 상황을 안내해 주지도 않다니. 관청에 가서 막 따져 묻고 싶어졌다. 우리에게 알 권리가 있다!
우리 같은 산책자들이야 산책로를 잃어버릴 뿐이지만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뿌리내리고 살아온 숲의 나무들은 인간들의 편의를 위해 생명을 잃는다. 나무뿐인가. 숲의 풀과 새들과 동물들은 다 어디로 갈 것인가. 산책길 중간에 있는 초등학교 운동장만 한 크기의 논은 이미 반쯤 도로로 변해 있었다. 봄에 초록 모종이 바람에 산들산들 부는 모습도, 가을에 누런 벼들이 출렁이는 모습도 더 이상 볼 수 없게되는걸까. .
멀지 않아 숲의 나무들이, 보드라운 산책로가 처참하게 파괴되는 모습을 보아야 할 텐데.. 어쩌나 그때가 검은 나무에 막 물이 오르고, 아기 손가락 같은 연두색 잎이 뾰족이 올라오는 순간이면.. 한여름 녹색의 물결이 절정에 달했을 때라고 덜 잔인하게 느껴질까. 도토리와 산밤이 지천으로 흐드러질 가을이라면… 나무는 쓰러질 때 뼈 부러지는 소리를 낸다. 겨울이면 그 소리는 몇 배로 더 슬프게 들릴 것이다.
이 동네가 몇 년 안에 얼마나 변할지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더 많이 걸으며 몸으로 생생히 기억하고자 생각했다. '누린다'라는 말의 의미를 우리는 각자 다르게 해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개발을 원하는 이들이 생각하는 ‘누리다’와 내가 생각하는 ‘누리다’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깊고 검은 골짜기가 있는 것은 아닐까? 나의 ‘누리다’ 역시 지극히 인간종 중심임을 깨닫는다. 아카시아 향기 가득한 숲이 묻는다. 숲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냐고. 하늘 높이 솟은 미루나무 두 그루가 은 녹색 이파리를 출렁이며 파도 소리를 냈다. 숲이 대답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