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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Nov 23. 2021

김홍도 <논갈이>, 레옹 오귀스탱 레르미트 <밭갈이>

조선과 서양의 풍속화

<조선과 서양의 풍속화, 시대의 거울>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이곳엔 글의 일부만 남기고 많은 부분을 삭제합니다. 이해를 바랍니다. 


두 마리의 소가 끄는 쟁기를 ‘겨리’라고 한다. 겨리가 하나인데 소가 두 마리라고 ‘쌍겨리’라는 말을 쓴다면 옳지 않다. ‘쌍겨리’자체가 틀린 말은 아니다. 두 집의 소가 겨리를 이루면 ‘쌍겨리’라고 할 수 있다. 가난한 농가에서 겨릿소 두 마리를 가진 집은 흔치 않았다. 소 한 마리 있는 집도 드물 정도였다. 


세종 29년(정묘, 1447) 5월 26일(병진) 기록.
경기도 백성으로 보더라도 논밭을 가는 데에 사용하는 자가 열에 한둘도 못되어 깊게 갈 수가 없어서 그만 농업에 실농을 하고, 1
단종 1년(계유, 1453) 9월 25일(무인) 기록.
“소도 역시 농사에 크게 쓰이는 바인데, 무릇 한 마을 안에 농우(農牛)를 가진 자가 한두 집에 지나지 아니하니, 한 집의 소로 한 마을의 경작(耕作)을 의뢰하는 것이 반(半)이 넘는데, 만약 한 마리의 소를 잃으면 이는 한 마을의 사람이 모두 농사짓는 때를 맞추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 마리의 소가 있고 없는 것으로써 한 마을의 빈부(貧富)가 관계되니 소의 쓰임이 진실로 큽니다.” 2

이 기록은 김홍도가 활동하던 시대보다 300여년 앞선 상황이지만 김홍도 시대에나 그 후 농업이 기계화되기 시작한 초기까지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크게 힘들지 않은 쟁기질에는 소 한 마리로 끌 수 있는데 이것을 ‘호리’라고 한다. 호리가 감당하기 힘들 때는 겨리가 필요하다. 소 한 마리씩 가진 두 집에서 함께 겨리를 이루면 이것이 바로 ‘쌍겨리’이다. 겨릿소의 오른쪽 소는 ‘마라소’, 왼쪽은 ‘안소’이다. 

논갈이는 음력 이월 첫 축일丑日부터 쟁기질로 시작한다. 나라에서는 논갈이 시기가 되면 백성들의 농경에 도움을 주는 행정을 펼쳤다. 삼남과 강원도에서 소와 종자를 구하여 경기와 양서를 구제했다. 인조임금 때 도승지 이경석李景奭(1595-1617)이 인조에게 간하여 허락한 정책이 실록에 남아있다. 

인조 15년(정축, 1637) 2월 11일(신사) 기록.
삼남 및 강원도에 유시를 내려 농우(農牛)와 곡종(穀種)을 갖추어 보내도록 함으로써 기전(畿甸)과 양서(兩西)의 급함을 구제하게 할 것과, 3

중부 이북의 산간지역, 강원도 산악지대에서는 땅을 뒤집어엎는 갈이가 힘들어 쟁기 하나를 두 마리의 소가 함께 끄는 겨릿소를 이용하고, 중부 이남 지역에서는 소 한 마리에 쟁기 하나인 호리소를 이용했다. 

기록으로 보면, 신라 지증왕 3년(502)에 농사에 소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502년(지증왕 3)에  순장(殉葬)을 금지하는 법령을 내리고, 주군(州郡)에 명해 농업을 권장하도록 하였다. 우경(牛耕)을 시행하도록 하는 일련의 개혁조치를 단행함으로써 농업 생산력 증대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 무렵에는 벼농사가 확대, 보급되면서 수리사업도 활발히 진행되었는데, 바로 우경이 시작되던 해에 순장을 금지시켰다.” [출처:지증왕-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근래에 들어 농업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주로 경운기를 사용함에 따라 소를 이용한 논 밭 갈기는 대부분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하지만 홍천지역의 경우 1960년대 후반까지 농기계의 힘이 닿기 힘든 험준한 산세의 화전과 거친 자갈밭을 일구는데 겨릿소를 이용했기 때문에 다른 지역과는 달리 지금까지 ‘겨릿소 소 모는 소리’의 명맥이 이어져 오고 있다.

