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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Dec 07. 2021

김홍도 <길쌈>, 빈센트 반 고흐 <실 잣는 사람>

조선과 서양의 풍속화

<조선과 서양의 풍속화, 시대의 거울>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이곳엔 글의 일부만 남기고 많은 부분을 삭제합니다. 이해를 바랍니다. 



여자 아이는 열 살이 되면 밖에 나가서는 안 된다.
어머니는 유순한 말씨와 태도,
그리고 남의 말을 잘 듣고 절대 순종하는 법을 가르치며
삼베와 길쌈을 하고 누에를 길러 실을 뽑으며
비단·명주를 직조하고 실을 땋는 등 여자의 업을 배워야 한다.
女子十年不出 姆敎婉娩聽從 執麻枲 治絲繭 織紝組紃 學女事 『예기』<내칙편內則篇>. 

“여자십년불출 모교완만청종 집마시 치사견 직임조순 학여사”

고대 중국에서 만들어진 『예기禮記』가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에 전해졌고, 조선시대에 많은 주석서가 간행되었다.  21세기를 살고있는 우리, 특히 여성들은 기절초풍할 내용이다. 잊혀진 사상이요, 잊혀진 언어란 말인가? 아니다. 생각도 이어지고 있고, 단어의 선택이 바뀌었을 뿐 『예기禮記』의 “내칙內則”은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로 바뀌어서.


여자들 하는 일에 대해 흔히들 말하기를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로 주부의 가사노동을 꼽아왔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주부는 꼭 여성을 지칭하지도 않고, 가사 노동의 종류도 많이 변했다. 밥, 빨래, 청소는 누가 하든 꼭 필요한 일인데 많은 부분이 기계화되고 전문화되었다. 주방가전은 놀랍게 발전했고, 세탁기에 맡긴 빨래는 여성을 해방시켰다. 청소는 로봇이 해주는 시대에 살고있다. 옛 여인들이 하던 가사노동의 항목중에 빠진 것이 있는데 바로 '길쌈'이다. 길쌈은 실을 자아내고, 옷감을 짜는 모든 과정을 다 뜻한다. 

목화를 길러 솜을 얻고 그것으로 실을 자아 옷감을 짠다. 모시풀을 훑어 겉껍질을 갈라 모시를 짜고, 삼의 껍질로 삼베를 짠다. 뽕나무를 기르고 누에를 치며 누에 밥을 부지런히 먹이고 고치에서 명주실을 얻는다. 현재 기계화된 공장에서 생산하는 방적과 염색, 섬유 디자인은 이전에 여성의 가사 노동중에서 가장 세분화되고 전문화된 부분이다.

『예기禮記』에서 언급한 “삼베와 길쌈을 하고 누에를 길러 실을 뽑으며, 비단·명주를 직조하고 실을 땋는” 과정은 공장에서 한다. 방적공장은 18세기 유럽의 산업혁명을 이끌었다.

 

반 세기 이전만 해도 바느질은 물론 길쌈의 모든 과정을 다 집안에서 했었다. 일종의 가내수공업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인들의 가사 노동중에 길쌈은 중요한 생계 수단이었다. 그 과정이 얼마나 고달팠는지 규방가사의 내용을 살펴본다. 경북 김천시 남면 운봉에서 수집된 <여성탄식가>이다.

여자몸이 되어나서 인들 아니 원통한가
누대종가 종부로서 봉제사도 조심이오
통지중문 호가사에 접빈객도 어렵더라
모시낳기 삼베낳기 명주짜기 무명짜기
다담일어 베를보니 직임방적 괴롭더라
용정하여 물여다가 정구지임 귀찮더라
밥잘짓고 술잘빚어 주사시에 어렵더라
세목중목 골라내어 푸재따듬 과롭더라
자주비단 잉물치마 염색하기 어렵더라
춘복짓고 하복지어 빨래하기 어렵더라
동지장야 하지일에 하고많은 저세월에
첩첩이 쌓인일을 하고한들 다할손가
줄저고리 상첨박아 도포짓고 버선지어
서울출입 향장출입 내일갈지 모래갈지
부지불각 총망중에 선문없이 찾는의복
사랑에 저양반은 세정물정 어이알리
[출처: 규방가사에 나타난 여성들의 눈물과 해학 -문화재청] 1

조선후기 실학자 서유구徐有榘(1764-1845)가 지은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권28 <전공지 展功志>는 길쌈하는 방법을 그림까지 곁들여 상세하게 설명했다. 청나라의 우수한 기술을 조선의 여인들이 보고 배우도록 기록한 것이다.

