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과 서양의 풍속화
많은 예술가들이 글로 계절 감상문을 짓고, 계절의 풍경을 그림으로 그리고, 소리로 연주하고 노래한다. 수 백 년 전에도 그러했다. 봄이 오기 전부터 사람들은 봄 속으로 서둘러서 걸어 들어갔다. 매화를 보려는 상춘객들도 있었고, 허기진 속을 채우려고 먹을 것을 찾아나서는 사람들도 있었다. 추수한 곡식은 다 떨어졌고 햇곡식은 나오지 않은 춘궁기에 임금은 배고픈 백성을 가엾게 여겼다.
태종 9년(1409) 윤4월27일(기사). 2번째 기록.
임금이 연침(燕寢)에서 세자에게 이르기를, “나는 백성들이 굶주린다는 말을 들으니 마음이 아프다.”하니, 세자가 자리를 피석(避席)하며, “신이 듣자오니 백성들 가운데 굶주림으로 인하여 나물을 캐다가 죽은 자도 있다고 합니다.”하였다. 1
300여년 전의 봄 그림을 감상해본다. 윤용의 <협롱채춘>이다. 나물캐러 나온 한 여인이 호미를 들고 우뚝 서있다.
조선시대의 농민들도 주로 철제 농기구를 사용하였다. 『농사직설』(세종이 정초鄭招, 변효문卞孝文 등에게 명하여 1429년에 편찬)에 의하면 조선 전기 이전에 이미 각각의 농작업마다 사용하는 농기구가 구비되어 있었다. 호미는 7세기를 전후해 등장한 농기구이다.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날의 형태가 지역에 따라 다르게 개량되고 발전했다. 최근에 온라인 쇼핑몰 ‘아마존amazon’에서 돌풍을 일으킨 ‘영주대장간’의 호미도 그림처럼 목이 긴 호미이다. 농사는 봄에 쟁기로 논과 밭을 갈고, 괭이와 쇠스랑 등으로 흙을 고른다. 써레와 나래로 보들보들하게 삶은 흙에 씨를 뿌린 후에는 호미로 여러 번 김매기를 하고 낫으로 수확을 한다. 호미는 여인들이 다루기에도 편리한 농기구로 농사 뿐 아니라 나물을 캐는 데도 유용하게 쓰였다.
아래는 윤두서의 손자인 선비 화가 윤용尹愹(1708∼1740)이 망태기와 호미를 들고 돌아선 여인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나물을 캐는 용도로도 쓴 호미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https://gongu.copyright.or.kr/gongu/wrt/wrt/view.do?wrtSn=13268406&menuNo=200018
윤 용 <협롱채춘挾籠採春>. 종이에 담채, 27.6×21.2㎝, 18세기, 간송미술관 소장. CC BY 공유마당.
윤용의 《집고금화첩集古今畵帖》에 실려있는 그림이다.
그림의 제목처럼 ‘나물바구니를 끼고 봄을 캐는’ 여인은 자루가 긴 호미를 든 채 허공을 응시하며 뒤돌아 서있다. 내용은 윤용의 할아버지 윤두서의 작품 <채애도採艾圖>를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봄날 농촌 서정이 스며있다. 표현은 〈채애도>와는 달리 배경없이 들판에 사람만 우뚝 서 있다. 오른손에는 망태기를 끼고 왼손에는 호미를 들고 있다. 여인이 왼손에 든 호미는 낫과 모양이 아주 비슷한 ‘낫형 호미’이다.
종이책 출간으로 설명 일부를 삭제함.
https://www.artic.edu/artworks/94841/the-song-of-the-lark
쥘 브르통 Jules Adolphe Breton <종달새의 노래The Song of the Lark> 1884. 캔버스에 유채. 110.6 × 85.8cm.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시카고, 일리노이, 미국
이 그림은 1922년 퓰리처 상을 수상한 윌라 캐더Willa Cather(1873-1947)의 책 『종달새의 노래』 표지로 사용됐다.
제목에 있는 종달새가 그림에는 없다. 물론 새의 노래도 들리지 않는다.