밭가는 소리

어져어 저 소야 줄 잡아당겨라 이랴이랴
먼저 나가지 말고 두 마리가 잘 잡아당겨라 저 마라소
마라소가 먼저 나가면 안소가 못 나간다
이랴아 어서 가자
이랴 저 마라소야 무릎을 꿇고 댕겨라 어서 나가자 이랴 어서 가자
에뎌 오 오오 마라소야 너무 나가지 말고 줄 당기게 이랴아
저 방둥이에 무릎 차이면 발 다친다 이랴 어서 가자
기름바우다 밀어 디뎌라 돌바우에 발 다치지 말구 잘 잡아당기게 이랴 이랴
밑에 소는 미끼러지니 발 맞춰 잘 잡아당기고
꼭대기 소는 무릎을 끓면서 승지저슬 당기게 이랴이랴
어뎌어 저 마라소 잘 잡아당겨라 이랴
어뎌뎌차 가던 다음으루 돌아를 가세 이랴 저 마라소
어뎌 이랴 끙 어뎌어 이랴아
저 마라소 말 잘 들어라 어져 이랴
넘나들지 말구서 똑바라 잡아당겨라
삐뚜루 가면 생지가 든다 이랴이랴
마라 저 글루에 발 조심해라 발다친다 이랴 (경기도 가평군 하면 현리 밭가는 소리) 4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search/view?relicId=530 

김홍도 <논갈이> 《단원풍속도첩》 조선, 종이에 수묵담채 27.8X23.8cm. 보물527호. ⓒ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 풍속화에 많이 등장하는 X자 구도이다. 운동감과 안정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구도이다. 

《단원풍속도첩》 속 〈논갈이〉에는 쟁기를 이끄는 소가 두 마리다. 땅이 아주 단단하거나 질척하다는 뜻이다. 뒤쪽에 있는 남정네들은 쇠스랑으로 땅을 고른다. 이 작업이 끝나면 논에 물을 대고 써레질을 한 뒤 모 내기를 할 것이다. 제목을 〈논갈이〉라 붙였으나 논갈이인지 밭갈이인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주변에 나무가 보이지 않아 논으로 추정했을 뿐이다. 〈논갈이〉라 추정한 이유는 또 있다. 쇠스랑질을 하는 남정네가 웃통을 벗었기 때문이다. 밭 갈이 때보다 날씨가 더 많이 풀렸음을 시사한다. 계속 일을 하다 보면 더위를 느낄 수도 있는 날씨다. 밭갈이와 논갈이를 같은 시기에 하는 경우도 있으나, 논갈이는 논에 물이 있어 질척하기 때문에 밭갈이보다 조금 늦게 한다.


종이책 출간으로 설명의 일부를 삭제함 


https://img.wikioo.org/ADC/Art.nsf/O/AQSMQD/$File/Leon-Augustin-Lhermitte-Ploughing-with-Oxen.jpg

레옹 오귀스탱 레르미트Léon-Augustin Lhermitte  <쟁기질 Ploughing with oxen1871, 캔버스에 유채. 60.5x103.4cm. 캘빈그로브미술관/박물관, 글래스고, 스코틀랜드.


많은 도시인들이 “농촌 풍경”이라는 단어에서 평화로움을 상상한다. 고요하고, 자연은 아름다우며,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평온함을 상상하곤 한다.

