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졸澹拙 강희언姜熙彦
자는 경운景運, 호는 담졸澹拙. 1738년 출생, 사망일 미상. 1784년으로 추정.
1710년 출생으로 알려져왔으나 1738년생으로 근래에 밝혀졌다. 삼청동의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 옆집에 살면서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졌다. 김홍도가 여러 지방의 풍속을 그린 《행려풍속도병》(1778)은 강희언의 집 담졸헌澹拙軒에서 그렸다고 한다. 김홍도의 <단원도>에도 강희언이 등장하여 강희언과 김홍도는 친밀한 사이였음을 알 수 있다.
1754년(영조 30)에 천문, 풍수관련 기술직인 운과(음양과에 속함))에 붙어서 순천에서 감목관監牧官(지방의 목장(말)을 관장하는 종6품 외관직)으로 재직했다. 음양과 벼슬을 지낸 것은 이웃하여 지낸 정선鄭敾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정선은 도화서 예하 관상감 겸 천문학 교수였고 주역에도 밝았다.
잡과에 속하는 음양과는 양반의 자제나 선비들은 거의 없고 주로 중인이나 서얼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강희언은 천문학겸교수天文學兼敎授(관상감 종6품), 의영고義盈庫 주부主簿(종6품 관직), 조지서造紙署 별제別提(종6품 관직) 등을 지냈다. 종6품(현대로 말하자면 주사보다는 높고 사무관보다는 낮은)이 최고직이었던 중인이다. 중인은 조선시대에 관직의 실무나 전문성을 가진 중간 계층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중인들도 자체적인 모임을 가지고 교류하는 여항閭巷 문화가 발전했지만 내부에는 언제나 선비들이 중심축의 역할을 했다. 여항은 원래 사대부가 아닌 일반 백성이 사는 동네를 가리키는 뜻이었지만, 대개 ‘일정한 지식을 소유한 한양 저자 사람’으로 통했다. 중인들을 뜻한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서촌과 북촌은 18세기 조선의 화단을 대표하던 이들의 본거지였다. 감목관인 강희언이 화원들과 친하게 된 것은 이전에 조지서造紙署에 근무했기 때문일 것이다. 조지서는 종이를 공급하는 관청이다. 화원들은 종이를 사용하는 직업이니 조지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선배 화가 정선鄭歚과 이웃하여 지내며 그림을 배웠고, 18세기 조선 예술계의 총수라 할 수 있는 강세황姜世晃(1713-1792)과 교유했다. 강세황의 제자였던 김홍도와도 친분이 두터웠다. 김홍도는 1778년 여름에 강희언의 집에서 풍속도 병풍을 그리기도 하였다. 강희언은 1781년 청화절淸和節(음력4월1일)에 김홍도의 집에서 열렸던 진솔회眞率會(각기 시를 읊고 거문고를 타며 술을 대작하는)에 참석하였다. 이로 미루어 1781년까지는 생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강희언이 김홍도와 절친했다는 기록은 또 있다. 김홍도의 그림 <단원도>는 이들이 함께 한 자리를 보여준다. 김홍도가 조선의 여행가 정란鄭瀾(1725-1791)과 만난 자리에 강희언이 있었다.
정선에게 그림을 배운 강희언은 신중하고 고지식했다. 겸재의 특징이라면 순식간에 붓을 휘두르는 일필휘쇄一筆揮灑를 꼽을 수 있는데 그의 제자인 강희언은 정직하고 객관적인 필법을 고수했다. 과감하고 거침없는 겸재와 달리 강희언은 신중하고 정밀하게 대상을 관측해 묘사했다. 겸재의 <금강전도>는 그동안 여백으로 두었던 하늘에 채색을 한 것으로 특별한데 강희언 역시 <인왕산도>의 하늘에 색칠을 했다. 여백을 그대로 두던 당시 화풍에 대한 도전이다. 강희언의 <인왕산도>는 서양화법의 영향을 받았다는 평이 있는데 산의 모습을 입체감과 원근법으로 강하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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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언 <인왕산도> 조선. 종이에 수묵담채. 36.6 x 53.7㎝. 개인소장. CC BY 공유마당.