『명심보감』 <부행편婦行篇>에는 부덕婦德ㆍ부언婦言ㆍ부용婦容ㆍ부공婦功을 여인의 네 가지 덕목으로 꼽는다. 이중에 부공은 길쌈을 부지런히 하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지금은 떨어진 단추도 직접 달지 않고 세탁소에 맡기는 시대이지만 옛날에는 길쌈이 여인들의 중요한 덕목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궁녀들이 길쌈을 하도록 왕이 직접 명하기도 한다. 

태종 11년(신묘, 1411)) 윤12월2일(무오) 기록.
임금이 또 여러 신하에게 일렀다.“의식(衣食)은 인생에 있어 중요한 것이니, 어느 한가지에 치우치거나 폐할 수 없는 것이다. 예전에는 후비(后妃)가 부지런하고 알뜰하여 또한 후부인(后夫人)이 친히 누에를 친 일이 있었는데, 지금은 아래로 궁중 시녀까지 모두 배불리 먹고 일이 없어 과인(寡人)의 의복까지 모두 사서 바친다. 금후에는 삼을 거두는 법을 정하여 궁중 시녀로 하여금 길쌈하는 것을 맡아서 내용(內用)에 대비하게 하라.” 2

그 흔하던 목화밭과 뽕나무 밭은 다 어디로 갔을까? 탐스럽고 하얗게 빛나는 목화꽃을 본지도 오래됐다. 화초로 기를 뿐 목면을 얻기 위한 농작은 아니다. 호롱불 아래 실 잣는 어머니의 모습도 옛날 이야기 속으로 숨어들었다. 학교를 마치고 온 아이들이 뽕밭으로 달려가 뽕잎을 따오고, 사각사각 맹렬히 뽕잎을 갉아먹는 누에를 보며 몇 잠을 잤는지 헤아려보는 일도 없다. 번데기가 단백질 영양 간식이던 시절은 누런 책갈피 속에나 남아있다. 현재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는 잠실쪽 아파트가 지어진 그 자리가 뽕밭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목화솜에서 실을 잣고, 누에고치에서 비단실을 뽑아내는 장면은 반 세기 전에도 농촌에서 볼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림책 속에 갇혀있다. 한산모시가 유명세를 타는 것은 모시삼기 뛰어난 기술보다는 담백하고 맛있는 모시떡 때문은 아닐까.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search/view?relicId=545   

김홍도 <길쌈> 《단원풍속도첩》 조선. 종이에 수묵담채, 28X23.8cm. 보물527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길쌈은 크게 실잣기와 천짜기 두 가지 공정으로 나뉜다. 이 그림은 상하 2단으로 구성되어있다. 위에는 실을 뽑아내는 베매기 장면, 아래에는 베짜기 장면을 그려 길쌈의 두 가지 공정을 다 묘사했다. 베매기하는 여인은 실에 풀칠을 하고 있다. 바로 그 아래에 그릇이 보이는데 그것은 풀칠이 빨리 마르도록 약한 겻불을 피운 것이다. 이런 공정을 거쳐 나온 실이 날실이 되고, 베매기가 끝난 실을 베틀에 올려놓으면 곧바로 베를 짤 수 있다. 


종이책 출간으로 설명의 일부를 삭제함.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search/view?relicId=542 

김홍도 <자리짜기> 《단원풍속도첩》 조선. 종이에 수묵담채, 28X23.8cm. 보물527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수공업과 상공업이 크게 발달하던 조선에서 자리짜기는 생계수단의 한 몫을 톡톡히 했다. 자리는 왕실에서 서민까지 모두에게 필요한 생활용품이었다. 부들, 갈대, 귀리, 왕듸(매자기) 따위를 베어 볕에 말리고 꼬아 자리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고, 세금으로 내기도 했다. 수요가 많아 판매도 활발했다.

온돌식 주거 구조에서는 바닥에 까는 자리가 필요하다. 습기와 냉기를 막아주고, 겨울엔 온돌바닥의 열손실을 막아준다. 자리의 종류는 다양하다. 용수초(골풀)로 짠 등메는 고급품이라 주로 진상용으로 바쳤다. 왕골로 짠 돗자리, 삿으로 엮은 삿자리, 짚으로 짠 짚자리, 부들로 짠 늘자리, 시원한 대자리 등이 있다. 신분에 따라 양반은 꽃돗자리(화문석)를 사용하는가하면 흙바닥 위에 짚자리를 깔고 생활하는 가정도 있었다. 자리짜기의 장인이 석장席匠인데 조선시대에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에 392명의 석장이 돗자리를 대량생산하여 국가에 공납하였다. 


