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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Dec 03. 2021

한국의 풍속화 -우리 역사의 사진첩

조선과 서양의 풍속화

우리나라 풍속장면은 청동기시대의 암각화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구려 무덤벽화의 회화를 거쳐 어떤 방법으로든 사람들의 생활상은 계속 그려졌다. 

풍속화는 특정 시기에만 그려진 것이 아니라 어느 시대에나 다양한 표현방식으로 그 시대의 시대상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풍속화라고 하면 18세기 무렵에 본격적으로 유행한 그림을 말한다. 조선 정조연간에서 순조초까지 그 절정기를 이룬다.

기록을 목적으로 관료들의 모임을 그린 계회도契會圖, 교훈적인 내용을 담은 감계화鑑戒畵, 가계나 개인 일생의 영광스러운 장면을 그린 평생도, 서민 촌부와 여인들의 모습까지도 모두 풍속화에 포함할 수 있다. 다양한 인물을 정확히 묘사하고 배경까지 그려야 하는 풍속화는 오랜 숙련의 과정을 거쳐야만 완성도 높은 수준에 이를 수 있다. 

 

선사시대 풍속화

인간의 생활사를 기록한 흔적들이 선사시대 유적이나 유물에 남아있다. 암각화나 청동기에 음각으로 새겨진 그림이 초창기의 풍속화라 할 수 있다. 청동기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울주대곡리반구대암각화>는 태화강변에 살던 사람들의 생활상이 담겨있다. 고래와 거북 등 물짐승과 호랑이 사슴 멧돼지 등의 뭍짐승, 사람이 사냥하는 장면, 무당의 생활 장면이 새겨져 있다. 인물의 감정 표현과 상황의 묘사가 생생하다. 예술적 감각이라기 보다는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인 다산을 축원하는 그림, 생존에 필요한 식량을 구하는 농경 수렵 어로 장면을 그린 일종의 기록화이다.

방패형 모양 청동기 뒷면에 농부가 밭갈이를 하고 곡식을 항아리에 담는 장면이 그려진 <농경문청동기>(국립중앙박물관 소장)도 일종의 풍속화이다. 


<농경문청동기> 한국, 초기철기, 동합금. 길이 13.5cm. 국립중앙박물관  

<농경문청동기>라고 제목을 붙인 것처럼 그림 내용에 농경의 장면이 있다. 밭에서 농기구를 사용하는 사람이 있는데 따비와 쟁기를 또렷이 묘사했다. 금속 농기구의 사용을 실감할 수 있는 그림이다. 

반구대암각화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삼국시대, 발해시대 풍속화

고구려시대에는 4세기후반~5세기에 조성된 고분 벽화에 초상·풍속도가 유행하였다. 묘 주인의 초상화 행차도 수렵도 생활도 투기도 문지기도 등이 있다.

<안악3호분>에는 벽화 영화永和13년(357)의 묵서명墨書銘이 있다. 이 고분 벽화는 가장 이른 시기에 그려진 초상 풍속도로 묘 주인과 부인의 초상화가 그려져있다. 서측실 서벽에 묘 주인의 초상화가 정면으로 보이고, 같은 서측실 남벽에 부인이 주인을 향한 모습으로 배치되었다. 풍속화라 할 수 있는 장면은  동측실과 전실에 있는 벽화인데 부엌에서 음식을 장만하는 장면, 우물가에서 물을 긷는 장면, 수박(手搏 주먹으로 공격)하는 장면, 방아 찧는 장면, 뿔 나발을 부는 장면 등 여러 생활 모습이 보인다.

 

<약수리벽화고분> · <장천1호벽화고분> · <무용총> · <각저총> · <쌍영총> 등 5세기에는 고구려적인 특색이 짙고 불교적인 소재가 증가한다. 묘 주인의 초상에는 부부가 함께 나란히 그려진 경우가 많아지고, 수렵 씨름 전투 놀이 장면 등 풍속도의 내용이 다양해진다.

<무용총>에서는 묘 주인이 스님을 집에 초대하여 말씀을 경청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장천1호분>에서는 한 벽면에 그려진 다양한 풍속 장면 사이에 연봉오리를 흩뿌린 장면이 있어 불교적인 염원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풍속도의 인물화는 점무늬 옷, 끝단이 주름무늬인 웃옷, 대님을 맨 바지 등을 입은 모습인데 이는 고구려의 전형적인 복식이다.

*참고; 

묘墓- 일반 사람의 무덤. 

능/릉陵- 왕, 왕비의 무덤. 원園- 세자와 세자빈, 세손과 세손빈, 왕의 생모와 생부가 묻힌 무덤. 

