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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Aug 16. 2020

초상(肖像) 박 춘자 13

13화 / 수채화 6

수채화 6


여자는 카푸치노 잔을 들고 베란다로 나간다. 쿠알라처럼 코트 속에 아이를 품은 남자가 빠른 걸음으로 추위를 가르며 지나간다.

여자는 아버지를 생각한다. 땅에 뿌린 대로 땅에서 먹을 것을 대주어 살게 해주고, 하늘에 바친마음 그대로 하늘에서 복을 내려 살게 해 준다는 것 밖에 모르던 아버지. 육체는 땅에 바치고 마음은 하늘에 바치고 그 결과에 감응하며 살다 간 농부 아버지가 여자에게 남겨준 것은 무엇인가. 여자가 받아들일 자세도갖추지 못했을 때 아버지는 춘자(春子)라는 이름 하나 달랑 남겨주고 떠났다. 여자가 머리에 자주 빗질을 하고, 교복 허리를 힘껏 조이던 나이에 여자는 그 이름을 얼마나 수치로 생각하였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여자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춘자를 던져버린 것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촌스럽다고 투정하던 이름 춘자를 다시는 가까이에 접근 못하도록 멀리멀리 던져버리고 여자는 지선(智善)으로다시 태어났다. 지혜 지(智)자에 착할 선(善), 여자는스스로 지선이가 되었다. 열 아홉 나이의 여자는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을 벗어나려고 발버둥쳤지만 아버지의 사상을 벗어날 만큼 영악하지는 못했다. 첫 지자는 자신이 택한 미래요,나중 선자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사상이다.  어머니를 채근하여 호적의 이름까지 바꾸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딸 춘자가 낯선 지선으로 호적까지 바뀐 것을 모른다. 그의 영혼이 하늘로, 그의 육체가 땅속으로 떠난 지 10년이나 지난 후 바뀐 이름이니까.


여자는 겨울의 한 가운데 서있다. 이국의 겨울은 더욱 깊고, 이국의 봄은 더욱 멀다. 여자는 생각한다. 숨쉬는 피붙이들을 다 밀어부치고 이미 숨이 끊어진 죽은 자가 어떻게 더 가까이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발이 있는 자들이 올 수 없는 거리를 발이 없는 자는 단숨에 달려온다. 발이 없는 아버지는 그렇게 알프스를 넘어 툰 호수를 건너 이름을 바꿔버린 여자를 찾아 왔다. 아버지는 여자에게 무어라고 자꾸만 말을 한다. 여자는 온 몸의 세포를 다 열고 아버지의 말을 몸으로 듣는다. 참 신기한 일이다. 산 자가 죽은 자의 얘기를 알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농사꾼인 아버지에게 가장 반가운 건 봄소식이다. 봄이 가까워질수록 쌀자루는 쭈그러져 허깨비처럼 웃목에 흉물로 남아도 농사꾼인 아버지는 봄을 기다렸다. 땅에서 와서 땅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땅만 파고 살았던 아버지가 고를 수 있는 가장 좋은 글자는 봄이었다. 아버지는 굳이 글자로서의 봄을 고른 것도 아니었다. 봄<春>은 글자가 되기 이전에 아버지의 몸에 봄으로 달라붙어 있는 감각이었고, 늘 노래로 입에 담겨 있던 말이었다. 그런 아버지에게 다가온 귀한 한 생명은 춘자(春子)일 수밖에 없었다.


여자는 생각한다.  아버지가 자신의 이름을 지은 것에 이렇게 별다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 거라고. 여자의 이름이 춘자가 된 것은 아버지의 무의식의 세계에서 튕겨져 나온 본능일 거라고. 핏줄과 봄, 그런 순서로 춘자는 자연스럽게 박춘자가 된 것이라고. 핏줄이라는 본능이 여자를 재빠르게 스치고 지나간다. 그 본능이 번쩍 눈을 뜸과 동시에 전화벨이 방금 탯줄을 끊은 아이처럼 억세게 울어댄다.


여자는 조심스럽게 수화기를 잡는다. 침묵을 깬 소리에 대한 두려움이다.

“여보, 거기 있었지?”

