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과 서양의 풍속화
농경사회는 정착하는 시대인데 행상은 떠돌이이다. 정착하여 생활할 수 있는 기반이 전혀 없거나, 농사나 수공업 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으므로 행상에 나서는 사람들이 많았다. 행상의 밑천은 팔 물건을 사고, 운반에 필요한 말이나 소를 장만할 정도면 됐다. 그것 마저도 없는 사람들은 물건을 운반하는 데 필요한 근력을 바탕으로 지게와 광주리에 짐을 싣고 장사길에 나섰다. 이 그림의 행상이 그런 모습이다.
부부가 함께 다니는 행상도 있었고, 어린 아이까지 데리고 다니는 가족 행상들도 있었다. 그런 경우엔 당연히 여자도 행상이 된다. 이 그림은 조선시대에 여성 상인이 활동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해준다. 바닷가 주변에서는 어부의 아내들이 광주리에 생선을 담아 머리에 이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직접 파는 경우가 많았다.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 <어물장수>에서 어촌 여인들이 생선행상에 나선 것을 볼 수 있다.
시대에 따라 행상을 장려하기도 하고, 억제하기도 했다.
통일신라와 고려는 상업을 억제하지 않았고, 대외무역도 활발하였다. 오히려 하층민을 위하여 상거래를 촉진하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의 조정에서는 행상을 등록시키고 세금을 부과해 행상이 지나치게 많아지는 것을 억제했다.
선왕이 공상세(工商稅)를 제정한 것은 말작(末作 공ㆍ상업(工商業)을 말함)을 억제하여 본실(本實 농업)에 돌아가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전에는 공(工)ㆍ상(商)에 관한 제도가 없어서 백성들 가운데서 게으르고 놀기 좋아하는 자들이 모두 공과 상에 종사하였으므로 농사를 짓는 백성이 날로 줄어들었으며, 말작이 발달하고 본실이 피폐하였다. 이것은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신은 공과 상에 대한 과세법을 자세히 열거하여 이 편을 짓는다. 이것을 거행하는 것은 조정이 할 일이다.” 『삼봉집』 권7 「조선경국전 상」 <부전賦典 공상세工商稅> 1
태종7년(정해,1407)에는 행상에게 행장(行狀 여행허가서, 영업허가증)을 발급하고, 행장이 없는 자는 도적으로 논죄한다고 하였다. 행장발급의 목적은 상업억제, 세금징수, 물가조절, 호구파악, 치안유지, 국내비밀보호, 기존 행상 보호 등을 위한 것이었다.
태종7년 (정해, 1407) 10월9일(기축) 기록.
"동북면(東北面)·서북면(西北面)은 지경(地境)이 저들의 땅과 연접하여 있으니, 그 방면으로 들어가는 행상(行商)은, 서울 안에서는 한성부(漢城府)가, 외방에서는 도관찰사(都觀察使)·도순문사(都巡問使)가 인신행장(印信行狀)을 만들어 주고, 행장(行狀)이 없는 자는 일체 계본(啓本)에 의하여 엄하게 금지할 것입니다." 2
시대가 처한 상황에 따라 농업과 상업에 대한 권장과 제한이 이뤄졌다. 농업이 어려울 때는 상업을 억제하고, 상업에 치우칠 때는 농업을 권장했다.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신분에 기초한 사회는 생업에 기초한 사회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정조는 양반이 상업을 천시하는 것을 비판했다. 대대로 경상卿相을 지낸 집안이라 하더라도 한번 벼슬길이 끊기면 자손들이 곤궁하여 떨쳐 일어나지 못하고 심지어는 걸식까지 하는 지경에 처하게 됨을 한탄했다. 중국에서는 비록 각로閣老라 하더라도 은퇴하여 한가히 지내게 되면 스스로 행상을 하기 때문에 가난한 지경에 이르지는 않는다며 생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행상은 걸어다니는 만물상이다. 행상이 취급하는 품목은 농민들이 생산할 수 없는 수공업품, 직물과 지필묵, 유기그릇과 솥 같은 금속품, 해산물 등이었다. 바다와 가까운 마을에서는 생선을, 바다와 거리가 먼 곳에는 건조해산물, 절임 어류, 소금을 판매했다. 농산물을 직접 사고팔고 교환하기도 했다. 바깥 출입이 제한된 여성들에게도 필요한 물품을 행상이 공급했다. 방물장수가 빗, 바늘, 장신구 등을 취급할 뿐만 아니라 폐쇄적인 지역사회에 다른 지방의 소식을 전하는 신문 같은 역할도 했다. 여러 고을을 떠도는 방물장수가 혼인을 중매하는 일도 많았다. 농사에 필수품인 농기구 행상도 있었고, 부잣집에 보석이나 장식품을 판매하기도 했다. 보자기에 물건을 싸서 들고다니거나 머리에 이고 다니는 행상을 봇짐장수, 또는 보부상이라고 불렀다.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search/view?relicId=39197
김홍도 <행상> 《단원풍속도첩》 조선시대, 종이 수묵담채 27.7 X 23.8cm. 보물527호. 본관6504-25 ⓒ국립중앙박물관
그림을 보자마자 바로 생각나는 단어는 ‘남부여대男負女戴’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살 곳을 찾아 이리저리 떠돌아다닌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사자성어인데 그림 속 행상 부부의 짐을 이고 진 모습이 그러하다.