총塚릉陵에서와 같은 유물이 발견되나 신분이 밝혀지지 않은 무덤. 고분古墳-옛 무덤으로 추정되는 봉우리 형태의 모든 무덤.

 

백제에는 지금까지 이렇다 할 만한 풍속화가 발견되지 않았다.

신라시대에는 고분 벽화, 고분 출토품, 塼에 그려진 그림에서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순흥읍내리벽화>는 문지기가 이 고분 벽화의 주제이다. 고분 출토품인 천마총에서 출토된 관의 차양 도구에 그려진 <기마인물도 (국립경주박물관 소장)>에는 창을 수평으로 들고 말을 타고 달리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일반적인 생활상을 그린 풍속도는 아니다.

<덕흥리벽화고분>·<무용총>·<매산리 사신총> 등의 수렵 장면은 고구려 5세기 고분 벽화와 연관이 깊다. 경주시 사정동 절터에서 수습된 <수렵문전> (국립경주박물관 소장)은 전塼에 새겨진 문양이 선의 표현이 가늘고 균일하다.  말의 머리에 콧등과 평행하게 근육의 선이 표현되고 갈기를 선 하나하나로 표현한 점에서 수隋·당唐의 양식과 연관성도 엿보인다.


무용총 수렵도 CC BY 공유마당.  


발해시대의 풍속화

<정효공주묘벽화>의 인물은 철선묘로 윤곽을 풍만한 모습으로 그리고 채색하였다, 옷에 꽃무늬까지 세세하게 표현했다.


발해시대

<정효공주묘 벽화>의 동··북쪽 널방, 동쪽과 서쪽 벽화는 발해 사람의 모습을 처음으로 보여준다. 인물은 철선묘로 윤곽을 풍만한 모습으로 그리고 채색하였다, 옷에 꽃무늬까지 섬세하게 표현했다. 뺨이 동글고 통통한 당나라 인물화를 닮았다. 무사武士, 시위侍衛, 내시內侍, 악사 등 열 두 명이나 인물이 그려졌는데 정작 주인공은 그림 속에 없다. 인물은 대체로 뺨이 둥글고 얼굴이 통통한 당나라 화풍을 보여주고 있다. 현전하는 유일한 발해무덤 벽화이다.


고려시대 풍속화

고려시대에는 풍속화가 그다지 활발하게 발달하지 않았다.

<수렵도>(국립중앙박물관)에는 호복胡服변발辮髮을 한 인물이 말을 타고 달리거나 활 시위를 당기는 모습이 그려져있다. 공민왕恭愍王(1330-1374)이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 인물 말 산을 선명하게 채색한 세밀화이다.

고사故事인물화 <태위공기우도太尉公騎牛圖>는 최당崔讜(1135-1211)이 공직에 봉사하다가 말년에 소를 타고 세상을 등지는 모습을 담은 사인 풍속화이다. 불화에도 풍속화가 등장하는데 풍속 표현은 핵심 주제가 아니고 부차적인 소재로서 그려졌다. <미륵하생경변상도彌勒下生經變相圖>(일본 지은원知恩院, 친왕원親王院 소장)에는 하단에 조그맣게 배치된 밭 가는 장면과 추수하는 장면이 그려져있다.

사경이나 불경 판화의 변상도變相圖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오른쪽에 설법도가 그려져 있고 왼쪽에 여러 경전의 장면이 설화적 구조로 펼쳐져 있다. 여기서 왼쪽의 경전 장면 가운데 환난의 장면, 지붕 이는 장면 등 여러 풍속 장면을 발견하게 된다. 이들 풍속 장면은 철선묘로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다.

 

조선시대 풍속화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풍속화가 가장 발달하였다. 반상班常의 구별없이 사람들의 실생활과 감정, 옷차림 등을 실감나게 묘사하였다. 간략한 선으로 사람과 풍경을 묘사하고, 과감한 생략을 통해 등장인물들의 행동을 부각시켰다.

봉건 사회의 변동기에 신분사회 구조의 경계가 흐려지기 시작하면서 풍속화는 일반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조선의 근대사회는 예술에서 인간주의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선비화가 윤두서가 시작한 풍속화에서 화가는 보수적 세력이지만 그림 속 등장인물은 일반 민중인 것이 특징이다. 그를 이어 여러 중인계급 화원들이 풍속화의 예술성을 끌어올렸다. 

