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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Dec 18. 2021

김홍도 <활쏘기>, 프레더릭 레이턴 <명중>

조선과 서양의 풍속화

<조선과 서양의 풍속화, 시대의 거울>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이곳엔 글의 일부만 남기고 많은 부분을 삭제합니다. 이해를 바랍니다. 


축제에 가면 활쏘기와 사격 놀이가 있다. 과녁의 위치에 따라 점수를 합산하여 인형을 상품으로 주는 일종의 사행심을 이용한 장사이다. 목표를 달성한다는 것, 과녁을 맞추는 것이 얼마나 큰 쾌감인가! 상품은 덤일 뿐, 겨냥하고 쏘고 맞추는 쾌감이 더 크다.

활쏘기(弓矢궁시)는 구석기시대 말에 근동아시아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신석기시대에 이르러 여러 수렵 민족간에 급속히 보급되었고, 동시에 외적을 방어하는 무기로도 사용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부터 활에 능했다.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성왕東明聖王(B.C.58- B.C.19)은 이름이 주몽朱蒙인데 옛 부여에서는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고 했다. 기마민족인 고구려는 활을 잘 다뤘다. 중국인은 한민족을 동이족東夷族이라 했는데 특정 민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동쪽에 있는 나라들을 오랑캐로 얕잡아 부르는 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후한시대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이夷”를 “대궁大弓”으로 풀이했다. 즉 동이족은 ‘큰 활을 가진 사람, 활을 잘 쏘는 민족’을 뜻하기도 한다.

 

조선조의 태조 이성계의 활솜씨는 백발백중으로 뛰어났다. 태조가 냇가에 있을 때 한 마리의 담비가 나와 활로 쏘아 맞췄는데 연달아 나오는 담비를 쇠살(金矢금시)로 쏘아 20마리나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태조실록 1권, 총서 30번째기사.
한 마리의 담비가 달려 나오므로 쇠살[金矢]를 뽑아 쏘니, 이에 잇달아 나왔다. 무릇 20번 쏘아 모두 이를 죽였으므로 도망하는 놈이 없었으니, 그 활쏘는 것의 신묘함이 대개 이와 같았다. 1

백발백중 뿐이 아니다.

태조실록 1권, 총서 53번째기사.
태조가 일찍이 홍원의 조포산에서 사냥을 하는데, 노루 세 마리가 떼를 지어 나오는지라, 태조가 말을 달려 쏘아 먼저 한 마리의 노루를 쏘아 죽이니, 두 마리의 노루가 모두 달아나므로 또 이를 쏘니, 화살 한 개 쏜 것이 두 마리를 꿰뚫고 화살이 풀명자나무[槎]에 꽂혔다. 2

한 살로 두 마리의 노루를 잡았다니 놀랍지 아니한가.

정조임금도 활쏘기를 즐기고 실력도 좋았다. 정조실록의 곳곳에 활쏘기의 기록들이 남아있다. 태조처럼 백발백중은 아닌 것 같다.정조가 춘당대에 나가 신하들과 함께 활을 쏘았다. 10순(1순은 5발)을 쏘았는데 46발을 맞혔으니 명중률은 92%이다.

정조16년(임자,1792) 10월22일(정해) 기록.
상이 춘당대로 나아가 과녁을 쏘아 10순에 46발을 맞히고는 전을 올린 여러 신료들과 활쏘기에 동참했던 초계 문신들에게 고풍古風을 내렸다. 3

활을 쏘는 장소는 활터, 살터, 한자로는 사정射亭이라고 한다. 활터의 사대射臺  와 과녁간 거리는 145m(80간)이고, 과녁은 세로 12자, 가로 9자의 목판 한가운데에 원선을 그려 중심을 표시한다. 곳곳에 활 쏘는 정자로 관덕정觀德亭(나라에서 세운 사정)이 있었다. 대개 군사 훈련용이다.

인왕산 기슭의 황학정은 원래 고종의 명으로 경희궁 안 회상전 담장 옆에 지었는데 1922년 일제가 경희궁을 헐 때 지금 장소(사직공원 북쪽)로 옮겼다. 동대문 운동장은 조선시대에 군사를 훈련하던 훈련원 터다. 따라서 당연히 사정이 있었다. 창경궁 후원 춘당지 동북쪽 언덕 수목들 사이에 숨어있는 정자는 현재 조선 궁궐에 남아있는 유일한 왕의 사정인 관덕정이다. 임진왜란 이후 선조는 경복궁 동쪽 담 안에 오운정五雲亭을 지어 일반에게 개방, 활쏘기 연습을 장려했다.

