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서브컬처와 번역 이야기

20대 시절의 단상 (7)

by Younghoo Kim
c0103208_4d8b1e72d63a6.jpg Image from『パルフェ ~ ショコラ second brew ~』, Copyright by (C)GIGA



게임, 만화, 애니메이션으로 대표되는 하위 문화Subculture. 기본적으로 나는 이 분류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 sub라는 접두사가 붙지만 그 기준은 향유층인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다. 학계에서 영화, 소설 등의 기성의 미디어들과 구분하기 위해 붙였을 뿐, 엄연히 독립적인 시장과 소비층, 화풍, 그리고 경제적 입지를 가지고 있다. 굳이 말하자면 '마이너 컬쳐' 가 적절할 것 같다.


국내 서브컬쳐와 번역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팬덤의 시작부터 함께 했기 때문이다.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 몇몇 사람들이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음반의 LP판를 들여오며 1세대 서브컬쳐 매니아, 즉 한국의 '오타쿠' 팬덤이 태동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의 특징은 철저히 '특정 계층' 에게밖에 소비할 여지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본산 소프트와 콘솔을 구매할 가계 여유, 일본어를 학습할 만한 환경, 심지어는 일본 채널을 TV로 수신할 수 있는 지역이냐까지! 소위 말해 부잣집 도련님들의 향유물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즐기는 데 그치지 않고 종종 모여서 정보나 물품을 교환하기도 했다. 용산 등지에 모인 그들이 다마고치 게임기를 불법 개조하던 역사는 후발 세대까지 알 정도로 유명하다. 그리고 몇몇은 자신들이 즐긴 게임의 스크립트를 한국어로 번역하기 시작한다.


90년대 중반, 한국 게임잡지의 시조새 격인 '게임챔프' '게임월드' '게임라인' 등이 속속 발간되기 시작하며, 기자를 모집하기 시작한다. 당연히 편집장도 기자도 독자(당시 소위 말하는 '독자 투고자' 란 개념이 있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하이텔 애니메이트를 거치며 지금은 각계에서 전업 업계인으로 활동하고 있다)도 서브컬쳐에 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수많은 글들을 통해 국내 팬덤의 초석을 다지려고 했던 그들은 신입 기자들을 엄격하게 다루었다. 상당수가 청소년들이었기 때문에 윗세대들 입장에선 향후 20년간 업계의 최전선에서 일할 이들을 잔뼈 굵은 전문가로 만들어야한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상업적으로도 여러 명작들의 한글 번역이 왕성하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팬덤이 아닌 사장들의 마인드가 '어차피 애들이나 보는 거 허섭하더라도 많이 찍어서 많이 파는 게 낫지' 였기에 물량 위주의 번역이 성행하였단 아쉬움이 있다. 한편 VT와 PC통신을 거치며 팬덤 차원에서도 아마추어 번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대표적으로 대학교 서브컬쳐 동아리 활동의 일환으로 하는 게 많았다. 서울대학교의 'NOITAMINA'(애니메이션의 철자를 뒤집었다) 나 연세대학교의 '만화사랑' 등의 역사가 그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팬덤 번역에 초점을 맞추자면 초기의 서브컬쳐 번역은 자기가 좋아하는 걸 나누는 '공유' 정신에 기반한 것이었다. 팬덤의 규모가 크지 않던 시절 일본어를 어느 정도 독학으로든 정식으로 배우든 했던 사람들이 작품 하나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것을 통해 전업 업계인(장르소설 번역가, 게임 기획자 등)이 되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당시의 그들은 취미의 영역으로 여겼다. 위에서 말했듯 그 시대에 그럭저럭 있는 집 자식들이 굳이 '친일파' '오타쿠' 소리 듣는 문화로 돈을 벌어야겠단 생각을 하는 것도 희한한 일이니 말이다.


몇메가짜리 열악한 동영상을 당시 비싼 모뎀을 밤새 돌리며 받다가 부모님께 등짝을 맞고 몰래 보던 시대에 애니메이션 팬 자막(Fan Subtitle 내지 Fan Caption)이란 게 생겨나고, 90년대 중반 일본 유명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 을 기폭제로 서서히 서브컬쳐의 진입장벽이 낮아지기 시작한다. 이윽고 90년대에 나우누리와 하이텔, 천리안을 위시한 PC통신이 00년대의 고속 인터넷의 등장으로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며 마침내 인터넷 원주민 세대가 팬덤에 진입한다. (내가 바로 이 세대이다) 당시는 일본에서나 한국에서나 서브컬쳐의 르네상스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대작보다 고만고만하고 트렌디한 13화짜리(정확히 91일 한 분기이다) 애니메이션이 성행하기 시작하고, 구세대의 아마추어리즘도 옛말이 되어 가고, 팬덤 역시 변질되고 있었다.


인터넷의 대중화는 서브컬쳐 팬덤에도 영향을 끼쳐 '있는 집의 만화/게임/애니메이션 좋아하는 도련님' 에서 '컴퓨터를 가진 만화/게임/애니 좋아하는 사람들' 로 팬덤의 벡터가 확산되었다. 적어도 '정보 접근성' 의 격차가 확 줄어들었다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기대를 걸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터넷 초기부터 지금까지 골칫거리인 '익명성을 위시한 적나라한 적의 표출' '법망을 교묘히 피한 범죄 행위' 등의 칼바람이 똑같이 사람 모인 동네인 서브컬쳐 팬덤 등지에도 불게 된다. 그리고 세대 갈등도 빈번히 일어났다. 1세대 오타쿠들은 대개 '부잣집 아들' 이었고 따라서 교육 수준은 높았으나 다소 스노비즘적 면모를 보였는데 00년대 중반엔 어느새 이들이 서른을 바라보거나 이미 넘은 연배라 고지식해지고 완고해져서(지금도 쪽발이 운운하는 중장년 세대가 있다는 걸 생각하면 청소년기 당시 이들이 서브컬쳐를 전업 삼거나 향유하는 데 따른 가정 불화가 성격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후발 세대와 소통할 의사를 잘 보이지 않았다.