풍속화의 개념을 ‘해학’과 ‘풍자’로 정의하는 것이 일반화되었으나 좀더 깊이 들어가보면 풍자와 해학은 서로 다른 개념이다. 풍자는 비난과 비판의 의도로 시행한다. 반대편에 쏘아대는 언어의 화살, 이미지로 보여주는 경고이다. 현실을 직시하라는 신호이다. 조롱의 웃음이고 공격적이다. 깨닫고 개선하기를 바라는 교훈적 의미도 포함된다. 해학은 풍자와 같은 웃음을 자아내지만 비난의 독소를 품고있지는 않다. 아무런 해가 없는 단순한 웃음이다. 대상에 대한 연민을 느끼게 되는 익살, 일반적인 웃음이다. 일종의 쾌락이기도 하다. 문학에서는 이를 “골계미 滑稽美라고 한다. 

 

정조가 자비대령화원을 뽑을 때 속화俗畫를 요구한 기록이 남아있다. 풍속화의 자리가 확실해진 것이다. 정조 이후 순조시대에도 화제로 속화를 내는 일이 이어졌다. 1779년(정조 3) 1월부터 1883년 (고종 20) 2월까지 규장각 각신들에 의해 기록된 규장각 일기 『내각일력』에서 기록을 살펴본다.

내각일력內閣日曆』 [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정조10년(병오,1786) 8월 25일(을축) 기록.
畵員祿取才三次畫題望俗畫內閣校書北營射帿玉堂調鶴副望 落點 2

(화원 녹취재 3차 화제망 속화 내각교서 북영사후 옥당조학 부망 낙점)

화원에 대한 3차 녹취재의 화제 후보는 속화俗畫로 내각의 교서, 북영의 사후(활쏘기), 옥당의 조학(학을 길들임) 중 두 번째 즉 북영사후北營射帿를 택했다는 뜻이다.


정조13년(기유, 1789) 6월 13일(정묘) 기록.
差備待令畵員來秋等祿取才三次畫題望俗畫漕船點檢稻田午饁畵員試才三望擬入畫題望單以各從自願皆以看卽噱噱者畵之 書下 3 

(자비대형화원 래추등 녹취3차화제망 속화 조선검검 도전오합 화원시재 3망 의인화제망 단이각종자원개이 간즉갹갹자화지 서하)

자비대령 화원에 대해 오는 가을 3차 녹취재의 화제 후보. 속화. 조선점검漕船點檢, 도전오합稻田午饁(들밥), 화원시재畵員試才의 세 가지 제목을 후보로 정해서 (임금에게) 들였는데 (임금이) “화제의 망단望單(일종의 문제지)에서 각자 원하는 대로 하되 모두 보는 즉시 크게 웃을 것으로 그리라.”라고 써서 내렸다. 

순조03년(계해, 1803) 3월 29일(계해) 기록
差備待令畵員去壬戌春等祿取才畫題望俗畫賣花調馬闘鷄首望 落點限再明日 4

(자비대령화원 거임술춘등 녹취재 화제망 속화 매화 조마 투계 수망 낙점 한재명일)

자비대령 화원의 지난 임술년(1802, 순조2) 춘계 녹취재의 화제 후보. 속화. 매화賣花, 조마調馬, 투계闘鷄. 수망首望(매화)에 점을 찍어 내리고, 모레까지 그려서 제출하게 하였다.

(去壬戌春等: 원래 1802년에 시험을 치러야 했는데 사정이 있어 1년이 미루어진 듯.)


조선 전기의 풍속화 - 1392년부터 16세기까지.

궁중 수요의 풍속화로서 빈풍칠월도豳風七月와 경직도耕織圖가 주류이다. 빈풍도는 <시경詩經>의 빈풍칠월편(칠월七月, 치효鴟동산東山, 파부破斧, 벌가伐柯, 구역九낭발狼跋) 내용을 모두 그린 그림이다. 특히 백성들의 생업인 농업이나 잠업과 관련된 풍속을 읊은 칠월편의 내용만 그리는 경우가 많아 ‘빈풍칠월도豳風七月圖’라고도 불린다.

조선시대에는 칠월편을 8장면으로 구성한 빈풍칠월도가 주로 제작되었다. 빈풍도의 역할은 역대 통치자들에게 백성들의 노고와 고충을 생각하게 하는 교훈적 그림이었다. 1402년에 제작된 것이 기록상으로 확인된다. 1402년(태종 2) 4월에 예조전서 김첨金瞻(1354-1418)이 빈풍도를 바쳐 태종이 내구마內廐馬를 하사하였다는 기록은 있으나 그림은 남아있지 않다.


