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rgen Nov 16. 2021

김홍도 <우물가>, 외젠 드 블라스 <연애>

조선과 서양의 풍속화

<조선과 서양의 풍속화, 시대의 거울>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이곳엔 글의 일부만 남기고 많은 부분을 삭제합니다. 이해를 바랍니다. 


2021년 4월29일, 경주 동부사적지대(발천) 발굴조사 현장공개가 있었다. 발천의 새로운 수로가 발견된 것이다. 발천撥川은 경주 동궁과 월지에서 월성 북쪽과 계림을 지나 남천에 흐르는 하천이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왕비 알영의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곳이다.

알영부인은 기원전 53년 경주 알영정閼英井에서 태어났다(『삼국유사』 「기이1편」권1). 한 나라의 시조와 물(천川/ 정井/ 천泉)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나주의 완사천浣紗泉은 고려의 태조 왕건과 장화왕후 오씨의 사연을 담고있다. 고려 태조(왕건王建 877-943)에 관한 이야기로, 또 조선 태조(이성계李成桂 1335-1408)에 관한 이야기로 많이 알고 있는 ‘버들잎’ 이야기이다. 

왕건이 목을 축이려고 한 여인에게 물을 청했는데 그 여인이 우물물 한 그릇에 버들잎을 띄워줬다는 이야기. 갈증이 심한데 급히 물을 마시면 체할까봐 버들잎을 불어가며 천천히 마시라는 의미였다. 이 지혜로운 여인이 바로 장화왕후 오씨였다. 서울에 ‘정릉 버들잎 축제’ 행사도 있는데, 조선의 태조 이성계와 신덕왕후의 만남을 기억하는 축제이다. 이성계와 신덕왕후의 만남은 왕건과 장화왕후의 인연과 똑같다. 버들잎을 띄운 여인 강씨는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이 되었고, 조선이 건국된 후 첫 번째 왕비인 신덕왕후가 되었다. 왕비가 되고싶은 처녀들은 이제 우물가로 나가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를 지난 수 백년 후에는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 처녀 바람났네(1955천봉 작사, 한복남 작곡)”라는 노래가 있었다. 우물가는 남녀간에 무언가 이루어지는 명당인가? 지금은 옛날과 같은 공동우물이 없다. 옛 ‘우물가’는 오늘날 약수터가 된 것같다.   ‘처녀’라는 단어는 낯설고 나이의 한계도 다 없어진 오늘날, 등산길 약수터에는 갈증을 달래고자 하는 남녀들이 모여든다. 버들잎 대신 낯선 허브 잎 하나 띄워서 건네주면 무슨 잎인지 물어보는 것으로 시작한 대화는 어떻게 발전해나갈지 상상해본다.

 박지원朴趾源(1737-1805)의 『연암집11권』 「열하일기」 갑술 6월27일, <도강록渡江錄>에는 이용후생설利用厚生設을 기록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박지원이 압록강을 건너 중국땅을 밟은 후 우물가에서 쉬면서 목을 축이는데 도르래가 있는 우물을 보았다. 벽돌로 쌓은 우물에 도르래가 오르내릴 구멍만 남겨두고 뚜껑을 덮은 것을 보고 감탄한 기록이다. 

이는 사람이 빠지는 것과 먼지가 들어감을 막기 위함이었고, 또 물의 본성이 음(陰)하기 때문에 태양을 가려서 활수(活水)를 기르는 것이다. 우물 뚜껑 위엔 녹로轆轤를 만들어 양쪽으로 줄 두 가닥이 드리워져 있고, 버들가지를 걸어서 둥근 그릇을 만들었는데, 그 모양이 바가지 같으나 비교적 깊어서 한 편이 오르면 한 편이 내려가서 종일토록 물을 길어도 사람 힘을 허비하지 않게 된다. 물통은 모두 쇠로 테를 두르고 조그마한 못을 촘촘히 박은 것이다. 대나무로 만든 것은 오래 지나면 썩어서 끊어지기도 하려니와 통이 마르면 대나무 테가 저절로 헐거워서 벗겨지므로 이렇게 쇠 테로 메우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1

우물에 대한 기록은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고, 사람이 주거지를 정할 때도 물 공급을 우선했기 때문이다. 홍만선洪萬選(1643-1715)의 『산림경제』 권1 <우물>에는 어느 땅에 우물을 파야하는지 친절하게 적혀있다. 구리로 만든 동이를 밤에 땅위에 엎어놓고 하룻밤이 지난 다음날 관찰하여 이슬이 많이 맺힌 곳을 파면 반드시 좋은 우물이 된다는 것이다. 2


그림은 우물을 어떤 모습으로 그렸을까? 풍속화에서 찾아본다.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search/view?relicId=540 

김홍도 <우물가> 《단원풍속도첩》 18세기후반. 종이에 수묵담채, 28.1×23.9cm. 보물 제527호  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의 다른 풍속화들도 그렇듯이 <우물가>도 인물중심의 그림이다. 우물은 둥글고, 둥근 것에 모인 사람들을 배열하자면 등을 보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얼굴 표정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단원은 등장인물들의 표정을 다 보이도록 구성했다. 등돌린 사람은 없다.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흐르는 사선구도에, 왼쪽 아래 구석을 과감히 잘린 모습으로 완성했다. 그 부분이 없어도 이야기 한 편은 완성되는 놀라운 구도이다. 