바통을 넘겨받은 1.5세대 국내 오타쿠들(보통 70년대 후반~80년대 초반생으로 잡는다)은 일본문화를 개방한 김대중 정권이 끝날 무렵 서브컬쳐 팬덤의 핵심이 되어 있었다. 고속인터넷망을 통하여 일본 현지에서 립을 뜬 영상을 손쉽게 와레즈나 웹하드 등지에서 받을 수 있던 상황에 힘입어 자막 제작자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중 '프리시스' '베르커드' '아쓰맨' '피셔' 등이 유명했는데, 마침 개인홈페이지나 블로그 등의 웹서비스도 활성화되던 시기라 웹커뮤니티에서 자신의 ID가 아바타로서 큰 의미를 발휘하게 되고, 전뇌 세계의 구조가 치밀해짐에 따라 여러가지 문제들도 일어나게 되었다.



자막부심.png Image from Unknown Homepage


90년대의 아마추어 번역이 '공유' 를 위한 것이었다면 00년대 이후엔 '명예' 를 위한 번역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나에게 전적 대학을 추천했던 ex-선배이기도 했던 한 자막제작자 형은 '같잖은 현시욕의 발현이지 뭐' 라고 자조적으로 표현했을 정도이다. 슬슬 '듣기' 가 되는 많은 사람들이 번역의 질을 따지기 시작하고, 번역자들은 작업한 애니메이션, 소설, 만화 등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리며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심지어 그를 이용한 권력 행사까지 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당시 한창 저작권의 개념이 인터넷에 퍼지면서 '번역'의 적법성에 대한 담론이 오가던 때라는 것이다. 저작권이 90년대에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당시는 향유 계층도 한정적이었고 대개 직접 구매하여 소비하던 사람들이었기에 담론 자체가 형성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2세대 팬덤이 주축을 이루던 00년대 중반~10년대 중반까지는 셧다운제나 아청법의 강화 등 서브컬쳐를 타겟으로 한 공권력의 탄압도 마각을 드러내고, 오랫동안 누적된 병폐들이 일거에 터지던 때였다. 세대간, 성별간, 소비성향간에 치열하게 싸우는 와중에 '아마추어 번역' 은 '관심받고 싶은 할짓없는 놈이 하는 것' 수준의 인식으로 전락했다. 아마추어 번역에서 아마추어리즘이 거의 완전히 소실된 시기이다.


프로들의 번역도 신통치 않다. 비주류 문화계의 번역이란 것은 처우나 인식이나 굉장히 열악하다. 현업자들 중 대부분은 처음부터 번역을 하려던 사람이 아니었고, 설사 지망하여 된 사람이라도 현실은 남은 의지조차 꺾어버린다. 만화와 장르소설을 위시한 비주류 문화컨텐츠 번역의 헥심은 '속도' 다. 출판사 입장에선 텀을 조절하며 컨텐츠의 질을 보전하기보단 많은 양의 신간들을 동시다발적으로 빠르게 찍어내는게 안전하기 때문이다. 소위 '발번역' 문제가 유독 장르번역계에서 자주 거른되는 이유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현업자가 커뮤니티서 대놓고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일단 원문 문장 하나를 주욱 읽고 보이는대로 대충 완결된 한국어 문장을 만듭니다. 그리고 단어 하나하나를 보며 '틀렸다' 싶은 걸 수정하는 겁니다. 이래야 마감에 맞출 수 있습니다. 이건 제 생계수단이니까요"



서브컬쳐와 번역, 이 둘은 서로에게도 물론이거니와 나에게도 떼어놓을 수 없는 가치였다. 한국에서 유아기 때 좀 어느 방면에서 두각을 보인 아이의 부모들이 으레 그렇듯 나 역시 어머니의 과도한 기대에 따른 오락생활의 숱한 탄압을 겪었다. 게다가 내 상대는 내가 다니던 교회 전체이기도 했다. 소도시의 작은 교회라는 닫힌 사회에서 일본발 서브컬쳐를 향유하는 10대 남자아이는 '신의 이름으로 교화해야 할' 좋은 린치의 대상이다. 그러나 나는 불과 초등학생 때 옆에 앉혀놓고 게임을 가르쳐주던 이웃 형이 어른들의 사주를 받고 철권으로 날 제압하려 했을 때도 영영 소원해질 각오로 맞선 사람이다. 지금도 그 형은 나와 말을 섞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에게 단순히 '한때의 여흥' '한때의 방황' 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그 정도의 가치였다. 그래서 머리가 크며 업계의 처우가 열악함을 수없이 확인하면서도 좀처럼 놓을 수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날 보고 철이 없다고 했다. 세상을 모른다고 했다. 그 말을 부정하지 않는다. 실제로 난 터무니없이 순진했고, 지금도 별반 다를 게 없다. 하지만 지금도 당당히 말할 수 있다. 참고서 대신 일본어 원서를 붙들고 씨름하던 순간들, 야간자습 시간에 숱한 문화컨텐츠 관련 서적들을 읽으며 정말로 내가 원하는 자율학습을 하던 시간들을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왜 통번역과 학생 중 통번역을 업으로 하려는 사람이 나밖에 없냐고 술김에 동기들에게 따지던 순간들을 나는 치기어렸다고 할 지언정 부끄러운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2017.05.03

김 영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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