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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Nov 10. 2021

김홍도 <벼타작>, 랄프 헤들리 <타작마당>

조선과 서양의 풍속화

<조선과 서양의 풍속화, 시대의 거울>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이곳엔 글의 일부만 남기고 많은 부분을 삭제합니다. 이해를 바랍니다. 



여기저기서 가을 노래가 출렁인다. 청량한 음색에서부터 바닥을 훑는 저음까지 가을 노래가 바람이 되어 날아다닌다. 가을 바람이다. 그 바람에 실려온 소리 한 가락을 풀어본다. 먼 과거로부터 온 소리다. <농가월령가 9월>이다. 추수와 타작, 이웃과의 협업, 나그네 대접, 소 돌보기 등의 내용이 담겨있다. 


농가월령가 구월(九月)

구월이라 계추되니 한로 상강 절기로다/ 제비는 돌아가고 떼기러기 언제 왔노/ 벽공에 우는 소리 찬 이슬 재촉는다/ 만산에 풍엽은 연지를 물들이고/ 울 밑에 황국화는 추광을 자랑한다/ 구월 구일 가절이라 화전하여 천신하세/ 절서를 다라 가며 추원보본 잊지 마소/ 물색은 좋거니와 추수가 시급하다/ 들마당 집마당에 개상에 탯돌이라/ 무논은 베어 깔고 건답은 베두드려/ 오늘은 접근벼요 내일은 사발벼라/ 밀따리 대추벼와 등트기 경상벼라/ 들에는 조피 어미 집 근처 콩팥가리/ 벼 타작 마친 후에 틈나거든 두드리세/ 비단차조 이부꾸리 매눈이콩 황부대를/ 이삭으로 먼저 잘라 후씨로 따로 두소/ 젊은이는 태질이요 계집 사람 낫질이라/ 아이는 소 몰리고 늙은이는 섬 욱이기/ 이웃집 울력하여 제 일 하듯 하는 것이/ 뒤목추기 짚널기와 마당 끝에 키질하기/ 일변으로 면화틀기 씨앗 소리 요란하다
틀 차려 기름짜기 이웃끼리 합력하세/ 등유도 하려니와 음식도 맛이 나네/ 밤에는 방아 찧어 밥쌀을 장만할 제/ 찬 서리 긴긴 밤에 우는 아기 돌아볼까/ 타작 점심 하오리라 황계 백주 부족할까/ 새우젓 계란찌개 상찬으로 차려 놓고/ 배춧국 무나물에 고춧잎 장아찌라/ 큰 가마에 안친 밥 태반이나 부족하다/ 한가을 흔할 적에 과객도 청하나니/ 한 동네 이웃하여 한 들에 농사하니/ 수고도 나눠 하고 없는 것도 서로 도와/ 이 때를 만났으니 즐기기도 같이 하세/ 아무리 다사하나 농우를 보살펴라/ 핏대에 살을 찌워 제 공을 갚을지라
(조선 헌종 때 정학유丁學游가 지은 가사.)

<농가월령가>는 그림이 되어 내 앞에 펼쳐진다. 벼농사는 가을이면 황금벌판이 바람에 넘실거리며 춤을 춘다. 밀농사는 여름 땡볕속에서 황금빛으로 반짝인다.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search/view?relicId=543 

김홍도 <벼타작> 《단원풍속도첩》 조선. 종이에 수묵담채, 28X23.9cm, 보물 527 호,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 화원 김홍도는 풍속화를 통하여 조선의 시대상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림의 주인공이 될 수 없었던 사람들을 그림 속으로 끌어들여 그들의 삶을 이야기한다. 단원은 서민들의 일상을 마치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그대로 화폭에 옮겼다.

25개의 그림을 엮은 책 《단원풍속도첩》의 <벼타작> 그림을 들여다본다. 배경도 없고, 원근도 없는 이 그림은 알파벳 X자 구도를 취했다. 두 개의 사선이 교차하는 X자는 시선을 사방 네 군데로 다 흩기도 하고, 교차점 한 가운데로 모으기도 한다. 그림을 전체적으로 다 훑어보게 된다. 그 시대에는 오른쪽 위에서부터 글을 썼다. 그림도 그런 순서로 보면 된다. 비스듬히 누워있는 지주(또는 마름)와 왼쪽 아래 비질하는 사람이 한 선이고, 지게를 진 사람으로부터 오른쪽 아래 볏단까지가 또 한 선으로 교차된 구조다.


