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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오도 Sep 29. 2020

무지개 송편 빚어 해주에 갈 수 있을까?

추석이 슬픔 사람들을 생각하며..

황해도 해주가 고향인 아빠는 한국전쟁 때 홀로 서울로 내려왔다. 열다섯 살 소년이 전쟁 중에 혼자서 서울로 내려오게 된 사연이나, 양아버지 집에서의 생활, 성인이 되고 서른 넘어 결혼을 할 때까지 무엇을 하면서 살았는지 나는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어릴 때 이런 걸 물으면, 아빠는 슬그머니 자리를 뜨고, 엄마는 그런 걸 왜 물어서 아빠를 힘들게 하냐고 혼을 냈다.


초등학교 때 그런 경험을 몇 번 한 후부터는 막연히 아빠의 옛이야기는 금지된 질문으로 새겨두고 절대로 꺼내지 않았던 것 같다. 어른이 된 후에도, 전쟁 통에 열다섯 소년이 피붙이 하나 없는 남한 땅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시간들이란 배고프고 슬픈, 구구절절하고, 곡진한 이야기들로 채워졌을 것이어서, 그 기억을 불러내도록 물을 수가 없었다.  
 
80년대 초, 엄마와 동생들이랑 이산 가족 상봉 방송을 보면서 아빠 눈치를 살피던 기억이 난다. 어린 마음에도 아빠도 방송국에 나가서 '잃어버린 가족"을 찾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말로 꺼내지는 못했다. 어른이 된 후에, 아빠가 막내 동생을 데리고 여의도 방송국에 갔던 얘기를 듣게 되었다. 동생은 아빠와 같이 서울에 며칠 머물면서 여의도 담벼락에 도배된 사람 찾는 전단지를 읽고 다니던 것과 방송에 출연하고 싶어 찾아온 수많은 인파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남동생도 그때는 어려서 무슨 일을 하는 건지 몰랐다고 했다.
 
추석 같은 명절이 되면 우리 집은 진정할 일이 없었다. 엄마는 아빠만 두고 친정에 갈 수가 없다면서 명절에 친정에는 가지 않았다. 그때는 민족 대이동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추석이면 당연히 고향을 찾던 때라서 아무 곳에도 가지 않고, 누구도 오지도 않는 우리 집 추석은 이상하고, 부끄럽게 느껴졌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면 공부 핑계로 학교에 갔는데, 수위 아저씨는 사정을 모르니까 명절에도 공부를 하러 왔다고 칭찬을 하면서 문을 열어 주었다. 학교는 텅 비어 있고, 커피콩 색으로 물들기 시작한 플라타너스 나무만이 햇볕에 화사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나의 외롭거나 쓸쓸하다는 감성의 팔 할은 아마도 추석 무렵에 감돌던 우리 집의 적요로부터 기원했을 것이다.


어느 추석인가 엄마가 단호하게 차례를 지내겠다고 선언을 했다. 우리 삼 남매는 차례 준비가 무슨 파티 준비인  것처럼 들떠서 각자 원하는 것들을 장보기 목록에 넣도록 주문했다. 나는 명절 끝에 친구들이 가지고 나오던 오색의 동그란 사탕(우리 동네 얘들은 그걸 오강 사탕이라고 불렀다)과 약과를 꼭 사자고 했다. 차례나 제사가 아니면 맛볼 수 없는  오강 사탕과 약과를 실컷 먹어보고 싶었다. 알고 보면 별 맛도 없는 것들인데, 어릴 때 잘 먹을 수 없었던 음식이라 그런지, 지금도 그것들을 보면 식탐이 생긴다.
 
엄마의 어설픈 명절 지내기는 계속되지 못했다. 명절상을 차려놓는 것 까지는 괜찮았으나, 북에 계신 어른들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차례상에 절을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애매함, 차례상을 풀어서 다섯 식구가  먹을 때의 그 어색함과 적막함이 명절상 차리기를 계속하지 못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다음 해부터 차례상은 차리지 않았고 송편만 빚어 먹곤 했다. 어차피 차례상에 올리지도 않을 송편인데, 우리 식대로 만들자는 생각이었는지, 엄마는 식용 물감을 쌀 반죽에 넣어서 송편을 빚었다. 지금은 색색의 송편이 많지만, 그때 그런 식으로 송편을 빚는 집은 없었던 것 같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찜통의 뚜껑을 열었을 때,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색 송편이 꽃처럼 활짝 모습을 드러내던 그 순간이 지금도 생생하다.


다시 추석이다.


서울에서 기차를 타면, 아빠의 고향인 해주까지 얼마나 걸릴까? 길어야 몇 시간.. 그 몇 시간의 거리를 평생 내놓고 그리워도 못하는 아빠가 또 한가위를 맞는다.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고향 방문을 자제하라고 하는데 아빠는 칠십여 년 세월 동안 고향 방문을 강제로 금지당해 오고 있는 셈이다.  팔십 대 중반인 아빠가 생전에 고향을 방문할 수 있을까?  한 때 급변하는 남북관계로 왕래 정도는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듯도 보였는데, 요즘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멀기만 한 희망인 듯 보인다. 나이 팔순 지난 사람들 만이라도 고향 방문을 허용하는 인도주의적 결정이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자유롭게 북한 여행이 가능한, 그날이 너무 늦게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빠 모시고 해주에 가서, 엄마표 무지개 송편을 빚어 사진으로도 뵙지 못한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예쁘게 차례상을 올려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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