종이책 출간으로 설명 일부를 삭제함.
신윤복 <어물장수> 비단에 수묵담채, 28.3x19.1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CC BY 공유마당.
https://www.mutualart.com/Artwork/Two-Peddlers/6C5C72C900AD51B7
아드리안 반 드 벤느Adriaen Pietersz van de Venne <두 행상Two peddlers> 판넬에 유채, 33x26cm. 개인소장, 네덜란드.
그림 왼쪽 아래에 펼쳐진 띠(밴드롤banderole)에는 “이익에 관한 모든 것(om de winst te doen)”이라는 글이 기록되어 있다. 그림에 써넣은 문장이 온 몸에 물건을 든 행상의 캐리커처 묘사를 더욱 실감나게 한다. 반 드 벤느는 일반적으로 사회적 수준이 낮고 소외된 구성원들을 그려왔다. 그들은 도덕적으로, 때로는 신체적으로 기형이었다. 그러한 과장은 그들의 반문명화된 행동을 강조한다.
이 그림의 인물을 살펴보자. 행상 부부가 있다. 여자는 너무 많은 모자를 들고 있고, 두 손에 넘쳐 머리에도 몇 개 올려 놓았다. 남자는 주전자와 물통과 물컵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지금 시점에서는 그저 행상일 뿐이지만 당시에는 이 정도 물건을 가지고 다니는 행상은 욕심이 많은 사람으로 여겼다. 행상이 가능하면 많은 물건을 가지고 다니며 파는 것은 당연한 일일텐데 많은 물건들을 지니고 다니는 돈 많은 행상 부부라고 비웃었다. 반 드 벤느는 인간 사회의 탐욕을 리얼리즘으로 가득 찬, 다소 사악하고 암울한 방식으로 정기적으로 비판해 왔다. 행상까지도 탐욕스러운 자로 여기다니… 그가 자본주의 사회에 살게 됐다면 얼마나 혼란스러워 했을까.
그림의 제목은 단순히 영어의 <행상, peddler>이라고 했으나 원제는 반드롤에 쓰여진 문구를 내세운 것이었다. <이익에 관한 모든 것 om de winst te doen>이다.
상설시장과 점포가 늘어나고 철도와 도로가 개설되는 등 자본주의 경제가 발전하기 시작한 20세기에 행상은 점차 사라졌다. 물론 지금도 방문 판매가 있긴 하지만, 이 그림의 행상과는 다른 모습이다.
현재는 월드와이드앱(WWW)으로 온 세상 뉴스를 실시간으로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전하는 중요한 사항은 방을 써서 붙이고, 대소사는 입소문으로 돌고 돌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알게되었다. 이런 시대에 행상은 걸어다니는 정보원이었다. 김홍도와 반 드 벤느의 그림 속 행상도 몸에 지닌 많은 물건과 함께 여러 마을의 소식들을 전파하며 다녔을 것이다.
김홍도의 부부 행상이 이윤을 남겨 세 식구가 먹을 걱정없이 지내기를, 아이의 처네도 하나 마련하기를 바란다. 아드리안 반 드 벤느의 행상 부부도 많은 이윤을 남겨 도보장수로 열심히 일한 대가를 누리기를 바란다.
