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4)
…다만 작가님의 모든 작품군에서 공통적으로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작가님이 말하고 싶은 게 뭔지 좀처럼 읽히지 않습니다. 창작자로서의 에고가 느껴지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몇 년 전, 작가님을 연상케 하는 정교하고도 빈틈이 없는 문체의 소설이 인터넷에 올라온 적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때 작가님이 그 작품의 저자와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내 그럴 리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 소설은 읽는 내내 시시각각으로 저자의 강한 의지가 느껴지는, 어떤 의미에선 섬뜩한 기분이 드는 작품이었거든요.
11월 ○일. 기념비적인 독립 첫 날 밤을 센트럴터미널 근처의 찜질방에서 맞고 있다. 침대에서 이불을 덮고 자다가 하루아침에 얇은 매트 한 장만 깔고 자려니 팔과 허벅지가 배긴다. 수면등 아래서 남자들이 잘 자리를 물색하며 옆을 서성거릴 때마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게 된다. 익숙해져야 한다. 안정적인 수입원을 확보하기 전까지는.
12월 ◇일. 주방 아르바이트 보름째. 뼈마디 하나하나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다. 무서운 기세로 밀려들어오는 설거지를 도무지 남들과 비슷한 시간에 끝내지 못하다보니 쉬는 시간에도 혼자 싱크대 앞에서 허리를 숙이고 일했으니 당연한 결과다. 부조리장 오빠가 “아침저녁으로 바르면 좀 낫다”며 약국에서 사온 안티푸라민을 다른 직원들 몰래 건네주었다. 퇴근하려는 걸 홀 매니저님이 붙들더니 온장판 위에 엎어 놓고 파스를 붙여 주셨다.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고 좀 더 버텨 봐야겠다.
1월 □일. 마침내 강미주 작가님의 행방을 알아냈다. 진리연출판사 측은 작가님과 연락이 끊긴 지 오래라 알려줄 수 없다고 해서 학생 기자를 가장하여 작가님이 후기에서 언급한 몇몇 지역의 구청이나 동사무소를 찾아다녔다. 다섯 번째로 방문한 곳의 직원은 지하철역에서 꽤 떨어진 동네를 짚어 주며 내가 제시한 나이와 똑같은 강미주라는 이름의 여성이 살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운 좋게도 티블리 안나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정식으로 채용도 되었겠다, 시간 날 때 동네를 탐색해봐야겠다.
1월 ◇일. 마침내 내 보금자리가 생겼다. 이제 찜질방을 전전하지 않아도 된다. 무엇보다 좋은 건 더 이상 희미한 수면등에 의존해 엎드려 글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다. 집을 나온 지 두어 달 만에 의식주를 어느 정도 해결하게 된 건 내 노력만으로 일군 게 아님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주어진 일상과 환경에 감사하며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내가 진정 쓰고 싶은 걸 깨닫게 되겠지.
2월 ○일. 세계는 언제나 친절한 양태로 다가오지만은 않는다는 사르트르의 말이 생각난다. 내 선배란 작자들은 자기들보다 어리고 몸집도 작은 후배가 똑같은 대우를 받고 일하는 게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지 않나 보다. 이럴 때 기선을 제압하는 법을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그 장소에 미련이 없을 때나 쓰는 제로섬 전략이다. 아직은 더 버틸 수 있다.
3월 □일. 열심히 소설을 쓰고 있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 스스로 이게 재밌는지 모르겠다. 쓸 때도 쓰고 난 뒤에도 재밌었던 건 결국 그 해 여름 언니와 함께 쓴 장편뿐이었다. 요즘은 그보다 가게 사람들 보는 게 재미있다. 두영이 오빠는 가끔은 매니저님 놀리는 낙으로 사는 초등학생 같아 보일 때가 있다. 하지만 매니저님이 씩씩거리며 돌아서면 그 모습을 아련한 눈으로 바라보곤 한다. 저것이 누군가를 연모하는 눈이란 걸까. 나도 사랑을 하게 되면 저런 눈을 하게 되는 걸까.
