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자리
술을 좋아하지만 기쁘게 즐길 수 없는 술자리
나는 술을 좋아한다. 주종을 가리지않고 다 마시는 편이다. 술을 마시며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도 좋고 말없이 술잔을 부딪히는 것도 좋고, 술을 마시고 저세상 텐션으로 춤을 추는 것도 좋고, 좋은 사람들과 웃고 떠들고 실없는 농담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감정이 고무공처럼 튀어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그런 순간들이 좋다.
혼술도 좋다. 혼자 내가 좋아하는 안주를 만들어서 술과 함께 고즈넉한 밤을 보내는 것도 좋다. 술을 마시고 취기에 글을 쓰는 것도 좋다. 20대 후반에 잡지사 기자를 하면서 유아 교육 현실에 대한 사설을 잠깐 맡았었는데 현실 육아에 대한 경험은 단 1도 없는 미혼 여성이 이상하게 술을 마시면 우리나라 유아 교육 시스템에 대한 안타까움이 어디에서 그렇게 끓어오르는지 밤새 키보드를 두들기면서 원고를 기똥차게 마감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렇게 좋아하던 술을 이젠 예전만큼 많이 마시질 못한다. 당뇨인에게 술은 좋지 않으니까. 가끔 와인 한 잔, 맥주 한 잔 하는 정도. 부어라 마셔라는 다 옛날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문제는 술자리에서 술을 덜 마셔야 한다는 티를 낼 수 없다는 것이다. 술을 마셨다고 해서 바로 쓰러지는 것도 아니고 얼굴이 심각하게 빨개지는 것도 아니고 두드러기가 생기는 것도 아닌데 무슨 변명으로 술을 마다해야 할 것인가. 그럴거면 아예 술자리를 나가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냥 얼굴이 보고싶어서 나왔다고 이야기해볼까. 솔직하게 당뇨라서 술을 많이 못마신다고 해볼까. 술자리 분위기가 이상해지면 어쩌지. 이런저런 생각들로 고민할 때가 많다. 사람들 앞에서 혼자 몸사리는 게 아직도 불편한 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내가 당뇨인이란 걸 아는 사람들과의 술자리에서도 술을 자제한다는 건 말과는 다르게 힘든 일이다.
고민 끝에 한가지 규칙을 정했다. 술자리를 할 때는 1차까지만 마시고 깔끔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좋은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하다보면 중간에 정리하고 헤어지는 게 쉽지 않다. 1차는 2차로 이어지고 2차를 갔다면 3차는 순조롭다. 그 당시에는 좋지만 다음날부터 내가 치뤄야 하는 숙취는 끊임없는 파도처럼 밀려온다. 예전에는 밤새 술을 마셔도 하루 정도 골골대면 금새 컨디션을 회복했는데 이제는 사흘, 나흘이 걸린다. 몸이 확실히 좋지 않다. 충분한 수면과 충분한 수분을 채워주지 않으면 일상 회복이 어렵다. 그래서 이젠 왠만하면 사람들과의 술자리를 자주 만들지 않는다. 정말 오랫동안 마셔야 할 사람들과는 날을 미리 잡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그리고 미리 잡아놓은 날 외에는 즉흥적인 술자리엔 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술자리가 1차에서 끝나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오히려 1차에서 엄청 급하게 많이 마실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점점 술자리가 무서워진다 내 몸이 예전같지 않아서.
나에게 가장 좋은 술은 와인이라는 걸 알게 된 건 1년쯤 되었다. 물론 과일주라서 당도와 칼로리가 높기 때문에 과도하게 마시면 안되지만 와인 모임을 시작하게 되면서 느긋하게 조금씩 음미하면서 적당히 마시는 미학을 알게 됐다. 이상하게 숙취도 별로 없다. 잘 모르는 사람들과 친해지면서 와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품종에 따라 다양한 맛을 내는 와인을 탐구하는 것이 새로운 재미다. 와인을 혼자 집에서 마셔보기도 했는데 혼자 마시면 꼭 와인이 남고, 남은 와인을 보관하기가 쉬운게 아니었다. 한 번 딴 와인은 최대한 빨리 마셔버려야 하는데 한 번 보관하다보면 1주, 2주, 한달 넘게 방치하게 되버려서 차라리 혼자 마시는 것보다는 와인 모임을 선호한다. 여럿이 모이면 다양한 와인들을 조금씩 맛보고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와인모임에서도 역시나 와인을 마시다보면 2차, 3차로 맥주나 소주 등의 다른 주종을 섞어 마시게 될 수가 있는데 그걸 조심해야 한다.
그 날 누군가와 술자리를 하게 되느냐에 따라 처음의 결심과는 다르게 흘러가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일이 많은데 갈대 같은 내 마음을 가장 조심해야 한다. 특히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났다면 1차로 절대 못 끝난다.
술자리는 어쨌든 너무 힘들다. 그 날의 분위기가 나를 어디로 이끌지 모르는 일이다. 그래 그냥 잘 모르는 사람들과의 술자리를 나가지 않는 것이 편할 것 같다.
술자리에서 술을 기쁘게 즐길 수 없는 건 나 혼자만의 고독한 숙제다. 마시면 안되는 건 알지만 마시고 싶은 게 술이고, 1차에서 끝내자는 마음을 다부지게 먹어도 마시다보면 계속 남아있고 싶은 게 술자리다. 당뇨라서 걱정되는 건 잠시일 뿐이고 사람은 망각의 동물인지 포기가 빠른 동물인지 내게 주어진 삶의 무게가 힘겨워질수록 안타깝게도 자꾸 술을 찾게 되는 건 고치기가 힘든 것 같다. 그게 술을 좋아하는 당뇨인의 숙명인 것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