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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오도 Apr 01. 2021

사랑의 고통은 무엇으로 구원될 수 있을까?

포루투갈의 높은 산


포루투갈의 높은 산 (얀 마텔)

날마다 벌어지는 끔직한 사건들을 보면서, 인간에 대한, 인간이 만든 제도에 대한 환멸로 몸서리를 치다가도, 이 행성에는 이런 글로써 우리의 슬픔을 공감하는 인류도 살고 있다는 사실에 위안과 용기를 얻는다.


이 한권의 책을 위해 얀 마텔이 바친 시간과 통증의 양은 얼마나 될까를 생각해 본다. 한권의 글이 세상에 나오기까지의 그 고통에 견주어 보면, 그것을 읽는다는 것은 얼마나 달콤하고 행복한 의무인가.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읽는 중에 다시 읽고 싶어지는 이야기”라고 이 책을 소개했다.(정말 그렇다) 나는 이렇게 말해보고 싶다. 이 책은 읽는 중에 읽는다는 사실을 잊게 만드는 마술적 이야기 라고.



사랑하는 사람을 이유도 알 수 없이, 갑자기 잃었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사랑하는 연인과 아들, 아버지를 잃은 토마스는 매일 밤 울부짖고 화를 내며 신에게 반발한다. 왜, 무슨 이유로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이냐고 묻는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 그는 뒤로 걷는다. 뒤로 걷는 다는 것은 눈이 달린 앞을 향해 걷도록 정해놓은 신의 섭리에 대한 저항이고, 앞에서 다가오는 것들을 회피하고 지나쳐온 것들만 보겠다는, 희망에 대한 반발이다.


그는 신의 진짜 얼굴을 하고 있다는 전설 속 십자가상을 찾아서 포루투갈의 높은 산을 향한다. 뒤로 걷는 그의 여행은 고통의 연속이다. 길을 잃고, 알 수 없는 이유로 폭행을 당하고, 가진 것들은 불에 타고, 씻지도 먹지도 못하는 여정이 계속되고, 온 몸은 이가 들끓어 가렵다. 그에게 가장 큰 고통은 더 이상 슬픔도, 애절함도 분노도 아닌 가려움에 대한 감각이다. 가려움의 묘사가 어찌나 집요한지 문장 속 검은 활자들이 이나 벼룩으로 변해서 내 머리카락으로, 겨드랑이와 사타구니 속으로 스멀스멀 기어들어 오는 느낌을 받는다. 몸이 느끼는 극단적 괴로움 덕분에 그의 슬픔과 분노는 잠시 쉴 수 있다. 자신을 죽음 앞까지 내몰아야 겨우 조금 잊을 수 있는 슬픔의 고통은 무엇으로 구원될 수 있을까?


책의 마지막쯤에 아주 놀라운 장면이 나온다.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 포루투갈의 높은 산에 사는 사람들이 운구를 메고 모두 뒤로 걷고 있다. 운구를 메고 뒤로 걷는 일은 그 마을의 전통이 되었는데, 누구도 그 기원은 알지 못하고 다만 그것이 깊은 애도의 방법이라는 사실만을 안다.


토마스의 이야기는 다른 시공간 속 불행에 빠진 사람들과 침팬지 오도 이야기로 연결된다. 슬픔과 슬픔이 연결되고, 그 슬픔이 누군가의 슬픔을 구원한다. 삶은 어찌되었건 계속된다. 그런 삶을 있는 그대로 고요히 받아 안는 것, 인간은 너무나 유능해서 절대로 할 수 없는 그런 일들을 침팬지 오도가 우리에게 지극한 무언으로 알려준다.


한권의 책을 마칠 때마다 묘한 격랑에 휩싸인다. 때때로 잠을 설친다. 포루투갈의 높은 산을 다시 꺼내 읽은 밤, 잠결에 뒤로 걷는 이들의 길고 긴 행렬을 보았다. 나를 떠난 이들이 그립고 그리워 목이 메었다.


위로가 필요한 그대가 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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