종이책 출간으로 설명의 일부를 삭제함.


옛 어른들은 세상에 듣기 좋은 소리가 자식 목에 젖 넘어가는 소리, 자식 글 읽는 소리, 가뭄에 빗소리라고 하였다. 이들 부부에겐 아들의 글 읽는 소리가 힘을 덜어주는 노동요로 들릴 것이다. 아니, 노동요와는 비교할 수 없다. 노동요는 힘든 육체적 노동을 위로해주는 역할을 하지만, 자식의 글 읽는 소리는 삶의 고통을 위로하고 앞날에 대한 희망까지 준다. 김홍도의 풍속화가 유행하던 시기에는 평민도 공부하면 과거시험을 보고 관료가 될 수 있었다. 역사의 기록에 할머니가 길쌈으로 손자를 가르쳐 벼슬에 오르게 한 이야기가 있다. 중종9년(갑술,1514) 2월3일(정유) 4번째 기사에는 서얼이 당상에 오른 전례를 기록했다.

석평은 천얼(賤孼) 출신으로 시골에 살았는데, 그가 학문에 뜻이 있음을 그의 조모가 알고서, 천얼임을 엄폐하고 가문을 일으키고자, 그 손자를 이끌고 서울로 와서 셋집에 살면서 길쌈과 바느질로 의식을 이어가며 취학시켰다. 드디어 과거에 급제하여 중외(中外)의 관직을 거쳐 지위가 육경에 오르니, 사람들이 모두 그 조모를 현명하게 여겼다. 3


왼쪽 http://www.vggallery.com/painting/p_0696.htm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실 잣는 사람, 밀레 이후The Spinner, after Millet> 1889. 캔버스에 유채,  40.0x25.5cm.  모세 메이어 Moshe Mayer 수집. 제네바, 스위스.

오른쪽 https://images.metmuseum.org/CRDImages/dp/original/DP827600.jpg

장-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 <실 잣는 사람The Spinner자크-A 라비에유Jacques-Adrien Lavieille 판화, 13.5x7.5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미국.


이 그림에 등장하는 물레는 김홍도의 <자리짜기>에 있는 물레와는 다른 모양이다. 돌리며 실을 감기 위한 기능은 같지만 좌식 생활을 하는 조선의 물레와 입식 생활을 하는 서양의 물레는 다를 수밖에 없다. 

빈센트 반 고흐는 생 레미에서 장프랑수아 밀레의 작품을 21점이나 따라 그렸다. 그대로 베낀 것은 아니다. 일종의 번역 같은 것이다. 번역은 같은 의미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것이다. 고흐 작품 중에 “after Millet 밀레 이후”라 함은 밀레의 작품을 고흐의 화풍으로 옮긴 그림이다. <실 잣는 사람>은 밀레 작품에서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강한 명암 대비)와 흰색과 검은 색을 따랐다.

밀레는 사실주의 화가로서 일반인들의 일상생활 장면을 많이 그렸다. 서양화에서는 이런 양식을 장르 페인팅Genre Painting(풍속화)이라 한다. 밀레는 손꼽히는 장르화가이다. 고흐 또한 수많은 장르 페인팅을 남겼다.


http://www.vggallery.com/painting/p_0029.htm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물레와 함께 왼쪽을 향한 직공 Weaver Facing Left with Spinning Wheel1884. 캔버스에 유채, 61x85cm. 보스톤 미술관, 보스톤, 미국.


고흐는 1883년부터 1885년까지 뉘넌Nuenen의 목사관에서 부모와 함께 살았다. 뉘넌에 머무르는 동안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강한 애착을 느꼈고, 베틀에서 일하는 직공의 모습을 여러 장 그렸다. 네덜란드는 섬유산업이 발달한 나라였다. 플랑드르(Flanders, 옛 브라반트Bravant 공국)는 11세기부터 방적기술이 발달하여 ‘브로드클로스Broadcloth’라는 섬유를 대량 생산했다. 1400년 이후 네덜란드의 레이덴Leiden은 섬유산업의 가장 중요한 도시로 떠올라 1664년에 모직산업의 절정기를 맞았다. 차츰 열기는 식어갔지만 19세기 말까지 네덜란드는 중요한 직물 생산지였다. 