활터끼리 편을 갈라 활쏘기를 겨루는 편사便射도 곳곳에서 행해졌으며, 여자들이 활터에서 활을 쏘는 일도 흔했다. 일반적으로 음력 3월 경의 청명한 날을 택하여 궁사들이 편을 짜서 실시하였다. 궁사들이 번갈아 활을 쏘면 기생들은 화려한 옷을 입고 활 쏘는 한량들 뒤에 서서 소리를 하며 격려하였다. 화살이 과녁을 맞히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여흥을 돋우었는데, 이때 주연을 베풀기도 하였다. 사정에서 활을 쏘는 사람을 한량閑良이라 한다. 문인으로 벼슬하지 아니한 사람, 소과에 합격하지 않은 사람을 유학幼學이라 하듯, 무반 쪽으로 무과를 준비하는 사람, 무과에 합격하지 않은 사람을 "한량"이라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 제39권 <전라도 남원도호부>에 남원 풍속에는 고을사람들이 봄을 맞이하면 용담龍潭 혹은 율림栗林에 모여 술을 마시며 활을 쏘는 것으로 예를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고장 사람들은 봄이 오면 용담이나 율림(栗林)에 모여 향음과 사례를 행한다. 4

원래 활쏘기를 연습하는 것은 취미가 아니라, 무과에 응시하기 위해서다. 무과의 과목 중 가장 중요한 것이 활쏘기였기 때문이다.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며 호위하고, 임금의 명을 전하는 임무를 맡는 무반의 요직이 선전관인데 선전관을 거쳐야만 무신으로 출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식 선전관은 20명, 겸직 선전관이 50명이니, 그 많은 합격자 중 극소수만 무반으로 임명될 뿐 나머지는 모두 합격증만 안고 살아야 했다. 합격증은 시쳇말로 ‘장롱면허’같은 것이다. 활을 쏘러 다녔으나 벼슬을 못하고 한량으로 남아 활 쏘는 한량은 “놀고먹는 양반”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지금 시대의 "금수저 백수"라고 할 수 있다.

 

화살은 어떤 것을 사용했을까. 주로 유엽전柳葉箭(살촉이 버들잎모양)을 사용했는데 대나무를 불에 달궈서 껍질을 버리고 만들기 때문에 젖으면 살이 굽거나 틀어져서 쓸 수 없게 된다. 조선 태조는 특별한 화살을 만들어 썼다.

태조실록 1권 총서 33번째 기사.
태조는 대초명적大哨鳴鏑을 쏘기를 좋아하였다. 싸리나무로써 살대를 만들고, 학의 깃으로써 깃을 달아서, 폭이 넓고 길이가 길었으며, 순록의 뿔로써 소리통(哨)을 만드니, 크기가 배(梨)만 하였다. 살촉은 무겁고 살대는 길어서, 보통의 화살과 같지 않았으며, 활의 힘도 또한 보통 것보다 배나 세었다. 5

현재 우리나라의 양궁 실력이 세계 제일인 것은 우리민족이 옛부터 국궁國弓을 갖고 말달리며 활을 쏘던 동이족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풍속화에서 활쏘기 장면을 살펴본다.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search/view?relicId=531  

김홍도 <활쏘기> 《단원풍속도첩》  조선시대, 종이 수묵담채 28 X 23.7cm. 보물. 본관6504-2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전복을 입은 교관에게 활쏘는 법을 배우는 장정들의 모습을 그렸다. 그림 왼쪽에는 한 무관이 시위를 당기고 있는 사내의 자세를 잡아주고 있다. 활쏘기를 배우는 제자의 자세를 잡아주고 활을 살펴보는 교관으로 보인다. 그림의 오른쪽 사내는 한쪽 눈을 감고 화살이 굽어 있는가를 살펴보고 있다. 뭔가 연구하는 표정이다. 앞에 놓인 것은 화살을 넣는 전동箭棟/전통箭筒이다. 


종이책 출간으로 설명 일부를 삭제함.