도화동에서 인왕산을 바라보고 그린 실경산수화풍 그림이다. 바위는 미점米點과 부벽준 斧劈皴으로, 솔숲은 수지법樹枝法으로 그렸다. 담청색과 흑갈색으로 현대의 수채화가 연상되는 담채처리를 했다.
<석공도/돌 깨는 사람> 등 그의 풍속화들은 윤두서尹斗緖(1668-1715), 조영석趙榮祏(1686-1761) 등 문인화가의 풍속화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서 뒤에 김홍도의 풍속화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당시 한양의 문인과 화가들의 풍류 모습을 즐겨 그렸는데,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꼼꼼하고 세밀하여 조선 시대 의복 연구의 자료가 되기도 한다. 배경이 되는 건물, 식물들, 등장인물의 소지품들도 당대 문화 연구의 자료가 된다.
강희언의 유작은 드문 편으로 현재 <인왕산도仁王山圖>,<석공도石工圖>, 《사인삼경도첩士人三景圖帖》 등이 알려져 있다. 《사인삼경도첩》은 활쏘기 그림인 <사인사예>, 시를 쓰는 <사인시음>, <사인휘호> 연작이다. <사인휘호>는 붓을 휘두른다는 의미로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는 작업을 말한다. 각 그림마다 강세황의 발문跋文이 적혀있다.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년 출생, 사망일 미상. 자는 사능士能, 호는 단원檀園, 단구丹邱, 서호西湖, 고면거사高眠居士, 취화사醉畵士, 첩취옹輒醉翁.
단원檀園은 ‘박달나무 있는 뜰’이란 뜻으로 명나라의 문인화가 단원檀園 이유방李琉芳(1575~1629)의 호를 그대로 따온 것이다.
김홍도는 일반적으로 풍속화의 대가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신선도, 행사도, 초상화, 고사인물화, 화조화, 불화 등 모든 분야에 탁월한 기량을 보였다. 시서화 詩書畵에 모두 능하여 아들 김양기金良驥가 아버지의 문집 《단원유묵첩 檀園遺墨帖》을 만들었다. 앉은 자리에서 운韻을 맞추어 한시를 척척 지어냈고, 대금이나 거문고에도 기예가 뛰어났다.
김홍도의 외조부 인동장씨仁同張氏 집안은 대대로 화원을 낸 화원사회의 명문이다. 서예가 오세창吳世昌(1864-1953)이 정리한 『화사양가보록畵寫兩家譜錄』 (1916)에는 화원과 사자관寫字官의 명문 70여 가문이 소개되었는데 김홍도의 외가인 인동장씨도 명단에 들어있다. 따라서 김홍도는 외가에 드나들다 재능이 돋보여 강세황과 화원세계에 소개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강세황이 지은 <단원기檀園記>에 김홍도가 젖니를 갈 나이부터 강세황의 집에 자주 드나들면서 화법을 배웠다고 한다. 김홍도는 문인화가인 강세황의 천거로 도화서 화원이 되었다. 시서화에 능하여 당대에 이름을 떨친 강세황은 김홍도를 ‘금세의 신필’이라고 극찬했다.
1773년에는 영조의 어진御眞을 그린 공으로 장원서掌苑署 별제別提로 임명되었다. 1776년에 정조에게 <규장각도>를 바쳤다. 1781년(정조5년)에 정조의 어진을 그린 공으로 김홍도는 와서瓦署 별제로 임명된다
정조 5년(1781) 9월 3일(임인) 2번째기사.