빈센트 반 고흐가 살던 시대에 뉘넌의 그 작은 마을에서4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농사일이 중단된 겨울 동안 국내 산업 활동인 직조를 시작했다. 우리나라 농촌에서 추수가 끝난 겨울에 가마니를 짜고 새끼를 꼬던 것과 같은 상황이다. 고흐의 관심이 방직공들에게 쏠렸다.  펜 드로잉, 수채화, 유화, 모두 28점 정도를 그렸다. 화가는 시대를 그리는 사람이다. 고흐도 자신의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을 그렸다. 

위의 그림을 보면 가운데 붉은 천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주제 뿐 아니라 베틀의 붉은 천과 대조되는 짙은 나무와 회색 벽의 침울한 효과도 눈에 띤다. '방직공'시리즈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화적인 요소를 버리고 작업 과정과 기계 자체에 집중하면서 점점 더 정밀하게 베틀을 묘사했다.

그림 속 직공은 의자에 앉아 일을 한다. 조선처럼 바닥에 앉아서 베틀 작업을 하는 것보다 힘이 덜 든다. 베틀을 사용할 때는 실을 묶어놓기도 어렵다. 신발에 쇠꼬리줄을 붙여놓고 발로 차고 당기면서 일하는데 이 방법도 힘들고, 베틀북을 들고 있기도 힘들다. 이런 방식으로는 하루에 20자 정도를 짠다. 의자에 앉아 일하는 베틀은 발끝을 약간만 움직여도 바딧집이 열렸다 닫혔다하면서 베틀북이 쉽게 왔다갔다 한다. 중국에서도 의자에 앉아서 일하는 베틀을 사용했다. 


강원도 오산리 신석기 유적(양양군 손양면 오산리)은 BC6000여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곳에서 길쌈도구가 출토되었다. BC4000년에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신석기 유적 궁산패총(평남 용강군 해운면)에서도 방차(물레)가 출토되었다. 베 · 모시 · 명주의 길쌈은 삼한시대 이전부터 계속돼 왔다. 문익점 文益漸 (1329-1398)이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들여온(공민왕 12년, 1363) 후에는 무명 길쌈이 시작되었다. 무명 길쌈은 조선시대에 더 활발해지며 풍속화의 주제가 되었다.  

김홍도의 그림은 옅은 채색을 했지만 선묘화의 섬세함이 인물들의 표정을 그대로 전달한다. 마치 그림 속 등장인물들의 대변인처럼 그들의 심리상황을 선線으로 묘사한다. 고흐의 그림도 노동에 대한 화가의 눈길이 담겨있다. 그러나 두 화가들의 차이는 분명하다. 마치 수채화와 유화의 질감이 다른 것처럼 조선의 그림과 서양의 그림이 다른 것이다. 시원한 맑은 장국 맛과, 진한 찌게 맛의 차이라고나 할까. 


작가 소개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03.30 네덜란드 쥔더트 출생, 1890.07.29 프랑스 오베르 쉬르 와즈 사망)는 후기 인상파 화가이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기숙학교에 다니며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 그림을 배웠다. 일찍 학교를 떠난 후, 1869년 헤이그에 있는 미술대리점 구필(Goupil & Co.)에서 일하다가 런던으로 옮겨가면서 불안증세가 나타났다. 그후 파리로 옮겨 보조교사, 목사, 설교자, 서점 자원봉사자로 일했고 잠시 신학 공부를 했다. 

1880년 브루셀로 이사하면서 여러 화가들과 교류하고 회화 공부를 하였다. 이 때는 주로 풍경과 농민, 노동자를 그렸다. 1884년에 바르비종 학파의 사실주의 화가 밀레를 자신의 “아버지”이자 “영원한 주인”이라고 선언했다. 

1886년 3월 고흐는 파리로 이주했고 밀레의 영향력은 갑자기 줄어들었다. 고흐는 인상주의를 발견하고 툴르즈-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이나 고갱Paul Gauguin과 같은 보헤미안과 친구가 되었다. 그의 그림도 밀레의 침울한 색채를 버리고 두꺼운 붓놀림과 생생한 색채로 변했다. 1888년 2월 프랑스 남부 아를Arles로 이사했을 때 밀레는 다시 고흐의 삶에 스며들었다. 고흐는 다시 밀레의 주제로 돌아섰지만 프로방스의 노란 밀밭과 파란 하늘이 강렬하게 고흐를 공격했다. 아를의 아름다운 자연색에 매료되어 해바라기를 포함한 190여점의 그림을 그렸다. 

