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과 서양의 풍속화
지금은 논두렁에서, 밭 한가운데서, 어느 들판에서든 배달음식을 주문한다. 들일 하는 날 여자들이 점심 장만하느라 부엌에 매어있지 않아도 된다. 들밥의 정취는 옛 이야기로 남아있을 뿐이다.
집집마다 차린 들밥 고사리나물 향기롭다
먹고나자 밭머리에서 웃음소리 왁자하네
올해 봄비 넉넉하니
하릴없는 두레박에 저녁 햇살 비치네.
서거정(조선 성종 때 대제학) [사가집四佳集] 권3 <전가田家>
아낙은 들밥 차리느라 자기 밥도 아니 먹고
새벽부터 마음이 논밭에 가있네
점심나절 밭이랑으로 걸음을 재촉하여
남편을 배불리 먹인 뒤 신이 나서 돌아오네.
안축(고려말 시인) [근재집謹齋集] 권1 <농두엽부壟頭腋婦 밭이랑에 들밥 내어가는 아낙네>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search/view?relicId=549
김홍도 <점심/단원풍속도첩> 조선시대, 종이 수묵담채 28 X 23.8cm. 보물527호. 본관6504-20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그림은 공필工筆도 아니고 채색이 고운 것도 아니다. 격식을 갖추지 않고 편안하게 그렸다. 사람들이 웃통을 벗었고, 왼쪽 맨 뒷사람이 삿부채를 들고있는 것으로 보아 계절은 5,6월일 것이다. 가난한 서민들은 강가에서 자라는 부들이나 짚을 엮어서 부채로 사용했다. 이 사내들은 모두 맨발이니 논일을 하다가 들밥을 먹으러 온 것 같다.
그림의 등장인물은 모두 열명이다. 아무렇게나 흩어져 앉은 것 같아도 나름 질서가 있는 자리 배열이다. 오른쪽 위는 밥을 벌써 다 먹고 술을 마시고 있으니 먹는 속도가 빠른 젊은 사람, 한 가운데와 왼쪽은 아직도 먹는 중이니 속도가 느린 나이 든 사람, 왼쪽 아래는 개, 오른쪽 아래는 여자와 아이, 이렇게 인물들의 나이와 성별이 확실하게 구분된다.
밥그릇은 크지만 차림은 빈약하다. 제대로 된 반찬그릇을 따로 받은 사람은 왼쪽에서 젓가락질하고 있는 남자뿐이다. 이 남자는 농사일을 감독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 뒤의 두 사람은 반찬 그릇 하나에 젓가락도 없다. 가운데 사람은 아예 달랑 밥그릇 하나 받아들었다. 이 그림에서 유난히 큰 밥그릇이 눈에 띈다.
조선 헌종 때 실학자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 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보통 남자가 한끼에 7홉(420cc/336g)을 먹는다고 기록되어있다. 천주교 조선교구의 제5대 교구장 앙투안 다블뤼Marie-Nicolas-Antoine Daveluy는 <조선사입문을 위한 노트 (1860년)>에 “조선인들은 특별한 탐식과 식욕을 가진 대식가이다. ~~ 노동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식사량은 1리터의 밥으로 이는 아주 큰 사발을 꽉 채운다.~~ 많은 사람들이 2,3인분 이상을 쉽게 먹어치운다.”고 기록했다. 17세기 조선에 온 네덜란드인 헨드릭 하멜Hendrik Hamel도 그의 <하멜표류기>에 “조선 사람들은 명랑한 성격을 지닌 엄청난 대식가들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오직 밥이 에너지원이니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야속하다. 고봉밥을 먹는 것에 대한 관심만 기록한 것이 야속하다. 고봉밥 먹고 얼마나 많은 일을 열심히 하는지도 썼어야 한다. 밥을 축내는 사람이 아니라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인데 말이다.
일년 사철 그렇게 많이 먹은 것은 아니다. “조선후기의 기본 식사는 하루 두끼가 기본이었다. 농번기인 여름 철에는 점심을 먹었다. 2월부터 8월까지는 점심을 먹는다고 했다. 양력 3월 춘분부터 9월 추분까지이다.”<화폭에 담긴 한식>한식재단 기획, 한림출판사, 2015,07.08. 96,97쪽 /<오주연문장전산고> 재인용.
