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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Jan 15. 2022

윤덕희 <공기놀이>, 장 시메옹 샤르댕 <너클본 게임>

조선과 서양의 풍속화

<조선과 서양의 풍속화, 시대의 거울>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이곳엔 글의 일부만 남기고 많은 부분을 삭제합니다. 이해를 바랍니다. 


공기놀이의 뚜렷한 기원은 알 수 없지만 5세기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공기놀이’ 장면을 볼 수 있다. 고구려 수산리벽화고분의 서쪽 벽, 장천1호고분 벽화에 공기놀이 장면이 있다. 삼국시대를 지난 조선 헌종 때 이규경李圭景(1788-1856)이 쓴『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도 공기놀이가 소개된다. 이 책 인사편人事篇 기예류技藝類 <희구변증설戱具辨證設> 부분에 <척석擲石>이라하여 기록한 글은 오늘날 공기놀이와 다르지 않다. 

척석은 <화한삼재도회>에 전하는데 바둑알을 튕기는 것 즉 돌을 던지는 종류이다. 여자애가 바둑알 10여개를 흩어놓는다. 한 개를 공중에 던져 떨어지기 전에 흩어진 돌 2-3개를 집어 같이 합한다. 나머지도 이런 식으로 해서 다 주우면 이긴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척석구擲石毬(공기놀이)와 같다. 이는 동방의 어린아이들이 돌멩이를 가지고 노는 놀이와 비슷하다. 공기라 칭한다. 돌멩이를 공중에 던져 손바닥으로 받는다. 이미 받은 것은 쌓아서 솥 모양으로 만든다. 솥발공기라고 한다. 1

현재의 공기놀이와 거의 같은 방법이다. 수 백년의 세월이 지났으나 별로 변하지 않았다. 

 

우리의 기록 외에도 외국인이 소개한 책에 ‘공기놀이’가 언급된다. 미국의 민속학자 스튜어트 컬린Stewart Culin(1858-1929)은 『한국의 놀이』(1895년 저술.  윤광봉 역, 열화당, 2003)에 95가지 전통놀이중 ‘공기놀이’가 소개되어 있다. 1936년에 조사된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1891-1968)의 『조선의 향토 오락』(집문당, 1992)에도 ‘공기놀이’가 등장한다. 놀이 방법을 구체적으로 소개했다. 다섯 개의 작은 돌맹이를 손바닥에 쥐고 있다가 한 개를 공중에 던져올린 다음 다른 네 개를 땅바닥에 놓고, 떨어지는 돌을 받는다. 다시 그 돌을 공중에 던진 후, 돌이 떨어지기 전에 땅바닥에 있는 돌 한 개를 줍고, 떨어지는 돌을 받는다. 이렇게 던져올린 돌이 바닥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면서 바닥의 돌 전부를 주워 손에 쥔다. 다음은 바닥에 놓은 돌을 한 번에 두 개씩 줍고, 다음은 세 개와 한 개를 두 번만에, 다음은 네 개 전부를 한 번에 줍는다. 던져 올린 돌을 떨어뜨리면 지고, 떨어뜨리지 않고 다 주워올려야 이기게 된다.” 위의 책 68쪽. 


공기놀이는 서양에서도 역사가 오래된 놀이이다.

서양에는 ‘잭스Jacks’ 또는 ‘너클본Knucklebones’이라는 놀이가 있다. 너클은 손가락관절이지만 실제로 놀이에 사용하는 뼈는 양의 발목 뼈이다. 너클본 게임의 정확한 기원은 불분명하다. 다양한 장소에서 수많은 너클뼈 조각이 발견되었고, 남자 여자 어린이가 하는 너클본 게임이 그림과 조각에 자주 묘사된다.

