칫솔

관계와 인연에 대한 탐구 9

by morgen


칫솔


기다린다는 것.

많은 추상적인 것들이, 구체화되는 과정이 바로 우리가 기다리는 시간이기도 한데 우리가 기다려왔던 것은 얼마나 이루어졌고, 우리를 만족시켰을까?


나도 늘 기다림의 길 위에 서있다.

미래, 꿈, 희망, 소원....

이런 추상적인 단어를 붙들고 있는 시간도 많지만 맛난 먹을 것, 가지고 싶은 것, 보고싶은 것, 이런 구체적인, 현실적인 것들을 기다리는 경우도 많다.


우리집 목욕탕에 있는 칫솔을 찍어보았다.

양쪽 목욕탕에 꽂혀있는 칫솔들

이렇게 정돈되어 있지 않고 컵 속에 빡빡하게 꽂혀있을 때도 많았는데 이제는 깔끔히 정리한 상태로 유지되고 있다. 드나드는 사람들도 줄었고, 손주들도 제 것들을 스스로 찾아 정리하니까 한 번 정리해두면 그대로 유지된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자고가곤 하였다. 자고 간 사람들은 당연히 칫솔을 사용한다.

그전에는 하루라도 묵고 간 사람들이 사용한 칫솔들을 바로 버리지 못해 컵에 꽂아둔 채로 여러 날, 여러 달, 어떤 것은 일년이 넘도록 묵혀두고 있었다. 가끔 버리기라도 하면 그 다음에 잘 때는 또 새 것을 주고, 다시 꽂아두고..... 컵에 칫솔이 가득한 모습이 지저분하다고 어머니에게 듣기 싫은 소리도 여러 번 들었지만 나는 칫솔을 쉽게 버리지 못했다.


이제 아들의 친구, 딸의 친구가 사용했던 칫솔은 다 버렸다.

아들 딸이 다 독립하였으니 그 친구들이 우리 집에 와서 잘 일도 없어진 것이다.

이제 우리 목욕탕에 보관된 칫솔은 가족들 것 뿐이다. 아들 딸 며느리 사위 외손녀 친손녀, 그리고 외손자.

칫솔의 임자들은 자기들이 자고 이 닦을 때만 이 칫솔을 만지지만 나는 내 칫솔을 뽑을 때마다 함께 걸려있는 다른 칫솔들을 한번씩 바라본다.

손녀의 예쁜 어린이 칫솔은 빙그레 미소를 짓게 만들기도 하고, 아이였었는데 부모가 된, 그러나 내겐 아직도 내 아이인 아들 딸 며느리 사위의 칫솔이 눈에 들어오면 그들을 위해 빠른 화살기도를 쏘아 올리기도 한다.


그냥....

참 하찮은 칫솔이, 별것도 아닌 칫솔이, 어느 날은 눈에 크게 들어올 때가 있고, 어느 날은 슬쩍 지나칠 때가 있고. 이 마음은 무엇일까?


남편과 나 두 식구가 살고있는 우리집 목욕탕에 칫솔만 많은 것은 아니다. 남자들의 면도기도 여러 개, 어린이용 목욕세제도 다 구비되어 있다. 약장엔 어린이용 응급 약제들이 육아 가정보다 더 꼼꼼히 준비되어 있다. 아이들이 주로 휴일에 오기 때문에 큰 일이 아니면 병원에 가지 않으니까 상비약이 있어야 한다. 마치 팬시용품처럼 각종 디자인의 반창고는 필수다. 한 아이가 아주 살짝 다쳐서 반창고를 붙이면 안 다친 아이들까지도 너도나도 다 제각각 고른 반창고를 괜히 따라 붙인다. 아이들이란 참...!


얼마전에 여름 휴가를 마치 원시부족처럼 함께 모여 지냈다. 그야말로 동고동락이다. 불편함이 많았지만 불평없이 함께 부대꼈고, 웃음소리는 너무 커서 이웃을 생각하여 통제해야 했다. 코로나 때문에 아이들은 놀이터의 놀이기구도 못 만진 채 학교 운동장에서 뜀박질만 했다. 지금 상태로 간다면 아마 추석에도 그리 지내야 할 것 같다.


이제 추석이 다가온다. 우리 가족들은 또 몰려올 것이다. 그 움직임이 파도라면 나는 파도타기를 즐기는 사람이다. 얼마든지 밀려오거라. 나는 즐길 준비가 되어 있단디. 이 나이 되도록 견뎌낸 파도가 아니겠느냐. 무서워서 도망가고 싶었던 기억도 많고, 즐거워서 머무르고 싶었던 기억은 그보다 더 많은 파도타기. 큰 파도 하나를 넘겼으니 이제 새로 오는 파도를 즐길 것이다.


봄마다 사람들은 시인이 되어 “4월은 잔인한 달”에 맞춰 그 뒤의 시를 이어가곤 한다. 아마도 이번 추석엔 "잔인한 가을"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어쨌든 기다려보자.

요즘 출하된 사과를 사먹으며, 빨간 햇고추를 판매하는 것을 보며, 계절은 우리들의 걱정과 달리 제 할 일을 다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러나, 매일 전시의 공습사이렌 소리처럼 전화기를 울리는 재난경보를 들으며 지내는 이 여름의 끝에 어떤 가을이 올지 걱정은 걱정이다.

우리들의 발걸음을 제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맛난 명절 음식을 먹게 될 것이다. 지역간 이동이 위험하다고 자제하라는 경고가 있으면 물론 우리 가족은 당연히 그에 따를 것이다.

이러한 상황과 관계없이 나는 목욕탕에 걸려있는 칫솔을 바라보며 그 칫솔 임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세상 모든 어머니들의 집에는 이렇게 칫솔이 가지런히 꽂혀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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