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자들 (올가 토카르 추크)
소설 ‘방랑자들’은 주인공인 나를 설명하는 것으로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나는 한 곳에 뿌리를 내리는 유전자가 없고, 누구라도 환하게 웃으며 좋아하지만, 평온함을 느끼는 것에는 아무 감흥이 없다. 비틀리고 괴기하고, 혼돈을 불러일으키는 것에 자꾸만 눈길이 가는 나, 그래서 나는 심리학이라는 학문에 제대로 빠져 들지 못하며, 정처 없이 떠돌며 닥치는 대로 일하며 틈틈이 글을 쓰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엿듣는다
“어딘가에 일정 기간 머물다 보면, 금방 그곳에 뿌리내릴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그런 유전자가 내게는 없었다. 여러 차례 시도해 보았지만 내 뿌리는 굳건하지 못해서 미풍만 불어도 몸이 휙 날아갔다. 내게는 식물처럼 싹을 틔울 능력이 없었다. 나는 대지로부터 수분을 빨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아타이오스의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다. 내 모든 에너지는 움직임에서 비롯되었다. 버스의 진동, 자동차의 엔진 소리, 기차의 유람선의 흔들림”
책을 읽던 중 계속 생각했다.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있을까? 나의 어떤 면모가 나를 나답게 하는 것일까? 나에게는 정주의 유전자가 있는 걸까? 그래서 한 직장을 20년이나 다닐 수 있는 것일까? 나는 ‘방랑자’이기보다는 그녀의 부모님과 같은 사람인지 모르겠다. 스스로를 유목민이라고 생각하지만, 절대로 유목민이 아닌 사람들. 떠나기 위해 떠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기 위해, “우편함을 가득 채운 편지와 고지서를 수거하여 서랍장 위에 쌓아 놓기 위해, 대대적으로 빨래를 하기 위해”,“친구들에게 여행에서 찍은 사진을 끝도 없이 보여줘서 결국 그들이 몰래 하품하다가 따분해 미칠 지경이 되도록 만들기 위해 돌아”오는 부류에 가까운 듯하다.
600 페이지가 넘는 두툼한 책인데, 남은 페이지가 줄어드는 것이 아쉬울 지경이다. 언뜻 에세이집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는 글쓰기 방식이 흥미롭다. 소설이라는 서사가 이런 방식으로도 쓰여질 수 있다니. 글쓰기가 춤을 추는 것 같다. 온몸에 힘을 다 빼고 리듬을 타는 것 같다가 어느 순간 고양된 에너지가 온몸을 도약시키는 듯, 문장이 살아 있다. 노벨문학상(2018)을 받기도 했다는 이런 책을 읽으면, 늘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글을 짓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이런 분들이 생명을 갉아 넣어 쓴 글을 읽을 시간도 부족한데..
폴란드의 역사는 우리나라 역사와 많이 닮아 있다. 폴란드는 강대국 사이에 끼어서 스웨덴, 프로이센(독일), 오스트리아에 번갈아 침략당하고 지배를 받다가, 2차 세계대전에 결국 독일의 침공으로 유대인을 포함하여 600만 이상이 학살당하는 끔찍한 고통을 겪는다. 그리고 2차 세계 종식과 함께 독립했지만 다시 사회주의 독재를 경험했고 1990년에 민주화를 이루었다. 침공 국가와 사회주의 독재를 군사독재 등으로 바꾸면 고스란히 우리 역사처럼 보일 듯하다.
이런 경험의 유사함 때문인지 폴란드 문학을 읽을 때 공감이 훨씬 쉬운 것 같다. 역사 시간에 배우던 폴란드의 지도 위에 누군가 살고 있는 것을 상상하기 힘들었다. 폴란드 작가가 길어 올린 문장을 보고 나서야 그 지도 위에 수없이 많은 개별자들이 밥을 짓고, 영화를 보고, 묵묵히 지하철을 타고 일터를 오가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와 올가 토카르추크의 나라, 폴란드에 멀지 않은 날에 방문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