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며 “사랑해.”라고 말한 적은 있었다. 그 말을 해야 되는 관계라서, 그 말을 해야 될 상황이라 했었던 게 분명하다. 나는 사랑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에게 다쳐본 적이 없었다. 주로 사람을 버리는 쪽이었고, 버려지는 쪽이 되었다 한들 극복이 빨랐다.
“편리했다.”
28살이 되던 해, 벚꽃이 지고 장미가 필 무렴 나의 편리했던 삶은 박살이 났다.
C를 알게 되었다. 나를 그냥 지나쳐 지하철 계단을 올라가는 C를 향해 C의 이름 세 글자를 불렀다. “HCH!” 내가 C에게 처음 한 말은 C의 이름이었다. C의 이름은 조금 특이해 살아오며, 비슷한 이름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고유명사 같은 그 이름을 나는 좋아한다.
C는 군대를 22살에 제대하고, 학교에 2학년으로 복학한 23살 대학생이었는데, 사귀자는 말대신 친구들과의 단체톡에 “나 여자친구 생겼다. ”라고 말하는 그의 명확함도 좋았다.
사실 C와 교제를 시작하면서도, 이 어린애와 사귀어봐야 뭘 얼마나 사귀겠냐는 얄팍한 마음을 가졌었다. C를 좋아한 것은 분명하지만 C를 신뢰하진 않았고, 애초에 나는 남자를 소중히 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예전에는 비밀번호 찾기 질문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나는 늘 “내 보물 1호는?”이라는 질문을 선택했고, 그 답변은 언제나 “나”였다.
나는 내가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 천성이 오만한 데가 있고 말투가 차가운데, 연인에게 그 모든 것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잘못인 줄 모르고.
3년을 함께 했다. 1년은 아낌없이 사랑받았고, 또 1년은 서로 사랑했다 믿었으나 균열이 생겼고, 또 1년은 서로를 버리려 했으나 버리지 못했다. 3년 동안 나는 C에게 아침 인사를 먼저 한 적이 없었다. 매일 아침 나에게 먼저 메시지를 보낸 건 C였다.
“울 애기, 잘 잤어?”
나는 C에게 보고 싶다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왜 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나중에 생각해 보았는데, 내가 C를 보고 싶어 하기 전에 C는 이미 내 앞에 있었다.
C에게 짜증이 나면 나는 짜증 난 이유를 말하지 않고, C를 만나지 않음으로써 C에게 벌을 주었다. 그런 나를 C는 몇 시간이고 설득해 내 기분을 풀어주고, 사랑한다, 보고싶다 말했다.
만난 지 두어 달 때쯤, 헤어질 뻔했던 적이 있었는데 꽤 오랫동안 나는 그날 C와 헤어지지 못한 일을 후회했다.
C의 집 근처에서 데이트를 하고, 한 정거장 밖에 되지 않는 C의 집에 그를 데려다주고 지하철을 타고 오려고 했는데, 이슬비가 조금 내렸다. C는 본인이 지불할 테니 택시를 타자고 했는데, 나는 15분만 걸어가면 된다고 거절했다. C는 아버지가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대표였고, 나는 가난한 미혼모였다. 그것이 내 거절의 이유였다. 10여분을 걸은 시점이었는데 이슬비는 비가 되어버렸고, C의 표정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나도 눈치가 있는지라 나는 비 오는 게 좋다는 둥 이래저래 C의 기분을 풀어주려 했는데, 비 맞는 게 싫다며 말없이 뚱한 표정으로 걷는 C가 나도 싫었다. C에 집에 다 왔을 때쯤 우산을 가져다주겠다는 C에게 “필요 없어. 잘 들어가”라고 말했다. 헤어질 결심으로 내리는 비를 잔뜩 맞으며 지하철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우산을 들고 C가 뛰어왔다. 헤어질 결심을 했기에 그 우산을 받으면 돌려줄 수가 없었다. 필요 없다고 뿌리치는 나를 C는 들어 안아 올렸다. 바닥에 우산이 떨어지고, 둘 다 비를 잔뜩 맞았다. 안은채 한참 동안 비를 맞았다.
잔뜩 비 맞은 채, 나의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우리는 함께 탔다. 맨 뒷좌석 나란히 앉아 손을 잡고, 웃었다. C의 손은 내 손보다 차가웠던 적이 없었던 거 같다. 그날 우리는 헤어졌어야 했다.
그런 날들이 켜켜이 쌓여, 나는 C를 사랑하게 되었다.
C는 몰랐겠지만, 결국 나는 나보다 “너”를 더 사랑했다. 나를 죽여, 너를 살릴 수 있다면 망설임 없이 나를 죽일 수 있는 것. 나보다 너를 더 사랑한다는 것은, 내게 그런 일이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설명하자면 그런 일이다.
그렇게 나의 ”편리했던 삶“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