희우정(喜雨亭)에 나아가 승지·각신을 소견하였다. 익선관(翼善冠)에 곤룡포(袞龍袍)를 갖추고 화사(畵師) 김홍도(金弘道)에게 어용(御容)의 초본(初本)을 그리라고 명하였다. 1
1800년 정월, 정조는 김홍도가 그린 《주부자시의도》 병풍에 화운시和韻詩를 짓고 그 끝에 김홍도에 대한 글을 덧붙였다.
“김홍도(金弘道)는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라 그의 이름을 안 지 오래되었다. 30년 전에 그가 어진(御眞)을 그린 이후로는 그림 그리는 모든 일에 대해서는 다 그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였다.” 『弘齋全書』卷七 詩三 謹和朱夫子詩 八首 <석름봉石廩峯>의 원운. 2
40세가 되던 해인 1784년에는 경상도 안동의 안기역安奇驛 찰방察訪(지금의 역장과 우체국장을 합친 것과 비슷)이 되었다. 1788년에는 김응환金應煥과 함께 왕명으로 금강산 등 영동 일대를 기행하며 그곳의 명승지를 그려 바쳤다. 1790년에는 사도세자를 위해서 지은 사찰인 용주사 대웅전에 운연법으로 입체감을 살린 <삼세여래후불탱화>를 그렸다. 1791년 정조의 어진 <원유관본遠遊冠本>을 그릴 때도 참여하였다. 그 공으로 충청도 연풍 현감에 임명되어 1795년까지 봉직하였다. 김홍도가 51세의 나이가 되던 1795년에 “남의 중매나 일삼으면서 백성을 학대했다.”는 충청 위유사 홍대협洪大協(1750-?)의 보고로 만 3년만에 파직됐다. 연풍 현감에서 해임된 50세 이후로는 한국적 정서가 어려 있는 실경을 소재로 하는 진경산수를 즐겨 그렸다.
충청도 연풍에서 현감으로 일한 경험은 김홍도가 민중들의 삶을 중국의 영향을 받는 대신 자신만의 개성으로 그려내는 중요한 기회가 되었다. 1796년에는 용주사 『부모은중경』의 삽화, 1797년에는 정부에서 찍은 『오륜행실도』의 삽화를 그렸다.
전기에는 주로 신선도를 많이 다루었다. 얼굴 표정은 섬세하고, 옷자락은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으로 굵고 거친 느낌이다.
단원은 사실적인 회화 역량에서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 <송하 맹호도>는 극사실 묘사의 정점을 보여준다. 그가 그린 풍속화는 사람들이 서로 어우러져 살아 가는 모습을 그렸다. 인물의 성별 계층 나이 직업에 따른 의복과 자세와 표정을 섬세하게 묘사하여 등장 인물들의 개성이 선명히 드러난다. 채색의 농담으로 형체의 원근 고저를 표현했다. 그의 풍속화들은 정선이 이룩한 진경산수화의 전통과 더불어 조선 후기 화단의 새로운 경향을 가장 잘 대변해 준다.
김홍도의 그림이 어떠했는지 역사의 기록에도 잘 나타난다. 김홍도가 그린 병풍 그림이 마치 실제상황으로 착각을 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매일 밤 베갯머리에서 말을 모는 소리가 들리고, 또 당나귀의 방울 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떤 때는 마부가 발로 차서 잠을 깨웠으나, 그 까닭을 알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하필기林下筆記』 권29 <춘명일사, 명화통신> 3
정조는 “회사繪事에 속하는 일이면 모두 홍도에게 주장하게 했다.”고 할 만큼 그를 총애했다. 1800년 정조가 갑자기 승하한 후, 1805년 12월에 쓴 편지만 전해지고 이후 행적이 전혀 전해지지 않아 1805년이나 1806년도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대표작으로는 《단원풍속화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금강사군첩 金剛四君帖》(개인 소장), <무이귀도도 武夷歸棹圖>(간송미술관 소장), <단원도 檀園圖>(개인 소장), <기노세련계도耆老世聯稧圖> 등이 있다.