종이책 출간으로 설명 일부 삭제


우리는 이 그림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마당질꾼들의 힘든 노동에 지쳐있는 모습 대신에 그들의 웃음을 보았다.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그들을 감시하는 마름(지주)의 밋밋한 표정과 대비하여 화가는 웃는 일꾼들을 그렸다.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가 공존하는 현실을 보여준다. 한 마당에 있는 그들 사이의 충돌은 없다. 소작인 노동자들의 웃음을 해학으로 표현했다. 중용을 좇는 단원 김홍도의 시선이다.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search/view?relicId=4819  

김홍도 <타작> 《행려풍속도병》 1778. 비단에 채색, 90.9x42.9cm. ⓒ국립중앙박물관 


이 그림은 또 하나의 <타작>이다. 위의 그림 《단원풍속도첩》보다 앞서 그렸다. 강희언康熙彦(1710-1784)의 집 담졸헌澹拙軒에서 그렸다. 선비가 세속을 유람하면서 맞닥뜨리는 장면들을 그려서 병풍으로 만든 《행려풍속도병》의 한 장면이다. 각 폭의 위쪽에는 단원의 스승인 표암豹菴 강세황(1713-1791)의 그림평이 적혀 있다.

《단원풍속도첩》의 <벼타작>은 이 그림의 중심부와 같은 구조이다. 확연히 다른 것이 있다면 배경과 감시자의 모습이다.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장죽을 입에 문 마름과 갓을 쓰고 반듯이 앉아있는 지주의 모습이 다른 점이다. 먼저 그린 《행려풍속도병》<타작>엔 산수화 배경이 있다. 《단원풍속도첩》<벼타작>에는 배경이 없고 인물에 집중했다. 병풍은 양반 지주계급의 사람들이 소장하는 것으로 비단 위에 그린다. 그들의 품격에 맞는 산수화 배경을 그리고 인물을 넣는 식이다.

첩(책)은 종이에 그린 작은 그림책이다. 풍경을 배경으로 그리면 자연히 인물은 작아질 수밖에 없다. 풍속화첩을 제작하며 배경을 없애고 인물에 집중한 지혜가 돋보인다.


http://ralphhedleyarchive.com/index.html  Archive reference 1898_w017

랄프 헤들리Ralph Hedley <타작마당The threshing floor>1898. 캔버스에 유채, 121.3x161cm. 

랭 미술관, 뉴캐슬 어폰 타인, 잉글랜드.


 이 그림은 1898년 로얄 아카데미에서 처음 전시되었다

세 명의 남자들이 도리깨질을 하고 있다. 그들의 표정은 드러나지 않는다. 단원의 <벼타작>에는 등장인물들의 표정이 실감나게 묘사되어있다. <벼타작>은 타작하는 방법이 볏단을 개상에 태질하는 모습인데 이 그림에서는 도리깨질이다. 휘추리 한 개 달린 도리깨로 헛간 안에서 타작하는 모습이다. 소년은 볏단 작업을 하는 중이다. 태질은 묶은 볏단을 턴다. 이 그림의 소년은 타작할 볏단을 풀고있는지, 탈곡한 볏단을 묶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짚에 이삭이 달려있는 것을 보아 아마도 털 것을 계속 올려놓기 위한 작업일 것이라 추측해본다.

뒤쪽 중앙에는 흰색 앞치마를 입은 어린 소녀가 앉아 남자들을 바라보고 있다. 한쪽 팔에 바구니를 들고 있는데 새참 심부름을 온 것일까? 옆에는 동행한 개 한 마리가 앉아있다. 이 어린 소녀가 볏단 작업하는 소년만큼 크다면 아마도 타작일을 거들었을 것이다. 농사에는 일손 하나라도 더 보태야 할 만큼 노동력이 필요하니까.