왼쪽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210826010003449

강희안 <사인사예> 부분.  오른팔과 오른발이 앞으로 나간 자세.

오른쪽 김홍도 <활쏘기> 부분. 오른팔과 왼발이 앞으로 나간 자세.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f/f1/Frederic_Leighton_-_The_Hit.jpg 

프레더릭 레이턴경Lord Frederic Leighton PRA <명중The Hit> c.1893.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로이 마일스 갤러리, 런던, 영국


영국에서 16,17세기에 전쟁 무기였던 양궁은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황금기를 맞는다. 빅토리아 공주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활쏘기를 좋아했고, 1833년에 궁수협회를 설립했다. 1844년에 영국과 아일랜드의 궁수들이 요크에서 전국대회를 개최한 것이 계기가 되어 전국적으로 양궁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양궁이 국민적 취미가 되었고, 스포츠 경기로 자리잡았다. 빅토리아 시대에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난 프레더릭 레이턴은 측근들이 활쏘기하는 모습을 많이 봤을 것이다. 그림에서 보듯이 어린이들도 활쏘는 방법을 배웠다.

이 그림에서 가르치는 사람이 아버지인지 형인지는 알 수 없다. 자세를 바르게 잡아주는 진지한 표정과 소년의 반짝이는 눈빛이 시선을 끈다. 사실적으로 묘사한 모피는 수렵시대의 상징이고, 소년이 머리에 쓴 나뭇잎 관은 정글을 암시하지만, 그림의 분위기는 수렵시대를 벗어나 있다. 모피는 화려하여 귀족적 분위기이고, 두 사람의 살빛도 수렵인의 모습은 아니다. 벗은 발을 보면 숲속을 늘 맨발로 뛰어다니던 발은 아니다. 이들의 활쏘기는 생계형이 아닌 부유한 가정의 고급 취미인 것이다. 작가 레이턴의 측근에는 귀족들이 많았으니 그들 중 한 가정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모델들이 옷을 벗고 있는 것이 의문이다. 고급스런 모피는 있으나 귀족을 나타내는 어떤 의상도 걸치지 않았다. 짐승 가죽이나 걸치고 살던 시대의 그림은 아닌데, 수렵시대를 연출한 것일까?

스케치는 로얄 아카데미에 보관돼 있다.

조선의 국궁과 영국의 양궁은 활쏘기의 기본 자세가 서로 다름을 그림을 통해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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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royalacademy.org.uk/art-artists/work-of-art/squared-up-tracing-for-the-hit 

프레더릭 레이턴경Lord Frederic Leighton PRA <명중The Hit> 1893. 드로잉, 트레이싱 종이에 연필, 15.6x11.7Cm. 영국 왕립미술원, 런던, 영국

 

화약의 발명으로 총이 등장함에 따라 활은 그 위력을 빼앗기고 취미가 되었다. 이제 활은 사냥터에서도 전쟁터에서도 더 이상 필요없는 물건이다. 선수들이 운동경기로 단련하고, 일반인들이 취미로 즐긴다. 양궁은 올림픽 종목이 되어 세계의 우수한 궁수들이 도전한다. 대한민국은 올림픽 양궁 금메달리스트를 많이 배출했다. 선조들의 활쏘기 실력이 후대에까지 이어져왔음을 실감한다. 뿌듯한 자부심 이면에 슬쩍 드리우는 아쉬움도 있다. 선조들의 활쏘기는 양궁이 아닌 국궁이었다. 국궁의 설자리가 좁아지는 아쉬움이 크다.


작가 소개

프레더릭 레이턴(Frederic Leighton 1830. 12. 03 영국 요크셔주 스카버러 출생, 1896. 01. 25 런던 켄싱턴 사망)경은 19세기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가 중 한 명이다.

아버지는 의사였고 할아버지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러시아 왕실의 주치의였으며 그곳에서 많은 부를 축적했다. 어렸을 때부터 여행은 레이턴의 삶의 일부였다. 유럽 전역을 광범위하게 여행했으며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레이턴이 초기에 피렌체, 로마, 파리의 명소에 노출된 것이 후기의 광범위하고 생생한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 레이턴이 진정으로 자신의 재능을 개발하기 시작한 것은 폰 슈타인레Eduard von Steinle(1810-1886)의 지도 아래 뮌헨에서였다. 폰 슈타인레는 기독교 예술의 진정한 영성을 고취시킨 독일 나사렛 운동의 빛나는 별이었다.