이 그림은 어떠한가? 황량한 풍경을 배경으로 두 남자가 겨릿소를 몰며 흙을 뒤집고 있다. 여러 개의 수평선으로 짜여진 이 그림도 첫 인상은 편안한 느낌이다. 소의 흰색이 그림의 하이라이트로 빛나는데 흰 소의 등이 하늘과 땅의 경계, 땅의 구획선과 나란히 수평을 이루고 있다. 수평구조는 수직구조와 달리 편안한 느낌을 준다. 도시인들이 농촌 생활을 속속들이 모르는 것처럼 이 그림도 첫 인상만 부드러울 뿐, 사실은 농부의 힘든 노동을 보여준다. 듬직한 두 마리의 소, 쓰윽 굴러갈 것 같은 두 바퀴, 그럼에도 쟁기로 땅을 파며 뒤 따라가는 농부의 힘들어하는 모양새를 묘사했다. 화가는 왼쪽 농부의 어깨와 등을 하이라이트로 강조했다. 소 모는 농부가 허리를 펴고 가볍게 걷는데 반해 쟁기질하는 농부는 다리를 굽혀 땅을 힘껏 디디며 쟁기를 쥔 손에 힘을 꽉 준 모습이다. 묵묵히 땅을 내려다보며 앞으로 나가는 모습이다. 나란히 늘어선 인물, 쟁기, 소는 장면에 엄숙한 느낌을 준다. 서양에는 흰 소가 흔한지 모르겠다. 많은 흰 소 중에 하나가 농우가 된 것인지, 화가가 그림의 색 조화를 위하여 흰 소를 택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레르미트는 그가 존경했던 밀레처럼 들판의 농민 생활을 많이 그렸다. 소박한 삶을 묘사한 작품들이 많이 남아있다. 산업 혁명 시대에 변화하는 과정에서 앞으로는 사라질 이전 사회의 모습, 대도시 시민들이 잃어버린 낙원, 역사의 행진 밖에서 얼어붙은 시간을 화폭에 남겼다. 그러나 자신의 이념을 주장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다루었다. 노동자의 삶의 고난에 대한 과장을 피하면서 장면을 충실하게 기록했다.


https://www.stephenongpin.com/artist/236994/leon-augustin-lhermitte 

레옹 오귀스탱 레르미트 Léon-Augustin Lhermitte <밭갈이Ploughing (Le Labourage)> 1886 목탄과 연필, 39.3 x 29.5 Cm. 스테만 옹핑 파인아트, 런던, 영국.


1886년 11월에 그린 이 그림은 1888년에 출판된 프랑스 시인이자 소설가인 앙드레 쐬리트(André Theuriet)의 책 <농촌의 삶 La Vie Rustique>의 삽화이다.  텍스트의 많은 삽화가 있는 초판과 1896년 미국에서 영문 번역판의 삽화로 사용하기 위해 레르미트가 그린 128개의 목탄 그림 시리즈 중 하나이다.  농민의 삶에 대한 상세한 묘사였으며, 작가가 산업화와 근대화의 도래로 잃어버릴까 두려워했던 소박한 삶의 일상에 대한 일종의 애가이기도 했다.  레르미트가 자주 일했던 그의 고향 몽 생 뻬흐Mont-Saint-Père) 인근 샤이(Ru Chailly) 농장에서 그렸다. 목탄화의 빛과 분위기가 감동적이다.


조선의 풍속화는 선線으로 그린 그림이다. 채색은 옅다. 특히 김홍도의 풍속화는 선의 묘사에 중점을 두어 대상의 세세한 부분을 잘 표현한다. 위의 <논갈이>(사실은 논갈이인지 밭갈이인지 정확하지 않다.)에서 농부들(사람)의 표정 뿐 아니라 소(동물)의 표정까지도 그렸다. 노동현장에 현미경을 들이대고 본 듯한 사실감이 있다. 레르미트의 그림은 면面과 색으로 그렸다. 사실주의 회화의 느낌이 잘 전달된다. 그러나 김홍도의  선으로 그린 그림만큼 섬세한 표정이 드러나지는 않는다. 서양에는 흰 소가 흔한지 모르겠다. 많은 흰 소 중에 하나가 농우가 된 것인지, 화가가 그림의 색 조화를 위하여 흰 소를 택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지금 세상에는 소를 키우는 가정이 없다. 자연 풀밭에 풀어서 키우든 우리에 가두어 사료로 키우든 소들은 '가축'이라는 이름을 벗어났다. 한 가정의 듬직한 일꾼이던 겨리소는 볼 수 없다. 옛날처럼 소에게 수레를 끌게하고 논밭을 갈게 시키면 인권 아니 동물권을 무시한 죄인이 될 것이다. 어린 아이에게 쇠꼴 베어오는 일을 시키면 아동학대의 범죄자가 될 것이다. 