강희언과 김홍도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210826010003449
강희언 <사인사예도>. 종이에 담채, 26×21㎝, 개인 소장.
다채롭고 사실적인 묘사, 그림 전체의 구도와 균형, 배경과의 조화 등 완벽하고 독자적인 강희언의 작품세계를 보여준다. 이후 김홍도에게 영감을 주었다. 아래 그림 김홍도의 <활쏘기>와 <빨래터>는 김홍도가 강희언의 <사인사예도>를 보고 영감을 얻었을 거라 추측한다.
왼쪽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treasure/view?relicId=539#
김홍도 <빨래터>, 세로 28 X 23.9cm, 보물 527 호 ⓒ국립중앙박물관
오른쪽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search/view?relicId=531
김홍도 <활쏘기>, 종이 수묵담채 28 X 23.7cm. 보물. ⓒ국립중앙박물관
강희언이 그림의 구도에 배경과 인물을 잘 조화시킨데 반해 김홍도는 인물에 집중했다. 꼭 필요한 배경 외에는 과감히 생략했다. 강희언의 <사인사예도>에서 빨래하는 여인들은 그림의 주체가 아니라 배경의 한 부분이다. 김홍도는 이 여인들을 훔쳐보는 부채 든 남자를 추가하여 완전히 독립된 <빨래터>를 그렸다. 부채로 얼굴을 가린 남자, 김홍도 풍속화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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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단원도> 1784. 종이에 수묵담채, 135.0×78.5㎝, CC BY공유마당.
1781년 창해옹(정란鄭瀾), 김홍도, 강희언 세 사람이 단원의 집에 모여 각기 시를 읊고 거문고를 타며 술을 대작했다. 당시 모습을 몇 년이 지난 뒤에 기억으로 그렸다. 위의 그림은 김홍도가 1785년(갑신 십이월 입춘후 이일)에 그린 <단원도>이다. 그림 윗부분의 제발문에는 강희언이 이미 타계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에 따라 강희언의 졸년을 1781년부터 1785년사이로 추정한다.
아래 그림은 <단원도>에서 세 사람이 모여앉은 부분을 확대한 것이다.
1. 김홍도, 2.강희언, 3.정란
세 사람의 모임을 ‘진실되고 법식에 거리낌 없는 모임’이라는 의미로 ‘진솔회(眞率會)’라 이름을 지었다. 거문고를 연주하고 있는 이가 김홍도, 무릎을 세운 채 부채질을 하며 거문고 소리를 듣고 있는 이가 강희언, 그 옆에 앉아 장단에 맞춰 시를 읊고 있는 이가 정란이다.
강세황과 김홍도
김홍도의 스승 강세황은 그의 수상록에 김홍도에 대한 글을 남겼다. 김홍도가 얼마나 천부적인 화가인지 소상하게 설명해준다.
豹菴稿卷之四 記 檀園記 4
金君士能生於東方近時。自幼治繪事。無所不能。至於人物山水。仙佛花果。禽蟲魚蟹。皆入妙品。比之於古人。殆無可與爲抗者。
『표암고』 권4 <단원기>
(김군사능어동방근시, 자유치회사, 무소불능, 지어인물산수, 선불화과, 금충어해, 개입묘품, 비지어고인, 태무가여위항자)김군은(사능 김홍도)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렸고 무엇이든 잘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인물, 산수, 선불仙佛, 화과花果, 금충禽蟲(새와 벌레), 어해 魚蟹(물고기와 개), 모두 오묘한 경지에 들었으니 옛 사람과 비하여도 견줄만한 사람이 거의 없다.