상형문자인 중국의 우물은 ‘정井’으로 네모진 우물을 묘사한다. 조선의 우물은 그림속에 대부분 둥근 모습으로 그려졌다. 신윤복申潤福(1758-1814?)의 <정변야화井邊夜話>(간송미술관소장)에 있는 우물도 둥글다. 굳이 네모진 것을 찾자면 독일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이 소장한 김준근金俊根(생몰년 미상)의 <물 긷기>가 사각형의 우물이다. 


종이책 출간으로 설명의 일부를 삭제함.


https://artvee.com/dl/flirtation#00 

유진 드 블라스Eugen de Blaas <연애/추파 Flirtation1894. 캔버스에 유채, 105.4 x132.1cm. 개인소장.


중세 때는 종교적 순례가 여행의 주목적이었다. 자신의 종교에 따라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의 성지를 순례하는 것이다. 17,18세기에는 ‘그랜드 투어’가 유럽의 상류층에서 유행했다. 르네상스의 건축과 예술을 공부하려고 그리스와 로마로, 고급 예법을 익히기 위해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19세기에는 새롭게 형성된 중산층까지 관광과 휴양을 위한 여행을 했다. 국제여행은 더 이상 귀족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여행을 하며 생활양식의 교류가 활발해졌다. 특히 베네치아는 인기있는 도시였다. 물 위에 세운 도시에 사람들의 관심이 쏠렸고, 관광객들의 구매 욕구에 따라 예술가들은 그곳 주민들의 일상생활을 작품의 주제로 삼았다.

 이 그림은 우물가 풍경을 그린 것이다. 물의 도시 베네치아에는 목조건물이 아닌 석조건물이 세워졌다. 어느 그림이든지 배경은 석조건물이다. 우물의 입구를 보호하는 구조물인 베라 다 포초(Vera da pozzo 대리석 장식으로 덮인 베네치아 지하 수조의 가장자리) 주위에 세 명의 여인들과 한 명의 남성이 모여있다. 김홍도의 <우물가>와 등장인물이 같은 네 명으로 구성됐다. 여자 셋과 남자 하나까지 같다. 

남자가 등장한 장면에서 조선과 서양의 여인네들 모습은 확연히 다르다. 남자를 바라보는 눈빛이 누구보다 더 관심을 끌고자하는 표정이다. 베라 다 포초는 수로가 건설되기 이전 베네치아 공화국에 식수를 공급하는 필수적인 공공 시설이었다. 부유층에서 도시에 우물을 기증했다. 여자들은 마실 물을 긷기 위해 가져온 구리 냄비를 내려놓고 즐거운 휴식 시간을 보내고 있다. 접근하는 남성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빤히 바라본다. 손에 든 꽃을 뒤로 숨기고 접근하는 맨발의 남성은 누구일까? 구혼자일까? 뒷모습만 보이는 그의 표정은 알 수 없지만, 벌린 다리의 간격과 약간 뒤로 젖힌 허리의 모습을 보니 아주 당당한 자세로 버티고 서있는 모습이다. 구혼에 성공할 자신감이 보인다. 저 꽃 한 송이를 받을 여인은 과연 누구일까? 

살짝 노출된 눈과 얼굴의 각도로 보아 앉아있는 여인에게 눈길을 준 것 같은데 과연 빨간 스타킹을 신은 그 여인은 꽃을 받았을까?


https://artvee.com/dl/no-love-without-envy/ 

유진 드 블라스Eugen de Blaas <질투없는 사랑은 없다. No Love Without Envy.1901. 캔버스에 유채, 103.5x123.5 cm. 개인소장.


<질투없는 사랑은 없다.>는 거의 70년 동안 영국 가족 컬렉션에서 대중의 눈에 띄지 않게 숨겨져 있었다. 베네치아의 안뜰과 운하를 따라 구성된 유진 블라스의 많은 그림들과 같은 맥락이다.

우물가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맨발의 남자가 오렌지 장사에게 작업을 거는 모습을 세 명의 여성이 관찰하고 있다. (아니뭐야우리한테 왔던  남자잖아 남자는 매일 여자 꼬실 생각만 하고 사나한심한……)  여자들은 슬쩍 분개하는 마음이다 마음 들키지 않으려고 표정관리를 하면서

블라스는 이 그림처럼 꽃, 밝은 색상의 과일, 오래된 구리 주전자를 포함하여 그의 그림에 일상적인 소품을 추가하는 것을 즐겼다. 무대가 베네치아일 경우엔 배경으로 석조건물을 그렸다. 그림 속 남자의 구애 노력은 과연 통했을까? 화가는 그 결과를 감상자가 완성할 몫으로 남겨둔다.