작가 소개

레옹 오귀스탱 레르미트(Léon-Augustin Lhermitte 1844. 07.31 프랑스 몽 생 뻬흐 출생, 1925. 07. 28 프랑스 파리 사망)는 자연주의 화가, 에칭 화가(etcher)이다. 병약한 어린 시절에 집안에서 부모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픽처레스크 잡지(Le magasin pittoresque)’와 ‘가족의 뮤즈(La muse des familles)’와 같은 인기 있는 출판물 속의 판화를 복사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현장 노동자와 소박한 풍경을 즐겨 그렸다. 19세기 후반의 많은 예술가들은 이전 세대 화가들이 도입한 이미지에 의존했다. 그러나 레르미트는 농민과 농촌생활의 이미지를 파스텔 같은 보다 현대적인 재료를 사용하여 진보적인 기법을 시도했다. 


화가로서의 초기 경험은 삽화 복사와 함께 프랑스 사실주의 화가들 작품을 연구했다.

학교 교사인 그의 아버지는 당시 에꼴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의 장관이었던 발레프스키Walewski 백작에게 레르미트의 그림을 소개했다. 발레프스키는 레르미트의 능력에 깊은 인상을 받아 1860년대 초에 드로잉 학교인 에꼴 에페리알레 데생École Impériale de Dessin에 등록할 수 있는 600프랑의 장학금을 제안했다. 그곳에서 레르미트는 오라스 부아부드랑Horace Lecoq de Boisboudran의 학생이 되었다. 1863년 낙선전(Salon des Refusés)에 참석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시간에 에꼴 데 보자르에 입학했다. 레르미트는 그의 첫 번째 작품을 살롱에서 전시했는데, 이것은 그가 겨우 19세였을 때 그린 흑백 목탄 드로잉이었다.

1874년 살롱에서 그에게 첫 번째 메달인 3등 메달을 획득했다. 같은 해에 브르타뉴에서 몇 달을 보내며 그들의 의상, 활동, 축제, 삶의 댜채로운 본성에 매료되었다. 그후 5년 동안 이 지역을 여러 번 방문하여 브르타뉴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화폭에 옮겼다. 1880년에 그는 2급 메달을 획득했다. 

1885년에 파스텔화 작업에 열중했고, 이듬해 파리의 조르주 쁘띠Georges Pitit 갤러리에서 파스텔화 전시회에 참가했다. 파스텔화 12작품은 출생지인 몽 생 빼흐 지역의 일상생활이 포함되었다. 레르미트의 파스텔화는 앵글로 색슨 국가에서 매우 높이 평가되었다. 1890년경에 방향을 변경하고 대신 사교계 살롱에서 전시하기 시작했다. 

그의 작품은 예술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에 도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인상파 화가들보다 살롱 심사위원과 관중들에게 더 쉽게 받아들여졌다. 그의 모든 자연주의 그림은 섬세한 관찰력과 자연스러움으로 가득 차 있으며, 동시대인과 현대인 모두에게 찬사를 받은 농촌 풍경과 농민들을 그렸다. 이삭 줍는 사람들, 세탁소와 농장의 노동자들이 햇살과 조화를 이루는 묘사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낯선 말 풀이

써레    – 갈아놓은 논의 바닥을 고르는 데 쓰는 농기구.

쇠스랑  – 땅을 파헤쳐 고르거나 두엄, 풀 무덤 따위를 쳐내는 데 쓰는 갈퀴 모양의 농기구.

쇠꼴    – 소에게 먹이기 위해 베는 풀.

멍에      - 수레나 쟁기를 끌기 위하여 마소의 목에 얹는 구부러진 막대.

물추리나무 - 쟁기의 성에 앞 끝에 가로로 박은 막대기. 두 끝에 봇줄을 매어 끈다.

성에     - 쟁기의 윗머리에서 앞으로 길게 뻗은 나무. 허리에 한마루 구멍이 있고 앞 끝에 물추리막대가 가로 꽂혀 있다.

봇줄     - 마소에 써레, 쟁기 따위를 매는 줄.

 


1 https://sillok.history.go.kr/id/kda_12905026_003 

2 https://sillok.history.go.kr/id/kfa_10109025_003

3 https://sillok.history.go.kr/id/kpa_11502011_005 

4 https://ncms.nculture.org/song/story/6528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32A_0040_000_0030_2002_007_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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