오른쪽 아래에는 들밥을 들고 온 아낙네가 등을 돌리고 앉아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조선시대 여인들은 장옷으로 얼굴까지 가리고 다녔는데 이 여인은 가슴을 활짝 열어젖힌 채 젖을 먹이고 있다. 아이에게 젖을 물린 순간 이 여인은 ‘여인’이 아니라 ‘어머니’일 뿐이다. 한 생명을 먹여서 키우는데 부끄러움은 없다. 그 옆에 아이는 큰 밥사발을 들고 열심히 숫가락질을 하고 있다. 아기 엄마가 먹을 밥이 광주리 안에 남아있을까? 아닐 것이다. 저 아이가 먹고 남는 것을 먹을 것이 뻔하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의 어머니들은 항상 "엄마는 배 안고파"로 밥그릇을 자식에게 밀어부쳤다. 먹을 것이 충분한 지금은 "엄마는 그거 안 좋아해."라는 말로 맛난 것을 자식 쪽으로 옮겨놓는다. 그림 속에서 아기에게 젖을 빨리면 엄마는 속이 허할텐데 큰 밥그릇은 아이가 차지하고 있다. 술단지를 들고있는 총각의 밥은 어디 있을까? 광주리를 덮은 보자기 모양새로 보아 혹시 그 안에 먹을 것이 남아있는 것일까?
https://www.metmuseum.org/art/collection/search/435809
Pieter Bruegel the Elde<추수하는 사람들The Harvesters> 1565. Oil on wood 116.5 x 159.5 Cm.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이 그림은 연작의 일부로 연중 다른 달에 흔히 하는 농업 활동을 보여준다. 시리즈는 6개의 그림으로 구성된 것으로 추정하며 <추수The Harvesters>는 7월과 8월을 나타낸다. 잘 익은 밀이 부분적으로 베어져 쌓여 있고 전경에는 한 무리의 농부들이 일을 잠시 멈추고 나무 그늘에서 음식을 먹으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그들 뒤에서 밀을 다발로 묶고, 왼쪽에서 낫으로 줄기를 자르는 작업이 계속된다. 왼쪽 밀밭 사이로 세 남자가 곡식 더미를 어깨에 메고 멀어져간다. 장면은 여러 척의 배가 통행하는 만이 있는 멀리까지 계속해서 펼쳐진다.
이 그림은 눈을 앞에서 뒤로 움직이는 구성으로 거대한 풍경을 제공한다. 5~6개의 공간 움직임의 진행으로 읽을 수 있다. 베인 들판에서 베지 않은 곳으로, 마을로 들어가는 길과 더 깊은 도시 공간, 항구, 먼 평면으로. 낮은 언덕과 계곡을 배경으로 4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큰 나무 아래에는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있다. 그릇에 담긴 흰 것을 숫가락으로 떠먹는 모습으로보아 시리얼이다. 바구니에 담긴 빵을 자르는 사람도 있다. 옆에 있는 사람은 바지를 반쯤 벌린 채 잠들어있다. 이 장면은 브뤼헐의 그림 <코카인의 땅Land of Cockaigne(Alte Pinakothek, Munich)>에서 반복되는 포즈이다.
이 시리즈는 서양 미술사의 분수령이다. 북부 르네상스와 남부 르네상스의 예술가들이 그토록 밀접하게 고착한 기독교 신앙 회화에서 조연 역할이었던 풍경의 제한은 버려졌고, 목가적이면서 동시에 토속적인 새로운 휴머니즘을 표현했다. 예술에 대한 휴머니즘의 영향은 사람과 환경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에 중점을 두었다.사람에 대한 이러한 초점은 사회의 인본주의 운동과 일치했다
브뤼헐의 그림에서 농민들의 휴식은 한 부분인데 반하여 단원의 그림은 풍속화의 특징으로 인물묘사에 중점을 두었다. 단원의 풍속화는 역사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치적인 풍자에 중점을 두지는 않는다. 사실만 객관적으로 전달할 뿐이다. 브뤼헐의 <추수>도 농촌의 한 장면이다. 다만 한 걸음 더 그림 속으로 들어가면 광범위한 풍경을 배경으로 사회적 메세지를 읽을 수 있다.
시리즈 그림들은 달력 장면에 기본을 두고 있지만, 그림에서 분할된 각각의 공간들은 농민이 속한 경제 시스템을 단계적으로 보여준다. 추수한 것을 수레에 싣고 마을을 가로질러(초록색 풍경부분) 먼 곳에 작게 보이는 항구로 옮긴다. 배들은 더 큰 제조업체나 무역센터로 추수한 것을 운송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림은 새롭게 팽창하는 경제의 점들을 연결하고, 농민을 극단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이익이 되는 체제의 심장으로 묘사한다.