 

우물가는 조선 여인들에게 일종의 해방구 역할을 했다. 여인들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곳, 어쩌다 남자 구경도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우물가였다. 빨래터도 여인들에게 자유로운 장소였다. 부분이나마 몸을 드러내고 시원하게 씻을 수 있는 곳이 빨래터였다. 때문에 남자들은 오히려 여인들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훔쳐보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었다. 우물가에서는 가까이 접근하여 대화도 할 수 있었다. 남자들은 어느 쪽을 더 선호할지 궁금하다. 살짝 벗은 몸을 멀리 숨어서 훔쳐보는 빨래터? 또는 직접 대화를 할 수 있는 우물가?

서양의 우물가 그림과 비교해보자. 제목부터 조선과 서양의 다름을 드러낸다. 그림 제목을 “우물가”라고 하면 우리는 우물가가 상징하는 모든 정황들을 상상한다. 서양 그림의 제목은 아주 구체적이다. 무대가 우물가일 뿐, 그림 제목으로는 등장하지 않는다. 우물가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그림에서도 확실히 묘사하고, 제목은 행동 자체를 묘사한다. “추파”라거나 “질투없는 사랑은 없다.”고 확실히 알려준다. 조선과 서양 문화의 차이이다. 

 

작가소개

유진 드 블라스(Eugen von Blaas/Eugene de Blaas 1843.07.24 이탈리아 알바노라치알레 출생, 1932.02.10 이탈리아 베네치아 사망)는 화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오스트리아 출생인 아버지 칼 폰 블라스 Karl von Blaas는 후기 비더마이어 시대(Biedermeier   1815-1848중부 유럽 시대,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비엔나 회의 때부터 시작, 1848 년 유럽 혁명의 시작과 함께 끝남)의 역사, 초상화, 프레스코화의 화가로 로마 사회에서 주목받았다.

유진 블라스는 대부분의 삶을 이탈리아에서 보냈다. 형 율리우스 폰 블라스Julius von Blaas와 함께 아버지에게서 그림 지도를 받으며 견습 기간을 보냈다. 베네치아와 로마의 아카데미에서 공부했고,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를 여행하며 그림을 연구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유진 블라스는 나중에 베네치아 예술 아카데미(Accademia di Belle Arti di Venezia)의 교수가 되어 베네치아에서 살았다. 베네치아 거리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만의 독특한 장르 페인팅(Genre-painting 풍속화)을 그렸고, 사람들은 그를 풍속화의 선구자로 여겼다.

풍속화의 정확한 기술과 밝은 색감은 베네치아 회화 전통과 잘 조화된다. 그의 풍속화는 도시를 방문하는 부유한 여행자와 관광객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부유한 베네치아 방문객은 도시의 운하와 삶에 대한 감각을 원했고, 시장에 작품을 공급하기 위해 예술가 학교가 발전했다.

그의 많은 초상화의 초점은 종종 젊은 여성과 소녀들이다. 거리에서 나누는 대화나 연인과의 구애 등 이탈리아 젊은이들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포착하기 위해 노력했다. 친밀한 안뜰과 소박한 뒷골목으로 이루어진 고대 석조 건물 사이에서 베네치아 시민들의 일상을 포착했다. 미소짓고 수다떨고 시시덕거리는 여인들을 힐끔 본 순간을 사진처럼 묘사했다.

유진 블라스는 1875-1891년 런던 왕립 아카데미에서 그림을 전시했다. 또한 베를린, 뮌헨, 비엔나, 함부르크 및 파리를 포함한 도시에서 많은 국제 전시회에 참여했다. 유럽에서 가장 큰 경매시장인 도로테움Dorotheum은 수많은 경매에서 유진 블라스의 작품에 대한 최고 가격을 달성했다.


낯선 말 풀이

녹로轆轤         - 활차 

활차滑車         - 도르래를 이용하여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 데 쓰이던 기구.

철릭             - 무관이 입던 공복. 허리에 주름이 잡히고 큰 소매가 달렸는데, 당상관은 남색이고 당하관은 분홍색이다.

융복             - 철릭과 주립으로 된 옛 군복. 무신이 입었으며, 문신도 전쟁이 일어났을 때나 임금을 호종할 때에는 입었다.

호종扈從         - 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하여 따르던 일. 또는 그럼 사람.


1 http://db.itkc.or.kr/inLink?DCI=ITKC_MO_0568A_0110_010_0010_2005_A252_XML 

2 http://db.itkc.or.kr/inLink?DCI=ITKC_GO_1298A_0020_020_0060_2004_001_XML  



이전 02화 김홍도 <벼타작>, 랄프 헤들리 <타작마당>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