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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Feb 22. 2021

아버지같은 숙부님

아버지같은 숙부님


어떤 사람이 부친상을 당했다고 조의금을 받았는데 사실은 숙부상이었다는 뉴스를 봤다. 그 사람의 변명은 “정말 아버지 같은 숙부님이셔서 그랬다.”는 것이다. 이 어이없는 뉴스가 내게 “아버지같은 숙부님”을 생각하게 하는 엉뚱한 계기가 되었다.



살면서 가끔은 숙부님 생각을 한다. 아버지의 동생이지만 내겐, 우리 삼 남매에겐 아버지였다.

그 분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늘 느끼며 그 큰 사랑만큼 행복해지려고 노력하며 살아왔다. ‘나는 행복해야 된다’고 주문을 외우며 살아왔다. 그건 나를 거둬주시고 아껴주신 여러 어른들께 대한 나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한 사람이 일생을 큰 탈없이 사는 것은 그 주변의 여러 사람들이 그가 행복하기를 비는 염원 때문일 것이다. 내가 잘 되기를 바라는 주변 사람들의 애정어린 시선을 끊임없이 느끼며 나는 내 삶을 제대로 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안 계셨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살았다. 연민의 대상으로 동정을 받던 순간들도 있었겠지만 그런 단어의 구별이 필요없이 모두가 다 사랑이었다고 믿는다. 숙부모님, 여러 고모님들, 외가의 어른들, 모두들 제각기 내 아버지의 몫을 떠맡아 나를 보살피셨다. 돌아가신 아버지께는 죄송한 얘기지만, 그 여러 가족들 한 사람 한 사람 사랑의 몫이 아버지의 몫과 똑 같은 분량이어서 그 모두를 합하면 오히려 아버지 한 사람의 몫보다 훨씬 더 많았다.


지금 내 나이보다 몇 십 년은 더 어린, 40대 문턱에 선 숙부님은 두 가정의 가장이 되셨다. 생각해보니 지금 내 자식들의 나이쯤이었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숙부님께서 우리를 맡으실 결심에 숙모님은 어떻게 순응하셨는지…

자신의 자녀 다섯 명에 형의 자녀 삼 남매, 이렇게 여덟 명의 아이들을 다 품을 만큼 숙부님의 품은 넓고 깊고 컸다. 혼자 품기엔 버거운 부피와 무게를 숙모님은 기꺼이 함께 거들어 주셨다. 한참 민감한 사춘기 나이에서부터 인생의 내리막 고갯길에 선 지금까지, 맹세코, 단 한 번도 사촌들과 우리를 차별 대우했다는 느낌은 없다. 큰 오빠부터 작은 오빠가 성년이 되어 독립해 나가고 막내인 나도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독립했다. 어머니와 내가 기거할 전세집을 서울에 얻어주셨다. 세상 누구보다도 훨씬 더 많은 사랑의 빚을 진 내가 그 빚갚음에는 참 게을렀다. 회한의 눈물이 돋는다. 빚을 갚는 일이 별다른 것도 아니었는데, 그저 얼굴 몇 번 더 보여드리면 되는 것이었는데, 그것 하나를 제대로 못하고 살아왔다. 이제 눈물을 쏟은 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남들에게서 이득을 취하기보다는 늘 손해만 보시던 그 분, 그러면서도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바르게 사셨던 그 분, 공부를 많이 하시진 못했지만 우리에게 인생을 가르치시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으셨던 분, 나는 숙부님의 가르침을 늘 생각하며 살았다. 그 가르침이란 게 무슨 텍스트가 있어서 끼고 앉아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자세한 설명으로 가르치신 것은 아니었지만 무엇보다도 값진 가르침이었다.


사업에 실패하는 바람에 우리 모두의 추억이 어린 큰집을 팔고 그보다 작은 집으로 이사해 어렵게 살던 때 이런 일이 있었다. 아침에 자고 나와보니 밤새 누군가가 마루에 쌀가마니를 갖다 놓았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사람이 그런 일을 한 것은 바로 숙부님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오셨는지를 증명해주는 척도다.

어느 분이신지 그 분은 우리에게 단순히 쌀을 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방향을 제시해주셨다. 물론 그것은 다 숙부님 자신이 뿌리신 씨앗이 싹을 틔운 것이다. 그일과 더불어 또 한 가지 잊지못할 교훈이 있다.

내 남편은 대학을 졸업하기 전, 군 제대 후 복학생으로 결혼했다. 가난한 연인이었던 우리가 결혼을 할 때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 있었다. 아버지의 친구, 나는 전혀 알지도 못하는 우리 아버지의 친구가 신랑의 예복을 해주셨다. 큰 고모님과는 왕래하는 사이였다고 한다.

옛날에 그 분의 아내가 폐병으로 돌아가셨을 때 모두들 그 몹쓸 병에 전염될까봐 가까이 안했는데 우리 아버지가 그 장례를 도맡아 치르셨단다. 내가 결혼할 때는 그로부터 적어도 30여년은 지나서였는데, 아버지의 친구 분은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친구의 사윗감에게 예복을 해주신 것이다. 아버지는 30여년 후 당신의 자식이 그 값을 받으려니 하는 생각은 전혀 안하셨을 것이다. 다만 상을 당한 친구를 도왔을 뿐, 무슨 계산이 있었던 건 아닐 것이다.