고흐는 라마르틴 광장의 ‘노란 집’에 방 4개를 임대했다. 고갱이 1888년 10월말에 그 곳에 입주했다. 고갱은 주로 기억과 상상력으로 작업한 반면 고흐는 눈앞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을 선호했다. 서로 다른 캐릭터로 인해 둘 사이의 긴장감은 점점 고조되었고, 고갱은 떠났다. 망상과 악몽은 계속 고흐를 괴롭혔다. 고흐는 일생동안 많은 혼란에 시달렸지만 그의 정신적 불안정은 풍부한 감정 표현으로 화폭에 옮겨졌고, 정신병원에 입원한 중에 그린 <별이 빛나는 밤>은 세계인의 사랑받는 명화가 되었다. 

인간과 자연의 내적 영성을 표현하기 위해 몸부림친 고흐의 그림은 독특한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보는 사람들에게 그의 눈과 마음을 통해 해석된 감각을 제공한다. 빈센트 반 고흐 그림의 특징은 감정을 마구 쏟아부은 듯한 입체감있는 색칠이다. 임파스토Impasto 기법이다. 화폭에 물감을 두껍게 얹어놓고 유화 나이프나 거친 붓으로 펴나가면서 붓 자국이 층을 이루며 획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고흐의 이러한 질감을 애호한다. 그는 각 작품에서 자신의 감정적, 영적 상태를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다.

1890년 5월, 파리 북쪽의 작은 마을 오베르-쉬르-와즈Auvers-sur-Oise로 이주하여 생애 마지막 몇 년을 보내며 열광적인 속도로 마을 주변을 그렸다. 온통 황금빛으로 익어가는 7월의 밀밭 <까마귀 나는 밀밭>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고단한 그의 생을 마감했다. 빈센트 반 고흐는 동생 테오와 함께 그곳에 나란히 아이비 넝쿨을 덮고 잠들어 있다.


낯선 말 풀이

잣다             - 물레 따위로 섬유에서 실을 뽑다. 잣다, 자아, 자으니

삼다            - 삼이나 모시 따위의 섬유를 가늘게 찢어서 그 끝을 맞대고 비벼 꼬아 잇다.  삼다, 삼아, 삼으니

베매기          - 베를 짜려고 날아 놓은 실을 매는 일.

날다             - 1.명주, 베, 무명 따위를 짜기 위해 샛수에 맞춰 실을 길게 늘이다. 2. 베, 돗자리, 가마니 따위를 짜려고 베틀에 날을 걸다.

겻불             - 겨를 태우는 불. 불기운이 미미하다.

바디            - 베틀, 가마니틀, 방직기 따위에 딸린 기구의 하나. 베틀의 경우는 가늘고 얇은 대오리를 참빗살같이 세워, 두 끝을 앞뒤로 대오리를 대고 단단하게 실로 얽어 만든다. 살의 틈마다 날실을 꿰어서 베의 날을 고르며 북의 통로를 만들어 주고 씨실을 쳐서 베를 짜는 구실을 한다. 

베틀신대        - 베틀의 용두머리 중간에 박아 뒤로 내뻗친, 조금 굽은 막대. 그 끝에 베틀신끈이 달린다.

용두머리        - 베틀 앞다리의 끝에 얹는 나무.

왕듸            - 매자기. 사초과의 여러해살이풀. 높이는 1.5미터 정도이고 뿌리는 길게 뻗으며, 끝에 단단한 덩이뿌리가 몇 개 생긴다. 

등메              - 헝겊으로 가장자리 선을 두르고 뒤에 부들자리를 대서 꾸민 돗자리.

고드랫돌       - 발이나 돗자리 따위를 엮을 때에 날을 감아 매어 늘어뜨리는 조그마한 돌

군포             - 조선 시대에, 병역을 면제하여 주는 대신으로 받아들이던 베

서얼             - 서자 얼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 

얼자             - 양반과 천민 여성 사이에서 낳은 아들.


https://www.cha.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nttId=6408&bbsId=BBSMSTR_1008&mn=NS_01_09_01 

2 https://sillok.history.go.kr/id/kca_11112102_004 

https://sillok.history.go.kr/id/kka_10902003_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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