1850년대 중반에 성장한 새로운 미학은 무엇보다 아름다움을 강조했으며, 미학 철학이 레이턴에게 그의 경력 전반에 걸쳐 영감을 주었다. 레이턴은 그의 첫 번째 위대한 그림인 <치마부에의 마돈나>(1853-55)를 제작했다. 1855년에 그는 왕립 아카데미의 여름 전시회에 이 작품을 제출했다. 너무 커서 (222 × 521 cm) 1855년 왕립 아카데미에 전시할 때 그 공간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우려가 많았었다. 현재 영국 왕실 콜렉션에서 대여하여 국립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빅토리아 여왕이 이 작품을 구입하면서 레이턴은 예술계의 저명한 인물이 되었다.

1859년 레이턴이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Dante Gabriel Rossetti(1828-1882)와 존 에버렛 밀레이(1829-1896)를 만났다. 1864년 왕립 아카데미의 준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868년 정식 그곳 학자가 되었다. 1878년에는 왕립 예술 아카데미의 회장이 되어 18년 동안 역임했다. 그곳에서 레이턴은 젊은 예술가들을 가르쳤다. 그의 제자 조각가 하모 소니크로프트Hamo Thornycroft(1850-1925)는 ‘레이턴은 가장 활력이 넘치고 학생들을 돕기 위해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영감을 주는 마스터였다’고 회고한다.

John Everett Millais

레이턴의 로얄 아카데미 동료 왓츠George Frederic Watts(1817-1904), 프린셉Val Prinsep(1838-1904), 소니크로프트Hamo Thornycroft는 19세기 예술가들의 비공식 그룹 홀랜드파크 서클을 결성했다.

레이턴은 역사적, 신화적, 종교적 주제에 대한 대중적인 그림으로 유명해졌다. 그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진보적인 사고를 발전시킨 매우 개방적인 사람이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에서는 제국의 절정기에 진보사상은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레이턴은 처음에 사회와 동시대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 그의 스타일은 이국적이고 에로틱한 상징주의 신화에 기대면서 라파엘 전파의 꿈과 같은 생생함을 예시한 일종의 초현실적인 신고전주의로 점차 발전했다.

1860년대 후반에 런던 서부에 호화로운 스튜디오 집을 지었고, 이 집은1898년 레이턴을 기념하는 박물관이 되었다. 레이턴은 1878년에 기사 작위를 받았고 1896년에는 심부전으로 사망하기 직전에 귀족 작위를 받은 최초의 화가가 되었다. 문체와 풍경에 대한 모험심이 강한 화가였으며, 그는 조각 작품도 많이 남겼다. 초기 조각 작품은 1855년 친구 로버트 브라우닝 Robert Browning (1812-1889) 아내의 묘를 장식하는 조각이었다. 이 조각품은 플로렌스의 영국 묘지에 남아 있다.

프레더릭 레이턴은 1896년 세인트 폴 대성당에 묻혔다.

 

낯선 말 풀이

주연酒宴 – 술을 마시며 즐겁게 노는 간단한 잔치.

전복戰服  - 조선 후기에, 무관들이 입던 옷. 깃, 소매, 섶이 없고 등솔기가 허리에서부터 끝까지 트여 있다. 고종 때에 소매가 넓은 옷을 못 입게 하면서 문무 관리들이 평상복으로 입게 되었고 오늘날에는 어린이들이 명절에 입기도 한다.

고풍古風  - 임금이 활을 쏘아 적중하면 임금 곁의 신하가 축하의 의미로 상을 청하는 풍습 또는 임금이 활을 쏜 내역과 하사품을 수록한 문서
 시위       - 활대에 걸어서 켕기는 줄. 화살을 여기에 걸어서 잡아당기었다가 놓으면 화살이 날아간다.


1 https://sillok.history.go.kr/id/kaa_000030

2 https://sillok.history.go.kr/id/kaa_000053

3 https://sillok.history.go.kr/id/kva_11610022_002 

4 http://db.itkc.or.kr/inLink?DCI=ITKC_KP_B001A_0400_010_0010_2020_003_XML 

5 https://sillok.history.go.kr/id/kaa_00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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