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과 서양의 풍속화
오랜 역사를 말할 때 ‘선사시대’로부터 시작한다. 문자를 사용하기 이전,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시대이다. 선사시대는 어떻게 논의되는가. 석기, 청동기, 철기로 구분한다. 석기시대, 인류의 역사에서 돌은 근원적인 것이다. 기록된 역사중에 ‘석수’는 언제부터 있었을까? 석기 제작이 이루어졌던 시대에 ‘석수’가 있었겠지만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석수’를 찾아본다. 최초의 기록은 867년 (통일신라) 에 건립된 봉화 취서사 삼층석탑 사리기에서 “석장 신노石匠 神孥”라는 기록이 확인되었다.
우리 민족은 돌을 다루는 솜씨가 뛰어나 불국사 다보탑, 불국사 삼층석탑, 석굴암 등 돌로 만든 예술품을 많이 남겼다. 돌을 다루는 사람을 석장石匠, 석수石手, 석공石工이라고 했다.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search/view?relicId=204993
<취서사 납석제 사리호> 867. 납석蠟石. 높이10x둘레11cm.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에는 주로 석수라고 불렀다. 조선시대 석수는 어떤 일을 했을까?
조선 초기, 한양 4대문의 기단부와 초석을 다듬을 때, 한양에 궁궐을 지을 때 석수가 동원됐다. 궁궐 바닥에 깐 박석과 여러 석물들을 만드는 것도 석수의 몫이다. 이후 화재로 소실된 궁궐 중건, 왕릉 조영, 지방 관아의 성을 쌓고, 건물을 지을 때에도 석수가 동원됐다. 당시에는 기중기가 없어 석공들이 직접 돌을 깨고 나르며 섬세하게 조각하는 일까지 하였다. 나라일, 관아일이 아니어도 돌을 다루는 일은 끊이지 않았다.
여러 지방을 다니다보면 곳곳에서 “ooo 공덕비”라는 비석을 보게 된다. 송덕비頌德碑라고도 한다. 공덕비功德碑는 오랜 시간 공을 쌓고 덕을 거듭 더한 사람을 기리는 비석이다. 그러나 백성이 자발적으로 세운 것 보다는 지방수령들이 자신의 공덕을 과장하기 위해 세우는 것이 관행이었다. 여기에 석공들이 작업에 투입되어 일을 하였다. 산을 샅샅이 뒤져서 가장 큰 바위를 탐색해 낸 뒤 공사하기 좋은 곳으로 옮긴 후 석공이 그 바위를 다듬어서 높이 2미터 정도의 비석과 받침석등을 만들고 송덕비가 세워질 곳까지 길을 낸다. 모든 공사비는 백성들 부담이고 노역에 동원되는 사람들도 백성들이어서 그 원성이 높았다.
건축뿐 아니라 문방구류, 흡연기류, 식기류, 향로 등 생활용품들을 돌로 만들어 사용했다. 구들장도 역시 돌이다.
돌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석재 채취가 우선된다. 조선시대 궁궐 공사 때 사용된 석재는 돌의 중량 때문에 가까운 창의문 밖이나 남산 인근에서 채석했다. 바닥에 깔리는 박석은 인천의 강화 석모도와 해주에서 채석한 것만 사용하였는데, 특히 강화 석모도 박석을 사용하였다. 석모도에서 수운을 통해 한강 유역을 비롯해 한반도 중앙부까지도 접근할 수 있었다. 수레에 싣고 남대문을 통과하여 도성의 공사장으로 옮겼다.
서쪽 앵봉산에도 돌이 많았다.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 지은 『목민심서』에는 화성에 성을 쌓는 공사에 앵봉산의 돌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서울시 은평구와 경기도 고양시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현재 서오릉 관리사무소와 마주 보는 쪽에 있다.
선조때 화성에 성을 쌓는 공사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다른 곳의 산에서 돌을 찾았다. 상의 지감이 밝아 마침내 앵봉을 벗기니 온 산이 다 돌이었는데 성을 쌓고도 많은 여유가 있었다. 『목민심서』권12 「공전工典 6조」 <수성修城>. 1
앵봉산에서 돌을 채취하게 된 사연은 정조실록에 기록되어있다.
애초에 정조는 앵봉의 돌을 쓰도록 명하였는데 석공들이 결이 거칠고 크기가 작아서 적당하지 않다고 핑계를 댔다. 논의끝에 강화로 결정했는데 정조는 자신의 덕이 부족한 탓이라하니 신하들이 다시 앵봉을 팠다. 한 층을 파자 돌맥을 만나 30여 장丈을 팠더니 광택이 나고 단단한 결이 고운 돌이 나왔다. 강화의 쑥돌과 비교하면 돌과 옥의 차이 정도였다. 이후 모든 석물을 앵봉의 돌로 사용했고 강화의 돌을 뜨는 일은 철폐했다.
정조13년(기유, 1789) 7월28일(임자) 기록 참고. 2
https://gongu.copyright.or.kr/gongu/wrt/wrt/view.do?wrtSn=13268510&menuNo=200018
강희언 <석공공석도> 비단에 수묵. 22.8x15.5cm. ⓒ국립중앙박물관
이 작품은 강희언의 스승인 윤두서의 <돌깨기>를 그대로 옮겨 그렸다. 강희언의 작품이 실려 있는 《화원별집》에는 이 그림에 <담졸학공재석공공석도 澹拙學恭齋石工攻石圖>라고 제목을 붙임으로써 강희언이 윤두서의 그림을 본떠 이 그림을 제작하였음을 명확히 밝혔다.