문을 통해 흘러 들어온 빛은 도리깨 막대와 휘추리의 연결 부위로 떨어진다. 도리깨를 내리칠 다음 차례는 누구일까? 아마도 오른쪽 남자일 것이다. 그의 휘추리가 왼쪽 남자의 휘추리보다 더 펼쳐져있으니 말이다. 셋이서 돌아가며 내리치는 리듬을 느낄 수가 있는데 이들은 묵묵히 내리치는 반복작업만 하고 있는 것일까? 무슨 구령이나 노래 같은 것으로 호흡을 맞추는 것은 아닐까? 그림으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단원은 <벼타작>에서 태질하는 남자들의 입을 벌린 모습으로 그려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감상자는 그들의 대화를 짐작하며 그림에 더 깊숙이 관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 그림은 인상파 그림이 연상될 만큼 빛은 중앙을 차지하고 시선을 타작도구로 끌어들인다. 빛이 가득한 그림이다. 밝은 그림 속에 힘든 노동의 거친 숨결이 숨겨져있다.   


http://ralphhedleyarchive.com/index.html   Archive reference 1899_w001a

랄프 헤들리Ralph Hedley <타작과 이삭줍기Threshing and Gleanings>1899. 캔버스에 유채, 104.9x90.8cm. 랭 미술관, 뉴캐슬 어폰 타인, 잉글랜드.


모자의 단출한 타작이다. 다듬잇돌 위에 한 줌 짚을 올려놓고 방망이로 두드리는 모습이다. 털 것을 나르는 사람은 어린 아이이다. 여인과 어린아이의 탈곡이 쓸쓸해보인다. 추수장면은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 떠들썩한 모습인데, 타작마당에는 기쁨과 시름이 섞인 표정들이 어수선한데, 이 모자의 탈곡은 쓸쓸하다. 곡식을 어디서 조금 얻어왔거나 주워온 것이 아닐까.

그림은 사선 대각선 구도로 흑백이 대비되고 있다. 알곡 한 톨이라도 허실되지 않도록 깔아놓은 깔판이 하얗게 빛난다. 깜깜한 배경과 대조를 이루며 곡식-일용할 양식의 귀함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김홍도의 <벼타작>은 상반되는 두 계급을 한 장면에 담았다. 지주와 소작인,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양반과 상놈, 상반되는 계급이 그림틀 안에 갇혀있다. 그런데도 당연히 느껴질 긴장감이 없다. 기름낀 지배계급과 삐쩍 마른 피지배 계급이라는 선입견을 깨뜨렸다. 지주에게 비판적이고 소작인에게 연민을 보이는 그림이 아니다. 풍속화의 해학이 매력적이다. 단원의 낙천적인 성격을 엿볼 수 있다.

랄프 헤들리의 그림은 사실주의 회화의 본 모습을 보여준다. 신화나 역사, 왕권을 그린 것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을 그렸다. 사람들이 일하는 모습을 그린 풍속화이기도 하다. 모습을 사실대로 보여줄 뿐,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지는 않는다. 물론 감상자가 적극적으로 덤벼서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는 있다. 타작할 곡식도 없고, 큰 도구도 없고, 남자도 없는 모자의 빈한한 삶에 대한 이야기를 지을 수는 있을 것이다. 풍속화를 대하는 감상자의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풍속화를 통한 풍자나 해학이 보이지 않음은 동양과 서양의 문화 차이일까, 작가의 개성 차이일까? 100년의 시대 차이일까?


작가 소개

랄프 헤들리R.B.A (Ralph Hedley 1848.12.31 영국 리치먼드 출생, 1913.06.12 영국 뉴캐슬 어폰 타인 사망)는 유화와 수채화를 동시에 작업한 뉴캐슬의 풍속화가이다. 화풍은 사실주의에 속한다. 목공예 작가, 삽화가, 조각가이기도 했다. 아버지도 목공예 작가였다.