이방운 <빈풍칠월도첩> 조선. 비단에 채색. 34.8x25.6x2.6cm. ⓒ국립중앙박물관 
 

1424년(세종 6년)에는 세종의 지시에 의하여 조선식의 빈풍칠월도를 제작했다. 백성들의 어려운 생활을 담은 그림을 월령 형식으로 제작하라고 지시하였다. 또 1433년(세종 15)에 다시 경연에서 조선의 풍속을 바탕으로 한 조선식 빈풍칠월도를 제작하라고 집현전에 지시를 내렸다. 

세종 15년 (계축, 1433)  8월 13일(계사) 기록.
“내가 빈풍칠월도豳風七月圖를 보고 그것으로 해서 농사짓는 일의 힘들고 어려움을 살펴 알게 되었는데, 나는 보고 듣는 것을 넓혀서 농사일의 소중한 것임을 약간 알지마는, 자손들은 깊은 궁중에서 생장하여 논밭 갈고 곡식 가꾸는 수고로움을 알지 못할 것이니, 그것이 가탄할 일이다. 예전에는 비록 궁중의 부녀들이라도 모두 누에치고 농사짓는 책을 읽었으니, 빈풍豳風에 모방하여 우리 나라 풍속을 채집하여 일하는 모습을 그리고 찬미하는 노래를 지어서, 상하 귀천이 모두 농사일의 소중함을 알게 하고 후손들에게 전해 주어서 영원한 세대까지 보아 알게 하고자 하니, 너희들 집현전에서는 널리 본국의 납세·부과금·부역·농업·잠업 들의 일을 채집하여 그 실상을 그리고, 거기에 노래로 찬사를 써서 우리 나라의 칠월시 七月詩를 만들라." 1

경직도는 1498년(연산군 4년)에 정조사正朝使 권경우權景佑(1448-1501)에 의하여 명나라로부터 <누숙경직도樓璹耕織圖>를 들여온 이후 제작했다. 경직도耕織圖(농사,  누에치고 비단짜는 일을 그림)는 백성들을 유교적인 덕목으로 교화시키기 위하여 제작한 고사인물화이자 풍속화이다.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는 한 화면에 1∼7장면의 설화의 내용을 배치하는 다원적 구성이다.

사인풍속도는 사대부의 생활상을 그린 것으로 사대부 일생에서 기념이 될 만한 일들을 그린 풍속화이다. 수렵도, 계회도, 시회도, 설중방우도雪中訪友圖, 평생도 등의 주제가 유행하였다. 출세와 입신양명을 보여주는 오늘날의 기념사진과도 같다. 그림의 구성은 돌잔치, 혼인, 회갑 등과 같은 통과의례나 과거급제 후 삼일동안 인사를 다니는 삼일유가三日遊街, 벼슬길과 부임행차 장면 등으로 되어 있다. 계회도는 같은 관청에 근무하는 관원들이나 과거 합격 동기생 등의 특별한 만남이나 기념할 일이 있을 때 제작한 그림이다. 계회도를 포함한 기록화는 그것을 소유한 개인에게는 관직의 이력을 상징하는 기록물이기도 하다. 이들 작품은 상단에 계회의 표제를 적고, 중단에 계회 장면을 간략하게 표현하며, 하단에는 참석자의 인적 사항을 적는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현재 행사장면을 사진찍고 그 내용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과 같다. 

서민풍속화로는 정세광鄭世光(생몰연도 미상)의 작품으로 전하는 <어렵도 漁獵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윤정립尹貞立(1571-1627)의 <행선도行船圖>등이 있다. 이들 그림은 본격적인 풍속화라기 보다는 서민들의 생활상을 내용으로 하는 산수 인물화라 할 수 있다.

조선 불화 감로도甘露圖에는 풍속화가 확연하게 나타나 있다. 하단에 환난, 놀이, 풍속 장면 등의 욕계가 묘사된다. 조선 후기의 불화인 감로탱화는 종교미술에 속하지만, 여기에 묘사된 인간의 모습에는 행복과 욕망에 대한 추구와 당대의 생활상이 잘 드러나 있어 풍속화의 범주에 둘 수 있다. 하단의 장면은 시대에 따라 내용, 비중, 전개와 방법, 공간감, 인물 표현 양식 등이 달라진다. 즉, 이 부분이 조선시대 풍속화 양식의 지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의 풍속화

조선후기는 봉건사회의 변동기, 봉건사회의 해체기라 할 수 있다. 조선의 치국이념, 지배이념인 성리학적 신분 사회의 구조가 느슨해졌다. 풍속화는 이 변혁기의 사회 모습을 기록했다. 기록은 마치 사진같았고, 사실주의 회화의 시대를 열었다.