여자는 준호의 목소리를 듣는다. 색깔로 그릴 수 없는 그의 목소리를 느낀다.

“유정이가 방금 아이를 낳았어.  예쁜 공주님이야.”  

가물가물하던 심장이 전기 충격요법으로 다시 맥을 잇는 것처럼 여자의 몸은 번쩍 깨어난다. 다시 돌기 시작한 피는 삽시간에 온몸을 휘돌고 여자는재빠르게 반응한다.

“아니, 아직 한 달이나 남았는데 웬 일이에요?”  

아침에 출근한 남편, 갓 헤어진 남편이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전화를 걸었을 때처럼 둘이는 얘기를 주고받는다.

“진정해요. 애는 이 점 삼 킬로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그래도 우선은 인큐베이터에 넣었어.  유정이도 건강해요. 아주 명랑하다구. 글쎄 그 애가 뭐랬는지 알아? 엄마 돌아오면 낳을려구 했는데 어떡하나 그러더라구. 영식이도 싱글벙글이야. 그 애들을 보는 내 기분은 말이야, 이제 내가 꼼짝없이 어른이 됐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지, 우리유정이가 태어났을 때 나는 어른이 된 줄 알았거든. 근데 이제 생각하니 그게 아니네, 이제야 어른이 된 기분이라니까.”  

마주 앉아서 하는 듯한 준호의 말소리가 여자의 귀를 열고 내부 깊은 곳까지 밀고 들어온다. 여자는 그의 목소리에서 옛날 남자친구를 느낀다.


귓바퀴에서 맴돌고 있는 지선의 다감한 말소리를 가슴 속으로 끌어다 놓으며 준호는 전화기 옆에 있는 메모지에 시를 쓴다. 잊고 지냈던 아주 오래 전의 습관이다.


 

<아내>


사월

도서관 비탈길에 핀

자목련 같은

내 아내


아내는

묻지 않고도 알고

듣지 않고도 알고

그 긴 겨울의 추위를

꽃잎으로 얘기한다.


자목련은 그 자리에 그냥 서 있으면서

내가 묻혀온 먼지만으로도

해 길어지는 하루의 얘기를 다 안다.


자목련이 있어 좋다.


그 자리에 그냥 있어도

는 그 냄새만 맡고도

찾아갈 수 있다.


어느 날

나도

그 옆에 심겨져 있는 나무이기를.

그런 꿈을

가지고 있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여자의 손이 허둥댄다. 바쁘다. 벽에 걸린 커다란 달력을 내린다. 그 갈피에 여기 와서 그린 자화상을 끼어넣고 큰 바퀴로 둘둘 만다. 짐을 챙긴다. 비행사에 전화를 건다. 서울에 가장 빨리 갈 수있는 쥬리히 출발의 비행기를 예약한다. 여자는 밖으로 나간다. 기차역을 향해 겅중겅중 뛰다시피 언덕을 오른다. 내일 새벽에 쥬리히로 떠나는 기차표를 산다. 기차표를 든 여자는 융 프라우 요크 쪽으로 시선을 옮긴다. 산은 아직도 구름을 거느리고 있다. 그러나 여자는 안다. 그 구름 너머에 금빛으로 빛나는 해가 숨어 있다는 것을.


여자는 생각한다. 이국의 겨울은 깊다. 고향엔 겨울이 끝나가고 있다. 이국의 봄은 멀다. 고향엔 봄이 다가온다. 여자는 봄으로 뛰어간다. 누구보다 먼저 일찍 봄을 만난다. 봄으로 달려가는 여자의 손엔 둥글게 만 달력이 릴레이 선수의 바통처럼 들려있다. 그 속엔 여자의 자화상이 들어있다. 그 자화상에 여자는 제목을 붙인다. <초상, 박춘자> 툰 호수에 눈이 내린다. 봄을 향해 달려가는 여자의 눈에 눈발이 보인다. 은빛으로 반짝이며 뿌리는 봄의 색깔이 여자의 눈에 들어 온다. 여자는 생각한다. 옛날 남자친구의 시를. ‘눈은 네 속눈썹 위에 축복처럼 내린다’고 준호는 시를 읊었었다. 호수 위엔 아직도 축복처럼 눈이 내리고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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