종이책 출간으로 설명 일부를 삭제함.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search/view?relicId=90318
미디어 기록물 필름 16.4X21.4cm . 소장품건판 34620
원판번호 중73-5 (격납상자제목: 繪畵) 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https://artvee.com/dl/the-stonebreaker#00
존 브렛John Brett <돌 깨는 사람The stone Breaker> 1857 – 1858. 캔버스에 유채. 51.3x68.5cm. 국립박물관 리버풀 워커 갤러리, 리버풀, 잉글랜드.
이 그림은 1856년 리버풀 아카데미에서 전시됐다. 나중에 1858년 런던 왕립 아카데미에서 전시되었을 때 정확한 디테일과 마감의 섬세함으로 찬사를 받았다. 밝은 색채와 일광의 선명한 묘사로 가득 찬 아름다운 그림이다. 지리학적, 식물적 특징을 정밀하게 묘사하여 많은 미술 평론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림엔 도로 보수를 위해 돌을 깨는 어린 소년이 등장한다. 소년은 옷을 잘 차려입었지만 가혹한 노동을 수행한다. 돌 깨는 일은 종종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비숙련 직업이었다. 풍경은 영국 런던 근교 서리Surrey의 도킹근처 박스힐이다. 나무, 암석은 과학적으로 정확하게 그려져 있다. 식물로 식별할 수 있는 계절은 8월이나 9월이라고 알려준다.
그림은 또한 중요한 종교적 상징을 담고 있다. 브렛은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의 작품은 종종 성경의 진리와 중요성에 관한 논쟁을 반영했다.
그림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전경은 잡초, 바위, 죽은 나무로 덮여 있다. 일부 미술사학자들은 배경의 초원이 낙원을, 돌 깨는 소년을 인류의 죄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로 보기도 한다. 순결을 상징하는 흰색 셔츠와 인간의 죄에 대한 예수의 피를 상징하는 빨간 스카프를 착용했다는 이유이다.
한편 다른 학설도 있다. 그림 크기가 작아서 잘 안보이지만, 오른쪽 위 나뭇가지에 앉아있는 새는 전통적으로 영혼을 상징한다. 돌 더미의 상당수가 해골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곳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골고다를 암시한다. 즉, 그림의 오른쪽 전체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비유로 읽힌다. 돌 깨는 소년은 성경의 아담을 나타낸다고 한다. 인류의 죄를 위해 죽음을 당한 그리스도의 예표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1857년 8월 7일자의 예비 스케치에 있는 “에덴 외부”라는 비문은 에덴에서 쫓겨난 후 강제 노동을 하는 아담의 형상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미술계 학자들이 여러 논평을 쏟아내지만, 감상자가 굳이 그런 이론을 근거로 감상할 필요는 없다. 소년의 홍조 띤 얼굴을 보고, 망치질하는 태도에 힘이 빠진 모습을 보고, “아, 힘들겠구나.”하면 될 것이다.
<Stone Breaker>를 위한 스케치 그림들.
작가 소개
존 브렛(John Brett 1831.12.08 영국 라이게이트Reigate 출생. 1902. 01.07 영국 런던 사망)은 라파엘 전파 운동과 관련된 예술가로, 매우 상세한 풍경화로 유명하다. 바다와 주변 암석을 세심한 정확도와 광도로 묘사하는 해양 그림(이탈리아 바다 풍경에 비유되는 파노라마 장면)이 특히 유명하다.
아버지 찰스 커티스 브렛Charles Curtis Brett(1789-1865)은 외과의사이자 육군 대위였다. 여동생 로사Rosa Brett도 화가였다. 화가 제임스 하딩James Duffield Harding(1798-1863)과 리차드 레드그레이브Richard Redgrave(1804-1888)와 함께 개인 미술 수업을 받았다. 22세에 그는 왕립 예술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존 러스킨John Ruskin(1819-1900)과 윌리엄 홀먼 헌트(William Holman Hunt 1827-1910)의 사상에 더 관심이 있었다.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s)의 창립자인 윌리엄 헌트를 만난 후 라파엘 전파에 함께 참여하게 되었다. 그의 작품은 한편으로 매우 상세하고 분위기가 있지만 종종 사회적으로 중요한 메시지를 던졌다. 초기 르네상스의 성실함으로 돌아가기 위해 19세기 중반 예술의 기계적 스타일을 거부했다. 1857년 7월의 런던 러셀 전시회에 참여했다.
그는 이탈리아와 스위스를 여러 번 방문했으며 그 여행에서 영감을 얻어 <로젠라우이의 빙하>와 같은 그의 최고의 작품중 일부를 그렸다. 1860년대에 지중해를 여행하면서 브렛은 과학적으로 정밀하게 많은 해양 풍경을 그렸다. 나중에 해양 및 해안 주제에 더 많이 관여하게 되었다. 1870년대와 1880년대에 작품의 모티브를 찾아 잉글랜드, 웨일즈, 콘월, 와이트 섬의 해안을 따라 여행했다. 몇 여름 동안 펨부룩셔의 뉴포트 성을 임대하여 웨일스 해안으로 여행을 다니며 사진을 찍고, 스케치하고, 그림을 그렸다.
존 브렛은 화가이자 열정적인 아마추어 천문학자였다. 금성의 정반사 이론을 왕립 천문 학회에 발표했을 때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금성이 유리 봉투에 들어 있는 용융 금속 공(a ball of molten metal )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했으며, 이것은 그것이 지구의 이미지를 반사하는 거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했다.
낯선 말 풀이
박석 - 얇고 넓적한 돌.
조영造營 - 집 따위를 지음.
1 http://db.itkc.or.kr/inLink?DCI=ITKC_MP_0597A_1320_020_0060_2015_029_XML
2 https://sillok.history.go.kr/id/WVA_11307028_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