凡畫者皆從絹素流傳者。而學習積力。乃可髴。而創意獨得。以至巧奪天造。豈非天賦之異。迥超流俗耶。
(범화자개종견소유전자, 이학습적공, 내가방불, 이창의독득, 이지교탈천조, 기비천부지이, 동초유속야)
대체로 화가들은 모두 전해오는 견본을 따라서 배우고 익혀 솜씨를 쌓은 뒤에야 비슷하게 그릴 수 있다. 그러나 독창적으로 터득하고, 하늘의 조화를 오묘하게 빼앗았으니, 어찌 천부적인 재주가 남달라 세상 풍속을 뛰어 넘어선 것이 아니겠는가.
世俗莫不驚士能之絶技。歎今人之莫及。
(세속막불경사능지절기, 탄금인지막급)
세상에서는 사능(김홍도)의 뛰어난 재주에 놀라며, 사람들이 미칠 수 없는(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지라고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豹菴稿卷之四 又一本 5
我東四百年。雖謂之闢天荒可也。尤長於移狀俗態。如人生日用百千云爲。與夫街路津渡店坊鋪肆。試院戱塲。一下筆人莫不拍掌叫奇。世稱金士能俗畫是已。
<단원기 또 하나>
(아동사백년, 수위지벽천황가야, 우장어이상속태, 여인생일용백쳔운위, 여부가로진도점방포사, 시원희장, 일하필인막불박장규기, 세칭김사능속화시이)
우리 왕조 사백 년 이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해도 좋을 것이다(유래없는 일이다). 세상풍속을 그리는 데에는 더욱 좋았다. 예를 들어 사람의 수많은 일상과, 길거리, 나루, 가게, 점포, 과거시험장, 연희장(극장), 한번 붓을 대면 사람들이 크게 손뼉을 치면서 신기하다고 외쳤다. 세칭 '김사능 풍속화'라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강세황은 <단원기>에 이어 <단원기 또 하나>를 더 썼다. 강세황의 글에 의하면 김홍도가 풍속화를 그린 것은 사실이다. 현재 전하고 있는 《단원풍속도첩》의 진위를 밝히는데 참고가 될 것이다.
김홍도의 풍속화첩
학계에서는 풍속화 25작품이 모여있는 《단원풍속도첩》의 제작자는 김홍도가 아닐 것이라는 논란이 분분하다. 진위문제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연구논문이 계속 발표되고 있다. 여러 작품에서 오류가 눈에 띠고, 편집의 흔적도 남아있어 그림의 형태와 필치가 치졸하여 김홍도의 것으로 보기엔 의문이 있다는 것이다. 도화서 화원의 교본용 화보의 화고畵稿라는 의문도 제기됐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는 국립중앙박물관의 표제에 따라 《단원풍속도첩》이 김홍도의 그림인 것으로 간주한다.)
낯선 말 풀이
여항閭巷 - 백성의 살림집이 많이 모여 있는 곳.
부벽준斧劈皴 – 산수화 준법의 하나. 도끼로 나무를 찍었을 때 생긴 면처럼, 수직의 단층이 부서진 나무의 결이나 바위의 입체감을 표현하는 기법이다. 중국 남송의 이당이 완성하고 마하파馬夏派가 주로 사용하였다.
수지법樹枝法 – 나무의 뿌리, 줄기, 잎 등을 그리는 표현 기법. 시대와 화파에 따라 그 표현 기법이 다양하다.
사자관寫字官 - 조선 시대에, 승문원과 규장각에서 문서를 정서(正書)하는 일을 맡아보던 벼슬.
와서瓦署 - 조선 시대에, 왕실에서 쓰는 기와나 벽돌을 만들어 바치던 관아. 태조 원년(1392)에 동요(東窯)ㆍ서요(西窯)를 두었다가 뒤에 합하여 이 이름으로 고쳤으며, 고종 19년(1882)에 없앴다.
1 https://sillok.history.go.kr/id/kva_10509003_002
2 http://db.itkc.or.kr/inLink?DCI=ITKC_MO_0584A_0070_010_0650_2006_A262_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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