너클본 게임은 체스게임에서 전래됐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 극작가 소포클레스Sophocles (c.497/6–406/5BC) 에 의하면 체스는 고대 그리스의 팔라메데스Palamedes가 발명했다. 트로이 전쟁에서 싸우는 그리스 병사들에게 전술을 설명하기 위해서, 병사들이 딴짓을 하지 못하면서 쉴 수 있도록 고안한 것이다. 병사들은 체스에 사용하던 너클본을 요리조리 가지고 놀면서 너클본 게임이 생기게 됐다는 것이다. 플라톤Plato (424/423–348/347BC)은 『파이도르스Phaedrus』에서 주사위와 체커를 언급했다. 

그리스와 로마, 그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여러 곳에서도 다양한 버전의 너클본 게임이 재생산되었다.  놀잇감을 구하기 쉽고 놀이 방법이 비교적 간단하여 오래전부터 여러 나라에서 놀았던 것 같다.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search/view?relicId=1015 

<공기놀이> 윤덕희 조선, 비단에 먹, 29.4 X 21,8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그림에는 버드나무 가지가 늘어진 언덕에서 공기놀이를 하는 두 소년과 바람개비를 들고 있는 소년이 등장한다. 공기놀이는 주로 여자 아이들이 하는 놀이인데 이 그림에서는 남자 아이들이 공기놀이를 하고 있다. 예전에는 남자아이들 놀이였다고 한다.


종이책 출간으로 설명 일부를 삭제함.


https://simple.wikipedia.org/wiki/Jackstones#/media/File:Knucklebones.jpg

장시매옹 샤르댕Jean-Baptist-Siméon Chardin <너클본 게임The Game of Knucklebones>  1734. 캔버스에 유채. 82x65.5cm. 볼티모어 미술관, 메릴랜드주, 미국


왼쪽 위에서부터 오른쪽 아래로 쏟아지는 빛은 화면을 대각선으로 가른다. 배경을 그리지 않았어도 보는 사람의 시선은 그림 전체를 훑게 만드는 구도이다.

앞치마를 두른 소녀가 공기놀이와 비슷한 게임인 "너클본 Knucklebones"을 하고 있다. 4개의 너클본이 테이블에 놓여 있는 동안 소녀는 방금 공을 공중으로 던졌다. 시선은 공의 움직임에 초점을 맞추고있다. 마치 카메라의 스냅사진처럼 공중에 떠있는 공을 순간 포착했다. 그림을 그릴 때는 이미 공은 바닥에 떨어져있을 것이다. 

이제 탁자를 짚고있는 왼손은 재빨리 탁자 위에 있는 4개의 너클본을 집어야 한다. 불규칙한 모양의 너클본은 실제로 양의 발 뒤꿈치에서 나온 작은 뼈이다. 언제부턴가 너클본 게임은 플라스틱 너클을 사용하고 있다.

이 소녀는 하던 일을 멈추고 놀이에 집중한 듯하다. 공을 던지느라 느슨해진 앞치마의 가슴 부분은 한쪽이 앞으로 젖혀져 있다. 테이블 가장자리에는 가위가 놓여있고, 앞치마 가슴 왼쪽에는 바늘이 꽂혀있다. 허리를 묶은 빨간 리본은 테이블 위에 살짝 올려놨다. 할 일이 밀려도 놀이에 빠진 소녀에게 이 시간은 잠시 일을 잊은 귀한 휴식시간이다.


비슷한 놀이가 세상 어느곳에서나 행해지는 것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놀이가 인간에게 주는 즐거움과 위안은 크다. 특별한 놀이기구가 없어도 주위에서 구할 수 있는 돌멩이를 이용하여 논다. 돌멩이조차 없어도 된다. 그저 맨 땅에서, 아주 작은 공간에서도 놀 수 있다. 놀이하는 즐거움은 어른이나 아이나 다르지 않다. 일상의 과중한 무게에 짓눌려 사는 현대인들에게 놀이가 필요하다. 잠시나마 즐거운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공기놀이는 어떤가? 사무실 책상에서도 쉽게 할 수 있다. 