조선 후기의 풍속화는 사·농·공·상 사민들의 생활모습, 즉<동국풍속 東國風俗>을 전야田野풍속, 성시城市풍속, 시정市井풍속, 관아풍속과 세시풍속 등의 장면에 담아 낸 것이다. 17세기 말경의 숙종년간부터는 주로 속화로 불렸으며, 풍속화, 풍속도로 불리기도 했다. 속화는 원래 문인화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 저속한 그림이라는 뜻의 가치 개념이다. 조선 후기에 풍속화 또는 민화를 의미하는 개념으로 그 의미가 바뀌었다. 그림 속 주인공은 사회의 중심축으로 떠오른 민중이었다. 

17세기 이래로 명대 말기의 패관소설과 함께 유행했던 시정리민市井俚民의 일상을 그리는 풍조가 널리 퍼졌다.

숙종은 청대 <패문재경직도佩文齋耕織圖>를 수용했다. 이 경직도는 조선 후기 경직도에 새로운 도상과 표현 방식을 제공해 주었다. 1697년에 주청사奏請使  최석정崔錫鼎(1646-1715)등이 연경으로부터 가져와 진재해秦再奚(1691-1769)에 의하여 제직도題織圖와 제경도題耕圖가 제작되었다. <제직도>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8세기 후반, 정조와 순조 때 규장각 자비대령 화원의 녹취재를 위한 화제를 보면, 속화가 가장 많이 출제되었다. 당시 궁중에서 제작된 풍속화가 있다. 1792년 4월에 제작된 <성시전도城市全圖>는 태평성대를 과시하는 한편  『서경書經』 <무일편無逸篇>의 고사에 따라 임금이 백성들의 생활상을 늘 잊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빈풍도와 같은 의미이다.

조선 후기에는 이러한 궁중 수요의 풍속화와 더불어 서민 풍속화가 성행한 것이 특기할 만하다. 


<태평성시도> 조선. 비단에 채색, 113.6x49.1cm.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후기 서민 풍속화는 윤두서尹斗緖(1668-1715)와 조영석趙榮祏(1686-1761)등 사대부 화가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진보적인 시각으로 민중들의 삶을 자신의 예술세계로 끌어들인 것은 선비화가들이었다. 시골생활과 부지런한 생업 모습을 소경인물화小景人物畵의 구도로 나타내는 등, 전통적인 맥락에서 전개되기 시작했다. 풍속화는 처음에 하층민 생활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노동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수준에서 출발하였다. 윤두서는 새로운 시대와 문물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서민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지닌 실학자였다. 고전을 통한 이해가 깊은 그의 그림엔 중국 화본풍의 느낌이 짙게 풍긴다. 현장감보다는 관념적 느낌이 더 강하다. 

이와 같은 한정된 영역에서 벗어나 조영석은 간결하면서도 정확한 신감각의 담채 소묘풍으로 나타내면서 조선 후기 풍속화를 새로운 방향으로 개척했다. 그는 사농공상士農工商 사민四民들의 세속사를 전반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17세기의 전통적인 공간 개념에서 탈피하여 풍속화에 걸맞는 공간을 창출한 것이다. 서민들과 눈높이를 맞추어 서민들에게 다가갔다.

 “사물을 직접 마주하여 그 참모습을 그려야만 살아 있는 그림이 된다.”고 자신이 말한 사실주의적 사고와 잘 부합된다. 윤두서의 ‘실득實得’과 조영석의 ‘실사實  寫’의 차이로 여겨진다. 윤두서와 조영석이 선도한 서민 풍속화는 다음 세대의 김홍도金弘道(1745-1806?)와 신윤복申潤福(1758-1814?) 등의 화원에게로 전승되어 다시 한번 절정의 꽃을 피웠다. 

사대부 화가들의 선구자적인 노력은 18세기 후반 직업 화가인 화원들에 와서 비로소 그 결실을 맺게 된다. 화원은 신분의 성격상 사대부 화가에 비하여 표현의 제약이 적어지고 무엇보다도 백성의 정서적 색채를 짙게 표현하는 데 유리하였다. 다양한 주제의 풍속화가 그려졌다. 천민을 제외한 사士·농農·공工·상商의 사회구성원중 ‘사’를 제외한 농·공·상이 바로 서민에 해당하는 계층으로  서민풍속화의 주인공이다. 역사 속에 존재감 없이 살았던 서민들이 화폭 위에 주역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획기적인 일이다. 김홍도 신윤복 김득신金得臣 (1754-1822)등 당시 기라성 같은 화원들이 대거 참여함으로써 조선 후기 풍속화는 절정으로 치닫게 된다.