작가 소개
브뤼헐의 원명은 Brueghel인데 자신의 작품에 서명할 때 Bruegel로 적었다. 네덜란드어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Bruegel’은 ‘브뤼헐’로 표기한다. 브뤼헐 집안은 플랑드르를 대표하는 화가 집안으로 명성을 떨쳤다.
대 피터르 브뤼헐 (네덜란드어 Pieter Brueghel de Oude, 영어 Pieter Brueghel the Elder, 1525?~1569) 별명이 “농민 브뤼헐”이다. 부자(父子)를 구별하기 위해서 아버지는 ‘the Elder’를, 아들은 ‘the Younger’를 쓴다. 우리말로는 ‘대(大)’와 ‘소(小)’를 사용한다.
소 피터르 브뤼헐 (Pieter Brueghel de Jonge/ Pieter Brueghel the Younger, 1564~1638) 대 피터르 브뤼헐의 장남이다.
대 얀 브뤼헐(Jan Brueghel de Oude/ Jan Brueghel the Elder, 1568~1625) 대 피터르 브뤼헐의 차남이다.
소 얀 브뤼헐(Jan Brueghel de Jonge/ Jan Brueghel the Younger, 1601~1678) 대 얀 브뤼헐의 아들(대 피터르 브뤼헐의 손자)이다.
대 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el/Brueghel Elder 1525년~ 1530년 사이에 네덜란드 브레다 출생, 1569년 브뤼셀 사망)는 장르 예술(일상 생활의 장면), 특히 풍경화와 농민 묘사의 전문가였다. 그는 북부 르네상스의 가장 위대한 예술가 중 한 명이지만 어린 시절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다.
브뤼헐의 초기 예술 교육은 플랑드르 예술가 피터르 쿠케 반 앨스트(Pieter Coecke van Aelst)의 견습생으로 시작되었다. 1550년 반 앨스트가 사망한 후 안트베르펜(Antwerp)으로 이사했다. 1551년 안트베르펜 화가 협회인 세인트 루크 길드에 선출되어 예술가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1552년과 1553년 사이에 브뤼헐은 그림 연구를 위해 프랑스를 경유하여 이탈리아로 갔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의 영향을 크게 받지는 않았지만 그가 방문한 시골은 큰 영향을 미쳤고, 그는 풍경화로 유명해졌다. 특히 스위스 알프스는 그의 작품활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 결과 산 풍경에 대한 수많은 절묘한 그림이 탄생했다. 브뤼헐은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의 작업에 밀접하게 기반을 둔 "환상과 기괴한 것들, 꿈, 상상"을 표현했으며, 그의 동시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어 그를 두 번째 보쉬라고 불렀다. 1555년 안트베르펜으로 돌아온 브뤼헐은 네덜란드 예술가 히에로니무스 코크(Hieronymus Cock) 의 조각사로 일했다. 그가 제작한 판화는 종종 유머러스한 주제를 다뤘다. 활기찬 상업 수도인 안트베르펜에 오랫동안 거주한 브뤼헐은 전통적인 주제에 인간적인 정신을 불어넣고 과감하게 새로운 주제를 창조했다.
1559년에 그는 이름의 철자를 "Peter Brueghel"에서 "Pieter Bruegel"로 변경했다.
1556년에 플랑드르 영토의 소유권은 스페인의 필립 2세에게 넘어갔다. 필립2세는 가톨릭 통치를 시행하려고 알바 공작을 보내 브뤼셀에서 개신교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잔인한 군사 작전을 이끌도록 했다. 미술사가 라이너 하겐(Rainer Hagen)에 따르면, “브뤼헐은 작품의 많은 부분이 종교적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성인과 순교자의 도상을 일관되게 기피한 것은 기독교 철학과 피에 굶주린 캠페인에 대한 암호화된 거부로 볼 수 있다”고 평했다. 브뤼헐의 많은 그림은 플랑드르 평민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그로 인해 "농부 브뤼헐"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신화와 귀족생활이 아닌 일반인들의 일상생활을 담은 브뤼헐의 그림은 다음 세기의 네덜란드 황금 시대 화가의 길을 닦았으며 19 세기 중후반의 사회적 리얼리즘과 자연주의를 불러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