 

1500년대 네덜란드에서도 “너클본 게임”이 있었다. 어린이 놀이의 그림 한 부분을 살펴본다.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1/1e/Pieter_Bruegel_the_Elder_-_Children%E2%80%99s_Games_-_Google_Art_Project.jpg 

대大 피터르 브뤼헐 Pieter Bruegel Elder <어린이들 놀이 Children’s Game1560. 판넬에 유채. 118 ×161cm. 쿤스트히스토리쉬 뮤제움, 비엔나, 오스트리아.


작가 소개

장시메옹 샤르댕(Jean-Baptiste-Siméon Chardin, 1699.11.02 파리 출생, 1779.12.06 파리 사망)은 파리에서 가구공의 아들로 태어나 거의 도시를 떠나지 않았다. 예술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정물화의 대표자 중 한 명으로 간주된다.  루이 15세가 그에게 루브르 박물관의 스튜디오와 거주 공간을 허락한 1757년까지 생 쉴피스 근처 좌안에서 살았다. 고도로 세련된 소규모 정물 작품과 냉정하고 단순한 조화를 불러일으키는 풍속화를 많이 남겼다. 1720년대에 첫 번째 정물을 제작했지만, 많은 정물이 날짜가 지정되지 않아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샤르댕은 처음에 화가 피에르쟈크 카제스Pierre-Jacques Cazes(1676-1754)의 스튜디오에서 학문적 그림 기법을 배웠고, 다음에는 저명한 역사 화가인 노엘 니콜라 쿠아펠Noël-Nicolas Coypel(1690-1734)의 기법을 배웠다. 1724년에는 생 뤽 아카데미(Acadèmie de Saint-Luc)의 마스터가 되었고, "동물과 과일의 화가"로 인정받았다.  1737년부터 샤르댕은 살롱에서 정기적으로 전시회를 가졌다. 1737년 살롱의 재건은 샤르댕에게 정물을 넘어 자신의 작품을 발전시킬 동기를 부여했다. 그는 50년 동안 정기적으로 회의에 참석하고, 1752년 루이 15세로부터 500리브르의 연금을 받았다. 1759년 살롱에서 9개의 그림을 전시했다. 1761년 살롱 전시회 설치를 감독했다. 1770년까지 샤르댕은 ‘프리미어 페인트 뒤 로이Premiere peintre du roi 궁정화가'가 되었고 연금1,400리브르는 아카데미에서 가장 높았다.

17세기 네덜란드 그림의 인기가 높아짐에 따라 샤르댕은 '장르 화가'로서의 기술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웅대하고 역사적인 주제를 선택하지 않고 보통 가사 역할에서 평범한 사람들을 묘사했다. 장르(풍속화) 장면은 파리 살롱에서 매우 인기를 얻었고 곧 풍부한 해외 고객층을 갖게 되었다. 1737년 살롱에서 샤르댕은 7개의 소규모 장르 장면을 전시하여 이 영역에서 자신의 숙달을 확립하고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1771년 살롱 출품은 동료와 대중 모두에게 충격을 주었다. 평소의 정물화나 풍속화 대신에 3개의 파스텔을 전시했다. 그는 앙지빌레 백작(Comte d'Angiviller)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 허약함으로 인해 계속해서 유화를 그릴 수 없었고 파스텔에 의지했습니다."라고 썼다. 샤르댕의 파스텔 초상화는 대담한 색상과 회화적 터치가 특징이며, 다양한 종이에서 허용하는 질감을 실험했다. 경력을 통틀어 초상화를 거의 만들지 않았지만 이 후기 작품은 삶을 그리는 것과 빛과 색조의 미묘한 변조를 렌더링하는 데 모두 샤르댕의 재능을 보여준다.

마지막 살롱 참가는 1779년이었고 여러 파스텔 연구를 특징으로 했다. 그의 수집가의 벽. 그의 예술, 특히 그의 풍속화는 파리에서 스톡홀름까지, 에든버러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비엔나에서 칼스루에까지 유럽 전역의 부르주아, 귀족 및 왕실 수집가들에 의해 추구되었다.


http://db.itkc.or.kr/inLink?DCI=ITKC_GO_1301A_0130_080_0220_2005_002_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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