4월 ◇일. 마침내 강미주 작가님을 만났다. 예상보다 훨씬 젊고 아름다우셔서 적잖이 놀랐다. 그리고 작가님을 그렇게 만든 원흉인 강우주라는 놈도 만났다. 덩치도 산만하고 나이도 먹을 대로 먹은 놈이 일 같지도 않은 일이나 하며 유유자적하는 게 꼴 보기 싫었다. 그런 주제에 내 말꼬리를 잡고 훈계나 하고! 사실은 가게에서 걔가 못 본 사이 씨앗 하나를 슬쩍해 왔는데 본의 아니게 죄책감을 덜었다. 아마 사장한테 적잖이 혼났을 것이다. 어차피 두 번 다시 볼 일도 없을 것이다. 그래, 그러니까 그건 키스도 뭣도 아니다. 전술의 일환이었을 뿐이다.
4월 ○일. 강우주, 도대체 너는 정체가 뭘까? 내가 살면서 본 가장 텅 빈 껍데기 같은 사람이 너인데, 어떻게 너의 손끝에서는 그렇게 풍부한 감정이 나오는 거야? 내가 너를 잘못 본 걸까? 스스로 채워지지 않는 내 갈증을 그저 너에게 투영한 것뿐일까? 무엇보다 왜 자꾸 너 같은 사람을 난 신경 쓰는 걸까?
4월 △일. 우주 씨와 친구가 되었다.
5월 □일. 두렵다. 이전과는 다른 존재가 되어 가는 내가 두렵다. 타성으로라도 쓰던 글도 이젠 더 이상 써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하린 언니의 대시가 마냥 싫지만은 않아 보이는 우주 씨의 태도가 신경 쓰인다는 사실이 두렵다. 그저 친구일 뿐인데. 나보다 열 살은 많고, 어수룩하고, 센스도 엉망이고, 배려심도 없고, 어쩌다가 자상하고, 마음을 편하게 해 주고, 그림을 잘 그리는 친구일 뿐인데. 내가 그런 사람을 남자로서 좋아하게 됐다고? 이건 아무래도 진지하게 재고를 해 봐야 할 이슈다.
5월 ◇일. 너무나 아프다. 몸도 아프지만 그보다도 마음이 아프다. 당신이 나를 여자로서 좋아할 가능성이 낮다는 게, 누구보다도 나와 닮았다고 여긴 당신이 나와는 척 봐도 다른 여자들에게 호감을 사고 또 그를 굳이 밀어내지 않는 모습이 시리도록 아프다. 그래놓고 나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지 마. 혹시 하고 실낱같은 희망을 가져 버리잖아. 내가 적극적으로 당신을 좋아한다고 하면, 이 천둥벌거숭이 유아독존의 화신 태미래가 당신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하면, 당신은 어떻게 할 거야?
5월 ○일. 전할 말이 있어 미리 일기를 씁니다. 강우주 씨. 저는 오늘 당신에게 이별을 통보할 것입니다. 저는 결국 또 다시 누군가에게 지나치게 의존하여 저 자신의 중심을 잃는 과오를 저질렀습니다. 당신이라는 존재의 달콤함은 내가 짊어지고 있는 사명도 약속도 모두 던져버리고 싶게 만듭니다. 만약 당신이 일말의 손길을 베푸는 대신 모든 걸 버리라고 한다면 전 기꺼이 그렇게 할 것입니다. 저는 그저 사랑에 빠진 평범한 소녀로, 아니 가출 소녀로 전락하겠죠. 그래서 전 제 마지막 이성과 의지와 향상심을 짜내어 결심했습니다. 제 멋대로 마음을 전하고, 제 멋대로 사라지겠습니다. 만약… 만약 당신이 나를 기어이 찾아낸다면, 제 모든 걸 당신에게 바치며 살겠습니다. 당신에게는 저를 감당할 책임이 있으니까요.
“…그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삶의 욕망의 이면에는 늘 죽음의 욕망이 있다. 그렇다면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죽고자 하는 마음이야말로 역설적으로 가장 자유로운 생의 의지의 반증이다. 삶을 통해서든, 죽음을 통해서든, 인간은 스스로의 구원의 방향을 선택할 운명을 부여받고 말았다. 선사 시대부터 지금까지 두 욕망은 씨줄과 날줄처럼 서로 엮여 지금의 인간을 이룩해냈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그가 죽든 살든 어떤 식으로든 인간 속에 편입되어 제 역할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