18세기 이후의 정치적인 안정, 경제적인 발전, 자아의식의 팽배, 실학에 대한 관심의 증대, 서민문학 등 서민의식의 성장과 함께 진전을 보게 된 것이다. 사농공상의 연중행사를 그린 사민도四民圖, 농사짓는 장면을 그린 가색도稼穡圖, 농경도의 일종인 관가도觀稼圖, 경작과 관련된 농포도農圃圖와 누에 치는 장면을 그린 잠도蠶圖 등을 들 수 있다. 지방관이 백성들의 절박한 생활상을 그려 왕에게 올린 안민도安民圖, 흉년에 백성들이 겪는 참혹한 실상을 그린 기민도飢民圖도 여기에 해당한다. 이 그림들은 백성의 생활 현실을 그대로 전해주는 생생한 시각자료이자 왕에게는 민생을 파악하는 국정 자료이기도 했다. 오늘날 현장 다큐멘타리 같이 생생한 그림이다. 

18세기에 유입된 청조淸朝문화의 영향은 컸다. 《당시화보》 《고씨화보》 《개자원화보》 등 여러 화보들은 기능면에서 마치 교과서 같은 역할을 했고, 그를 통해 접하게 된 서양화법은 사실주의 회화의 발전에 큰 영향을 줬다. 

 

김홍도는 삶의 이모저모를 익살스럽고 정겹게 표현하였다. 그의 풍속화는 마치 우리가 현장에 함께 있는 듯한 생생한 감동을 전해준다. 주변의 배경을 생략하고 인물을 중심으로 묘사한 것으로서 연습삼아 그린 작품처럼 보이면서도 투박하고 강한 필치와 짜임새 있는 구성을 띠고 있다.  김득신은 김홍도의 화풍을 계승하여 자신의 독자적인 그림세계를 개척한 화가이다. 돌발적인 상황 묘사나 인물의 성격 묘사, 능숙한 담채 사용에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였다. 화원들은 점차 경직 놀이 등의 건전한 생활상 뿐만 아니라 사회의 부정적이고 어두운 뒷면의 제재까지 다루게 된다.

김후신金厚臣(생몰년도 미상)은 <대쾌도大快圖>(간송미술관 소장)에서 당시 심각한 사회 문제로 여러 차례 영조가 금주령까지 내려 국가적인 차원에서 제재가 이루어진 음주 장면을 주제로 삼았다. 신윤복은 기녀와 벼슬 없는 한량의 모습 등 남녀간의 감정을 은근하게 나타냈다. 인물의 모습은 부드러운 필치로 그린 다음 청록, 빨강, 노란색 등으로 화려하게 채색하였다. 신윤복은 김홍도와는 달리 주변 배경을 치밀하게 설정하여 주변 분위기와 인물의 심리묘사에 치중한 점이 돋보인다. 통속 세계까지 긍정적인 인식을 갖게 된 것이다. 조선 후기의 풍속화는 삶의 현장을 묘사하는 사실성과 현장성, 그림 속의 풍물이 보여주는 시대성 등을 뛰어난 조형예술로 성취해 낸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왼쪽 김득신 <파적도/야묘추도> 조선후기. 종이에 담채, 22.5x27.1㎝ ⓒ간송미술관

오른쪽 김후신 <대쾌도> 조선후기. 종이에 담채, 33.7x28.2㎝ ⓒ간송미술관


19세기에는 풍속화의 제작이 더욱 활발해진다. 18세기 후반을 절정으로 작품성은 떨어지나, 대신 수요가 민간으로 저변화되고 19세기말에는 개항장 풍속화,  종교서나 교과서의 삽화 등 실용화된다. 화풍을 보면 한편으로는 김홍도의 화풍이 유행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양화풍 문인화풍 민화풍 등으로 다양해진다. 서양화풍의 영향이 뚜렷한 풍속화로는 신광현申光絢 (1813-미상)의 <초구招狗> (국립중앙박물관 소장)가 있다. 이 그림은 인물 건물 나무 등에 음영을 넣었을 뿐만 아니라 그림자까지 표현하여 서양화의 음영법에 대한 정확한 구사를 보여준다.