이것이 얼굴도 못 본 아버지께서 내게 가르쳐준 세상이다. 우리 아버지 형제, 아버님과 숙부님은 ‘세상은 이런 것’이라고 실천으로 가르쳐주셨고, 나는 ‘세상은 그런 것’이라고 믿으며 살아왔다.


어찌 숙부님께 대한 고마움만 있겠는가. 숙모님의 고마움도 결코 잊을수 없다. 내가 중,고등학교 때 식구는 예사로 열댓 명씩은 됐었는데, 그 살림을 어찌 다 감당해 내셨는지 그저 경이로울 뿐이다. 어머니와 우리 삼 남매, 숙부모님과 사촌 5남매, 게다가 시골에서 유학온 일가친척들의 자식들, 늘 들끓는 객식구들, 그렇게 많은 식구들을 감당해내셨다. 숙모님은 여자인 나를 더 많이 일시키지도 않았고, 오히려 남자들이라도 사촌들이 더 많은 일을 했다.

남새밭에서 갓 뜯어낸 아욱으로 된장국을 참 맛있게도 끓이셨던 숙모님, 나는 몸이 안 좋을 때면 으레 숙모님의 손맛이 스며든 반찬들이 먹고싶어진다.


남편을 잃은 젊디젊은 어머니는 서울에서 ㅇㅇ미용기술학교를 다니셨고, K읍(지금은 시)에 미장원을 개원했었다. 1950년대 후반이다. 숙부님은 어머니의 미장원에 두 세 번 들르셨었는데 그때마다 다방레지(그시절엔 이렇게 불렀다) 손님들이 있었다고 한다. 숙부님은 형수(나의 어머니)가 어울리지도 않는 손님들 사이에서 참 고생한다고 생각하셨단다. 형수를 너무너무 아끼시던 숙부님은 우리 어머니가 미장원을 하지 못하도록 하셨다. 잠시잠깐 운영하시던 미장원 문을 닫은 이후에 어머니는 평생토록 아무 직업도 가지지 않으셨다. 숙부님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했고, 우리들이 장성해서는 우리가 어머니의 보호자가 되었다.


시간은 어느 순간 뚝 짤라져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수많은 시각과 시각들이 점철된 시간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서로 연결고리에 매어있다. 내가 지나온 시간들은 내가 살아갈 시간들을 서로 탄탄히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 숙부모님과 함께 했던 시간들은 숙부님 곁을 떠난 나의 시간까지도 연결되어 있었다.

나의 결혼 생활은 늘 시동기간들과 함께 사는 생활이었다. 가끔은 불편한 일도 있었지만 그 때마다 숙모님 생각이 나곤 했다. 큰집 작은집 한데 모여살던 그 큰 살림, 늘 객식구들로 북적대던 생활, 그런 기억은 내게 생활의 불평불만을 잘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줬다. 막내딸인 내가 동기간이 8남매나 되는 시집 생활을 별탈없이 하고 있는 것도 어릴 때 숙부님댁에서 살았던 경험 때문일 것이다.

넓고 깊고 따뜻한 숙부님, 감히 그 언저리에도 못미치지만 그래도 조금은 닮아야겠다는 생각이 나의 삶을 이끌어왔다. 참 신기하게도 서운했던 기억이 전혀 없다.

요즘 세태에 비춰보면 이건 정말 기적같은 일이다. 아버지 없는 사춘기 여자 아이가 작은 아버지 집에서 살았으면서 서운했던 기억이 전혀 없다니! 글쓰기의 포장 아닌가? 그런데 정말 나는 친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의 차이를 전혀 모른다. 마찬가지로 친엄마와 작은 엄마의 차이도 모른다.


숙부모님과 우리 어머니는 같은 묘역 잔디밭에, 큰 오빠는 같은 곳 납골당 안에서 영면중이시다. 내가 숙부님께 갚아야 할 빚이 얼마나 큰가. 이제 할 수 있는 것은 겨우 무덤에 꽃다발이나 가져다 두는 것 뿐이다. 그런데 이것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 성묘를 가면 언제나 사촌 오빠가 나보다 한 발 앞서 새로운 꽃으로 바꿔놓고 간다. 숙부모님 무덤이야 당연히 아들이 단장한다 치더라도 꼭 우리 어머니 무덤의 꽃까지 챙기는 사촌 오빠이다.

큰 오빠가 돌아가신 이후로 사촌오빠는 가끔 우리 큰 올케를 모시고 다니며 드라이브를 시켜주고 맛있는 것을 사준다. 사촌 형수를 계속 챙겨준다. 남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우리 가족들에게 흐르는 시간의 연속성이다. 숙모님은 늘 우리 큰 오빠를 첫 번째 아들로 여기셨는데 그 시절의 시간이 지금까지 이어져서 사촌오빠가 우리 큰 올케를 집안 첫 아들의 아내로 대접하는 것이다.


개인사, 일기장을 들춰보며 추억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나누고싶은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메마른 이 시대에 이런 희귀종(?)들이 살고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단 한 사람이라도 이야기의 온기를 나눠 가지면 좋겠다.



이번에는 한식날까지 기다리지 않고 사촌 오빠보다 내가 먼저 숙부모님과 우리 어머니 묘소에 꽃을 가져다 놓아야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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