그의 부모는 산업화의 물결을 따라 1851년에 뉴캐슬 어폰 타인(Newcastle-upon-Tyne)으로 이사했다. 13세부터 뉴캐슬 미술학교에서 공부한 그는 윌리엄 벨 스콧William Bell Scott(1811–1890)의 라이프 스쿨(Life School실제 모델이 있는 미술학교) 저녁 수업에 참석했다. 산업 혁명의 장면을 그린 풍경 및 역사 화가 윌리엄 벨 스콧은 헤들리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헤들리는 14세에 정부 예술 과학부로부터 동메달을 수상했다. 견습 과정을 마친 후 성공적인 목각 사업을 시작했으며 지역 언론을 위한 석판화를 만들었다. 1884년에 헤들리와 뉴캐슬의 여러 동료 예술가들은 목각 조각가인 토마스 베윅Thomas Bewick(1753-1828)의 이름을 따른 베윅 클럽을 설립했다. 클럽은 지역에서 많은 수의 예술가들을 끌어들이고 다수의 전시회를 개최했다. 전시 작품은 풍경과 사실주의적인 감각을 지닌 풍속(genre painting) 묘사 등 다양했다. 헤들리는 베윅 클럽의 회장이 되었으며, 왕립 영국 예술가 협회의 회원이 되었다. 그의 이름 끝에 붙는 R.B.A는 “Royal (Society of) British Artists”를 뜻한다. 가입회원이 아니라 선출회원 제도이다. 헤들리는 1879-1911년 사이에 정기적으로 왕립 아카데미에 전시한 뛰어난 화가였다(23개의 전시회에서 총 52개의 그림). 그림의 주제는 일반적으로 그의 고향 북동부의 노동자와 선원에서 어린이와 참전 용사에 이르기까지 평범한 사람들의 일하는 삶의 모습이다..

헤들리가 뉴캐슬 예술가들 사이에서 탁월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그림으로 만든 크로몰리소그래프(Chromolithography 다색 인쇄 방법)의 광범위한 인기 때문이었다. 내용은 주로 북동부 노동계급의 삶을 그린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목각 및 건축 조각 사업을 시작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나무 조각가로서 교회의 장식 작업 의뢰를 많이 받았다.

1882-1889년 사이에 뉴캐슬의 성 니콜라스 대성당 교회의 챈슬(chansel 교회 성가대 자리)을 개조하는 작업을 했다. 건축가 로버트 제임스 존슨Robert James Johnson(1930-1993)이 설계한 합창단과 루드 스크린(Rood screen성가대와 일반 신도를 분리하는 칸막이)을 조각했다.

랄프 헤들리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일반 시민들 일상 생활을 회화로 옮긴 것은 일종의 사회적 공헌이다. 1913년 그가 사망했을 때 뉴캐슬 신문은 그의 작업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번스가 펜으로 스코틀랜드의 소작농을 위해 한 일을 랄프 헤들리가 붓과 팔레트로 노섬벌랜드의 광부와 노동인에게 한 일입니다."

(“번스”는 스코트랜드의 시인이자 작사가인 로버트 번스Robert Burns (1759– 1796)를 가리킴.)

영국의 산업 혁명은 1780-1830년 사이로 간주된다.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찾아온 서민들의 생활수준은 열악했고, 노동력도 형편없었고, 취직을 했을 때 임금도 빈약했다. 헤들리는 이 어려운 시기를 그의 그림에서 묘사했다. 풍속화는 그 시대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낯선 말 풀이

계추桂秋  - 음력 8월을 달리 이르는 말. '가을'을 달리 이르는 말. 계수나무의 꽃이 가을에 핀다는 데서 유래한다.

벽공碧空  - 푸른 하늘.

천신하다 - 철 따라 새로 난 과실이나 농산물을 먼저 신위(神位)에 올리다. 무당이 가을이나 봄에 몸주에게 올리는 굿을 하다.

추원보본追遠報本  - 조상의 덕을 생각하여 제사에 정성을 다하고 자기가 태어난 근본을 잊지 않고 은혜를 갚음.

개상     - 볏단을 메어쳐서 이삭을 떨어내는 데 쓰던 농기구. 굵은 서까래 같은 통나무 네댓 개를 가로로 대어 엮고 다리 네 개를 박아 만든다.

탯돌     - 타작할 때에 개상질하는 데 쓰는 돌.

무논     - 물이 괴어 있는 논. 물을 쉽게 댈 수 있는 논.

안치다  - 밥, 떡, 찌개 따위를 만들기 위하여 그 재료를 솥이나 냄비 따위에 넣고 불 위에 올리다.

등유      - 등(燈)에 쓰는 기름.

밀따리   - 늦벼의 하나. 꺼끄러기가 없고 빛이 붉다.

휘추리   - 가늘고 긴 나뭇가지.

마름      - 지주를 대리하여 소작권을 관리하는 사람.


1. https://www.chroniclelive.co.uk/news/north-east-news/going-going-gone-up-1538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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