신광현 <초구(개를 부르는 아이)> 조선. 종이에 먹. 35.1x29.4cm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말에 개항하면서 ‘개항장 풍속도’라는 새로운 장르가 탄생하였다. 조선 말기와 근대기에 활동한 김준근金俊根(생몰년도 미상)은 원산, 부산, 제물포 등 개항장에서 서양인들을 대상으로 풍속화를 그려 판매하였다. 김준근이 그린 기산풍속도箕山風俗圖가 대표적인 개항장 풍속도이다. 조선 후기의 풍속화에서 볼 수 없던 형벌 제사 장례 굿 등을 소재로 다룬 것이 김준근 그림의 특징이다. 김준근의 풍속화는 조선 풍속화의 감상자와 향유층을 국외로 확대시켰다는 데 의미가 크다. 

 

사인 풍속도는 사대부의 생활상을 그린 것으로 사대부 일생에서 기념이 될 만한 일들을 그린 풍속화이다. 수렵도·계회도·시회도·설중방우도(雪中訪友圖)·평생도 등의 주제가 유행하였다. 출세와 입신양명을 보여주는 오늘날의 기념사진과도 같다. 그림의 구성은 돌잔치, 혼인, 회갑 등과 같은 통과의례나 과거급제 후 삼일동안 인사를 다니는 삼일유가(三日遊街), 벼슬길과 부임행차 장면 등으로 되어 있다. 계회도는 같은 관청에 근무하는 관원들이나 과거 합격 동기생 등의 특별한 만남이나 기념적인 일이 있을 때 제작한 그림이다. 계회도를 포함한 기록화는 그것을 소유한 개인에게는 관직의 이력을 상징하는 기록물이기도 하다. 이들 작품은 상단에 계회의 표제를 적고, 중단에 계회 장면을 간략하게 표현하며, 하단에는 참석자의 인적 사항을 적는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서민 풍속화로는 정세광(鄭世光)의 작품으로 전하는 <어렵도 漁獵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윤정립(尹貞立)의 <행선도 行船圖>(개인소장) 등이 있다. 이들 그림은 본격적인 풍속화라기 보다는 서민 풍속을 내용으로 하는 산수 인물화라 할 수 있다.

조선 불화 감로도(甘露圖)에는 풍속화가 확연하게 나타나 있다. 하단에 환난, 놀이, 풍속 장면 등의 욕계가 묘사된다. 조선 후기의 불화인 감로탱화는 종교미술에 속하지만, 여기에 묘사된 인간의 모습에는 행복과 욕망에 대한 추구와 당대의 생활상이 잘 드러나 있어 풍속화의 범주에 둘 수 있다. 하단의 장면은 시대에 따라 내용·비중·전개 방법·공간감·인물 표현 양식 등이 달라진다. 즉, 이 부분이 조선시대 풍속화 양식의 지표가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좌)잠직도(진재해,1697), (우)태평성시도


조선 후기 서민 풍속화는 윤두서와 조영석등 사대부 화가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전야풍속도 계열의 향촌의 즐거운 생활과 부지런한 생업 모습을 소경인물화(小景人物畵)의 구도로 나타내는 등, 전통적인 맥락에서 전개되기 시작했다. 풍속화는 처음에 하층민 생활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노동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수준에서 출발하였다. 윤두서는 새로운 시대와 문물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서민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지닌 실학자였다. 대표작인 <짚신삼기>에는 짚신을 삼는 평민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한정된 영역에서 벗어나 조영석은 간결하면서도 정확한 신감각의 담채 소묘풍으로 나타내면서 조선 후기 풍속화를 새로운 방향으로 개척했다. 그는 사·농·공·상 사민들의 시정세속사를 전반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17세기의 전통적인 공간 개념에서 탈피하여 풍속화에 걸맞는 공간을 창출한 것이다. 서민들과 눈높이를 맞춘 수평 시점을 적용하여 서민들에게 다가가고 있다.

 “사물을 직접 마주하여 그 참모습을 그려야만 살아 있는 그림이 된다.”고 자신이 말한 사실주의적 사고와 잘 부합된다. 윤두서와 조영석이 선도한 서민 풍속화는 다음 세대의 김홍도와 신윤복 등의 화원에게로 전승되어 다시 한번 절정의 시기를 꽃피웠다. 


(좌)유숙 <벽오사소집도>,  (우)이인상 <송하수업>




(좌) 이인문 <선동전차>,  (우) 심사정 <촌가여행>


19세기에는 풍속화의 제작이 더욱 활발해진다. 18세기 후반을 절정으로 작품성은 떨어지나, 대신 수요가 민간으로 저변화되고 19세기말에는 개항장 풍속화, 종교서나 교과서의 삽화 등 실용화된다. 화풍을 보면, 한편으로는 김홍도의 화풍이 유행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양화풍·문인화풍·민화풍 등 다양해지는 양상을 띤다.