작가 소개
아드리안 반 드 벤느(Adriaen van de Venne, 1589년 네덜란드 델프트 출생, 1662. 11. 12 덴 하그 사망)는 책 삽화가, 인쇄 디자이너, 정치 선전가, 시인이다. 유명한 출판사이자 미술품 딜러인 그의 형제 얀Jan과 협력했다. 부모는 다른 많은 플랑드르 개신교인들와 마찬가지로 종교적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로 피신했다. 아버지는 가족과 함께 델프트Delft에 정착한 리에Lier 출신의 과일 장수였다.
반 드 벤느는 유머 장르 장면을 전문으로 하는 예리한 관찰자로서 유머 감각이 뛰어난 시인이었다. 그는 회화와 시의 결합을 주장하며 자신의 예술을 "Sinne-cunst", 즉 "감각의 예술, 위트의 예술"이라고 설명했다. 시와 회화의 융합은 위트, 모호함, 은폐와 같은 문학적 원리가 회화에 적용됨을 뜻한다.
그의 그림에 삽입되는 밴드롤에 쓴 글은 그림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아니다. 감상하는 사람에게 해석하고 함께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금세공인이자 화가인 시몬 드 발크Simon de Valk에게 사사했고, 후에 예로니무스 반 디스트Jeronimus van Diest(1631-1687)에게 판화와 그리자유(grisaille / greyed) 회화를 배웠다. 우화, 장르 주제 및 초상화, 미니어처, 책 삽화 및 정치적 풍자를 위한 디자인을 그렸다.
1614년 질란트Zeeland의 수도인 미델부르크Middelburg로 이사하여 대大 얀 브뤼헐Jan Brueghel the Elder(1568-1625)의 작품과 그의 아버지 대大 피터 브뤼헐Pieter Brueghel the Elder(1526-1569)의 풍자적이고 도덕적인 농민 삽화의 영향을 받았다. 판화예술은 미델부르크에 있는 출판 인쇄소에서 형제 얀을 도우며 쌓아온 경험을 통해 친숙한 매체였다. 판화는 그가 주장했던 시와 회화의 결합을 실행하기에 좋은 장르였다. 글과 이미지의 조합은 자신의 작품에서 전하려고 했던 교훈적이고 도덕적인 가치를 강조하기에 적합한 영감의 원천이었다.
1620년부터 반 드 벤느는 농민, 거지, 도둑, 바보를 현대 속담과 속담의 삽화로 묘사한 수많은 그리자유 작품을 만들었다. 1625년에 세인트 루크 길드의 회원이 되었고, 1631-32년, 1636-38년 및 1640년에 길드장을 역임했다. 그는 책과 판화 프로젝트를 계속했다.
그리자유(grisaille / greyed)는 16세기 중엽부터 18세기에 걸쳐서 실시되었다.
방법은 처음에 회색조grey로 사물의 모델링을 밑칠하여 완전히 마른 후 그 위에 원하는 빛깔을 투명색으로 덮어 씌운다. 위에 채색되는 빛깔은 밑의 회색에 의하여 명암이 잘 조화된 색조로 보이게 된다. 투명색의 이러한 취급을 글레이징glazing이라고 하는데, 오늘날에도 활용되고 있다. 많은 그리자유에는 약간 더 넓은 색상 범위가 포함된다. 갈색으로 칠해진 그림을 브루나유brunaille, 녹색으로 칠해진 그림을 베르다유verdaille라고 한다.
반 드 벤느는 네덜란드에서 예술가의 독립적 지위와 사회적 지위 향상에 주력하는 그룹인 콩프레리 픽투라Confrerie Pictura (화가조합)의 창립 멤버 중 한 사람으로 예술에 대한 보다 학문적인 접근을 장려했다.
낯선 말 풀이
처네 - 이불 밑에 덧덮는 얇고 작은 이불. 겹으로 된 것도 있고 솜을 얇게 둔 것도 있다.
행전 - 바지나 고의를 입을 때 정강이에 감아 무릎 아래 매는 물건. 반듯한 헝겊으로 소맷부리처럼 만들고 위쪽에 끈을 두 개 달아서 돌라매게 되어 있다
1 http://db.itkc.or.kr/inLink?DCI=ITKC_MO_0024A_0100_010_0070_2003_A005_XML
2 https://sillok.history.go.kr/id/kca_10710009_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