첫눈에 시선을 끄는 것은 일출이다. 핑크 하이라이터로 발색한 태양은 나머지 배경의 흙빛 톤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셔츠의 흰색이 여성으로 시선을 이끌어 간다. 그녀는 호미를 손에 들고 들판에 맨발로 서있다. 젊은 여성의 알 수 없는 표정은 계속 그림에 흥미를 유발한다. 새벽녘에 들판으로 가던 중 종달새의 아름다운 노래에 발길을 멈춘 그녀의 위로 향한 얼굴은 시선이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를 암시한다. 그림에 그려지지 않은 종달새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리라. 종달새의 지저귐, 종달새의 노래를 듣고 있는 것이다. 예술작품에서 종달새는 새벽을 상징하곤 한다. 작가 브르통의 설명에 의하면 새벽의 일출과 종달새를 통하여 여성에게 밝은 미래가 올 것이라는 메시지를 표현했다고 한다. 감상자들도 이 그림에서 종달새의 노래를 들을 수 있을까?
위 두 그림의 여인들은 모두 호미를 들고있다. 호미는 흙을 헤치는 도구이다. 그러나 두 여인은 땅쪽으로 몸을 굽히지 않았다. 시선을 땅에 두지 않았다. 땅은 생명을 상징한다. 하늘은 꿈을 상징한다. 그녀들이 발 디디고 살아가는 땅은 소출에 인색하다. 하늘로 눈길을 돌린다. 바라보는 그곳은 하늘 어디쯤일까? 마음은 그곳에 머물고 있으리라.
작가 소개
쥘 아돌프 브르통(Jules Adolphe Breton 1827. 05. 01 프랑스 꾸리에르 출생, 1906. 07. 05 프랑스 파리 사망)은 19세기 프랑스 자연주의 화가이다. 농민화가로 알려진 그는 ‘진실주의(verism)’의 옹호자이자 뚜렷한 사회의식을 가진 사실주의자였다.
그의 아버지는 지주였지만 부판사와 시장을 겸임했다. 그는 평온하고 행복한 환경에서 자랐고 대부분의 시간을 시골 농부들의 아이들과 정원과 들판에서 놀며 보냈다.
1843년 여름, 그는 자연 배경의 초상화와 스케치로 벨기에 화가 펠릭스 드 비뉴Felix de Vigne(1806-1862)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드 비뉴는 브르통을 자신의 스튜디오와 헨트의 왕립 아카데미에서 함께 공부하도록 초대했다. 1847년 에꼴 드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에서 완벽한 예술 교육을 받기 위해 파리로 갔다. 미셸 드롤링Michel-Martin Drolling(1786-1851) 아틀리에에 합류했지만 1848년 혁명의 사회적 격변기에 진로를 포기했고, 아버지가 병들자 고향 꾸리에르로 돌아갔다.
1849년 살롱에서 <불행과 절망>으로 데뷔했고, 1851년 당시의 사회적 불행을 강조한 주제인 <굶주림>을 전시했다.
아르투아 지역의 농민들이 노역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어린 시절의 기억, 빛과 공기에 대한 인상과 함께 목가적인 시골 생활에 대한 기억은 그의 작품의 기초가 되었고 일생동안 그림을 그리는 원천이 되었다.
1857년 살롱에서 <밀의 축복>(무제 드 보자르, 아라스)을 전시하여 2등 메달을 획득했고, 나폴레옹 3세가 그 작품을 구입했다. 그의 그림은 남북 전쟁 이후 미국에서 특히 인기를 얻었다.
1870년대 브르통의 작품 발전에 영향을 미친 가장 중요한 외부 요인은 프랑스 회화에서 자연주의의 중요성이 높아지는 것과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후의 민족주의적 정서였다. 60여년에 걸친 그의 경력을 통해 브르통은 땅에서 일하는 농민 노동자들의 아름다움과 조화에 대한 이상주의적 비전을 그렸다. 예술적, 문학적 능력과 업적으로 동료들로부터 존경을 받은 브르통은 1906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낯선 말 풀이
써레 - 갈아 놓은 논의 바닥을 고르는 데 쓰는 농기구. 긴 각목에 둥글고 끝이 뾰족한 살을 7~10개 박고 손잡이를 가로 대었으며 각목의 양쪽에 밧줄을 달아 소나 말이 끌게 되어 있다.
나래 - 논밭을 반반하게 고르는 데 쓰는 농기구. 써레와 비슷하나 아래에 발 대신에 널판이나 철판을 가로 대어 자갈이나 흙 따위를 밀어 내는 데 쓴다.
삶다 - 논밭의 흙을 써레로 썰고 다래로 골라 노글노글하게 만들다.
1 https://sillok.history.go.kr/id/kca_10904127_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