서양화풍의 영향이 뚜렷한 풍속화로는 신광현의 <초구 招狗>(국립중앙박물관 소장)가 있다. 이 그림은 인물·건물·나무 등에 음영을 넣었을 뿐만 아니라 그림자까지 표현하여 서양화의 음영법에 대한 정확한 구사를 보여준다. 조선 말에 개항하면서 “개항장 풍속도”라는 새로운 장르가 탄생하였다. 조선 말기와 근대기에 활동한 김준근은 원산, 부산, 제물포 등 개항장에서 서양인들을 대상으로 풍속화를 그려 판매하였다.  김준근(金俊根, 19세기 후반에 활동)이 그린 기산풍속도(箕山風俗圖)가 대표적인 개항장 풍속도이다. 조선 후기의 풍속화에서 볼 수 없던 형벌, 제사, 장례, 굿 등을 소재를 다룬 것이 김준근 그림의 특징이다. 김준근의 풍속화는 조선 풍속화의 감상자와 향유층을 국외로 확대시켰다는 데 의의가 있다.


(좌)성협 <고기굽기>,  (우)이경윤 <송하대기도>


풍속화는 당시 사람들의 옷차림, 살아가는 모습 등을 실감나게 묘사하여 선조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풍속화는 당시 사람들의 옷차림, 살아가는 모습 등을 실감나게 묘사하여 선조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단순한 회화의 한 장르가 아니라 역사의 기록이다. 

 

낯선 말 풀이


따비      - 풀뿌리를 뽑거나 밭을 가는데 쓰는 농기구. 쟁기보다 조금 작고 보습이 좁게 생겼다. 청동기 시대의 유물에서 발견되는 점으로 미루어 농경을 시작하면서부터 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보습      - 쟁기, 극쟁이, 가래 따위 농기구의 술바닥에 끼우는, 넓적한 삽 모양의 쇳조각. 농기구에 따라 모양이 조금씩 다르다.

       - 흙을 구워 정사각형 또는 직사각형의 납작한 벽돌 모양으로 만든, 동양의 전통적 건축 재료. 여러 가지 모양과 무늬가 있으며 주로 바닥과 벽의 재료로 쓴다.

시위侍衛        - 임금이나 어떤 모임의 우두머리를 모시어 호위함. 또는 그런 사람.

호복胡服        - 오랑캐의 옷차림

변발辮髮       - 몽골인이나 만주인의 풍습으로, 남자의 머리를 뒷부분만 남기고 나머지 부분을 깎아 뒤로 길게 땋아 늘임. 또는 그런 머리.

변상도    - 경전의 내용이나 교리, 부처의 생애 따위를 형상화한 그림.

골계미滑稽美 - 미적 범주의 하나. 자연의 질서나 이치를 의의 있는 것으로 존중하지 않고 추락시킴으로써 미의식이 나타난다. 풍자와 해학의 수법으로 우스꽝스러운 상황이나 인간상을 구현하며 익살을 부리는 가운데 어떤 교훈을 준다.

녹취재祿取才  – 조선 시대에 예조에서 해마다 두 차례 또는 네 차례씩 행하던 취재. 녹봉을 받지 못하는 관리들에게 녹봉이 있는 벼슬을 주기 위해 행해졌다. 

취재取才         - 재주를 시험하여 사람을 뽑음.

사후射帿         - 활쏘기.

조학調鶴         - 학을 길들임.
패관      - 중국 한나라 이후, 민간에 떠도는 이야기를 모아 기록하는 일을 맡아 하던 임시 벼슬. 민간의 풍속과 정사(政事)를 살피기 위하여 이야기를 모으게 하였다.

패관소설 - 민간에서 떠도는 이야기를 주제로 한 소설

시정市井 - 인가가 모인 곳. 중국 상대(上代)에 우물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여 살았다는 데서 유래한다.



https://sillok.history.go.kr/id/WDA_11508013_001 

http://kyudb.snu.ac.kr:80/series/directView.do?itemcd=NGK&bookcd=GK13030_00&pyear=1786&pmonth=08&pyun=0&pday=25 

http://kyudb.snu.ac.kr:80/series/directView.do?itemcd=NGK&bookcd=GK13030_00&pyear=1789&pmonth=06&pyun=0&pday=13 

http://kyudb.snu.ac.kr:80/series/directView.do?itemcd=NGK&bookcd=GK13030_00&pyear=1803&pmonth=03&pyun=0&pday=29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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