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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오도 Feb 01. 2021

여행은 길을 잃는 순간에 찾아온다.

'작은 불씨는 어디에나'(셀레스트 잉,나무의 철학)


이야기는 집이 불타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미국에서 가장 안전하고 아름답기로 소문난 동네, '세이커 하이츠'에서, 전형적인 중산층으로 편안한 삶을 영위하는 엘레나의 가족은 자신들의 집이 불타는 장면을 언덕 위에서 내려 보고 있다. 집을 불태운 사람은 다름 아닌 엘레나의 막내딸, 이지. 집을 불태우고 이지는 사라진다. 불타는 집을 분노와 불안에 휩싸여 바라보는 가족들의 얼굴에 묘한  공모자의 안도가 엿보인다. 이들 가족이 남몰래 불태우고 싶었던 어떤 비밀과 거짓말이 이 소설의 소재이며 주제가 된다.   
 

이야기는 엘레나와 미아 그리고 그녀들의 십 대 자녀들과의 관계를 계층적 관점에서, 그리고 성장이라는 관점에서 깊이 파고든다. 여러 캐릭터들이 등장하지만, 나는 특별히 엘레나에게 끌렸다. 엘레나는 평생을 반듯하게 살아온 여자이다. 아이 넷을 낳아 '반듯하게' 키웠고 그러면서도 한 번의 경력의 단절도 없이 지역 신문사 기자로 명성을 쌓아왔다. 그녀에게 일은 경제적 이유보다는 정의를 위한 최소한의 실천 같은 것이다. 한때 훨씬 더 진보적이고 진취적인 삶을 꿈꾸었으나 그녀의 뜨거웠던 마음은 '오래 지속된 실용적이고 편안한 삶 속'에 깊숙이 묻혀 버렸다. 그녀는 상속받는 작은 빌라를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이나 예술가에게 싸게 임대해 줌으로써 나눔을 실천하는데 자부심을 갖고 있다.

이러한 엘레나의 '반듯한' 삶은 빌라의 새 임차인이며, 사진 예술가인 미아와 그녀의 딸 펄의 등장으로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엘레나는 세상을 떠돌며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먹고사는 미아와 펄의 삶에서 상상하지 못한 삶의 존엄과 행복을 발견한다. 그녀는 그들의 행복을 인정할 수가 없다. 무책임하고, 제 멋대로인 그들이 엘레나보다 더 행복하다는 것은 불공평하고 부조리한 것이다. 엘레나가 안정된 삶을 위해 지켜야 했던 수많은 원칙과 가치들을 그들은 가볍게 무시하며 살았다. 세상의 규칙을 무시하고 예술적 영감을 따라 떠도는 삶이 어떻게 자신보다 더 행복할 수 있단 말인가. 엘레나는 기자로서의 경험과 가용할 권력을 이용하여 미혼모가 된 미아의 과거, 미아가 떠돌이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어둠을 찾아내서 세상에 폭로하려 한다.     

 
엘레나의 치졸하고 위선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나의 마음은 그녀 쪽으로 기울었다. 뚜렷하게 무엇을 응원하는지 잘 모르면서도, 그냥 그녀가 원하는 것을 찾았으면 싶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엘레나의 모습에서 나를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삶에 달관적 자세를 취하나, 사실은 그 안정적 삶이 흔들릴까 전전긍긍하는 여러 얼굴들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정한 기준에 맞춰 스스로의 행복 기준을 변형시키고, 제대로, 반듯하게 살고 있다는 주문을 걸며 버티는 삶이 세상에는 얼마나 흔한가.

그런 버석버석 건조된 삶에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가 나타나 여기저기에 작은 불씨를 피워 올린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나는 이런 질문 속에서 엘레나를 쉽게 비난하지도 동정하지도 못하였다.

문학을 읽는 즐거움 혹은 괴로움 중 하나는 책을 읽는 동안 잊혀진 수많은 기억들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는 것이다. 기억 중에는 꽃이 피듯 향기를 내뿜는 것이 있는가 하면, 너무 뜨거워 가슴에 화상을 입히는 것들도 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잿더미를 덮어 숨겨 둔 오래된 후회들이 깜박깜박 불씨가 되어 피어올랐다.

 
이십 대, 삼십 대, 사십 대, 그때마다 우연처럼, 필연처럼 내 앞에 여러 갈래의 새길들이 나타났으나, 나는 언제나 밝고 환한 길들 만을 택했다. 내가 만약 울퉁불퉁하고 어두운 길을 택했더라면 나는 지금과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나는 내가 선택하지 않은 그 길이 가끔씩 궁금하다. 가지 않는 길은 언제나 미련을 남기는 법이다. 삶에는 늘 새로운 길들이 등장하고, 그 길을 다 걸어가 볼  도리는 없다. 그럼에도, 이런 소설을 읽다 보면 회한의 불씨가 탁탁 튀어 오른다. 평탄하고 풍경 좋은 길만 따르느라 길 한번 잃지 않고, 살금살금 살아온 것은 아닐까 하는. 경험 상, 진짜 여행은 언제나 길을 잃는 순간에 찾아온다. 길을 잃지 않는 삶이란 적당히 저렴하면서도 적당히 편안한 패키지 관광이면 모를까 진정한 여행은 될 수 없지 않을까.

 
미아는 세이커 하이츠를 떠나면서 엘레나에게 예술 작품을 선물로 남긴다. 엘레나가 쓴 신문의 논평들, 수년에 걸쳐 충실하게 작성해 오고, 결과적으로 그녀의 경력을 쌓게 해 준  신문 기사들을 이용해 새장을 형상하고, 기사의 단어들을 깔끔히 오려내서 새장 창살 사이 공간에 채웠넣었다. 새장의 창살은 부서져 굽어있고, 새장 안에는 작은 황금색 깃털이 놓여 있다. 무언가 새장을 탈출했고 작은 깃털이 남았다. 그것은 미아가 엘레나를 위해 남긴 소망이었다.  
 

이 책을 다 읽고 덮었을 때, 엘레나가 불타는 집 앞에서 묘한 안도감에 젖는 이유가 짐작된다면, 그리고 미아가 남긴 새장의 소망이 이해된다면, 당신도 나처럼 엘레나의 삶을 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미아가 남긴 새장의 의미를 깨달은 엘레나는 분명 예전의 엘레나와는 다르게 살 것임을 믿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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