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rgen Feb 04. 2022

윤두서, 윤덕희, 윤용

조선과 서양의 풍속화

녹우당 綠雨堂

https://gosan.haenam.go.kr/bbs/page.php?hid=sub4_2 

해남윤씨 녹우당(사적 제167호) 현판.  고산 윤선도 박물관


현재 사랑채 현판으로 걸려있는 '녹우당' 이라는 당호는 공재 윤두서와 절친했던 옥동 이서李(1662-1723)가 썼다. 전라남도 해남에 위치한 <녹우당綠雨堂>은  해남윤씨海南尹氏 종가이다. 해변에 위치한 까닭에 해풍이 심해 윤선도尹善道(1587-1671)는 해남읍 연동에서 기거하고 증손인 윤두서를 살게 했던 건물이다.

 

해남윤씨가는 윤두서에서 아들 윤덕희, 손자 윤용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친 화가를 배출했다. 해남윤씨가의 화풍은 한마디로 혁신성에 있다. 시대를 뛰어넘은 화풍, 그림을 통해 시대의 변혁을 꿈꿨던 화가들이었다. 이러한 화풍의 산실이 바로 해남윤씨 종가 녹우당이다. 1927-1928년에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에서 조사하고 작성한 『해남윤씨군서목록 海南尹氏群書目錄』에는 중국의 화보, 서화가의 문집과 이론서 등 방대한 양의 중국출판물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 중 중국에서 간행된 출판물이 2천600여종이나 된다.

윤두서가 새로운 회화 경향을 선도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방대한 중국 서적의 독서 경험에서 온 것이다. 윤두서의 그림 독학 교재는 중국 그림을 수록한 《고씨화보顧氏畵譜》와 《당시화보唐詩畵譜》였다. 그림책을 펴놓고 그대로 베끼고 또 베꼈다고 한다. 원본 그림의 점 하나 선 하나 똑같이 그리려고 애썼다. 그렇게 열심히 중국그림으로 연습을 하였지만, 특기할 것은 윤두서 삼부자가 중국풍의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선의 산하를 진경으로 그렸고, 조선의 인물을 그렸다. 

녹우당은 윤두서의 외증손자인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 강진에 유배되어 있을 때 드나들던 도서관이었고, 대흥사에 머물며 초의선사(의순意恂1786-1866)의 가르침을 받던 허련許鍊(1808-1893)이 화첩과 화보를 빌려보며 화가의 꿈을 키운 미술관이었다. 

 

공재恭 윤두서 尹斗緖

윤두서는 1668.06.28(음력 5/20) 출생, 1715.12.21(음력 11/26) 사망한 조선의 화가이다. 자는 효언孝彦, 호는 공재恭齋, 종애鍾崖이다. 본관은 해남海南으로, 고산高山 윤선도尹善道(1587-1671)가 증조부이다. 윤선도는 장손 윤이석尹爾錫에게 후사가 없자 윤이후尹爾厚의 4남인 윤두서를 종손으로 정하였다. 외증손이 『목민심서』를 남긴 정약용이다. 

윤두서는 버젓한 문벌 출신이다. 1693년(숙종 19)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다음해 갑술환국甲戌換局이 터지고 서인에게 밀렸다. 해남 윤씨 집안이 속한 남인 계열이 당쟁의 심화로 어려운 상황에 처하자 벼슬을 포기하고 남은 일생을 학문과 시서화로 보냈다. 1712년 이후 고향 해남 연동으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1715년 4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윤두서는 당시에 드문 인권옹호주의자였다. 아들 윤덕희가 기록한 <공재공 행장>에 윤두서의 인품이 잘 드러난다. 그는 가난한 주민들을 구휼하는데 앞장섰고 집안 노비들에게도 이름을 불러주었다. 노비의 자식이 무조건 노비가 되는 것에 반대하여 노비문서를 불태우기도 하였다.

그런 가풍은 아들 덕희와 손자 용에게도 이어져 가난한 농부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림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던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삼았고, 노동을 천하게 여겼던 시대에 노동의 모습을 주제로 삼았다. 조선 풍속화의 문을 열고 기초를 다진 사람이 윤두서이다.  

윤두서는 백성들이 생계를 위해 일하는 모습을 진지하게 표현했다. 농민들의 노동을 주제로 하는 그의 풍속화는 실학이라는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것이다. 대표작은 녹우당의 종손이 소장하고 있는 <자화상>이다. 공재의 <자화상>은 국가 지정유물이다. 조선시대 초상화의 특징은 전신사조傳神寫照를 중히 여겼는데, 인물의 외양뿐 아니라 내면의 혼과 정신까지도 그림에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수염 한 올 한 올이 생생히 그려진 공재의 자화상은 비장하기까지 하다. 이 비장함은 여러가지 현실의 괴리감에서 느껴지는 선비의 내면적 갈등일 것이다.  


왼쪽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search/view?relicId=715

윤두서 <심득경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1710년(숙종 36)에는 친구 심득경沈得經 (1673~1710) 이 세상을 떠나자 재계하는 마음으로 유상遺像을 그렸다. 터럭 하나 틀리지 않게 재현했고, 벽에 걸었더니 온 집안이 놀라서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고 한다.

오른쪽https://gongu.copyright.or.kr/gongu/wrt/wrt/view.do?wrtSn=13216991&menuNo=200018 

<자화상> 윤두서, 1710. 20.5x38.5cm. 국보240호. 고산 윤선도전시관전시.CC BY 공유마당


이전 초상화는 약간 측면을 그렸으나 정면 초상화는 윤두서의 자화상이 처음이다. 

윤두서의 사실주의적 태도와 회화관은 정약용丁若鏞의 회화론 형성에 바탕이 된다. 윤두서는 대상을 정밀하고 정확하게 그리는 그림을 최선으로 삼았다.  정약용은 윤두서의 <자화상>을 보고 자신이 외탁했다고 피력했을 정도이다. 

윤두서의 관찰력은 출중하다. 사물(인물)을 재현하는데 특별한 재주가 있다. 머슴 아이를 모델로 세워 동자를 그리기도 했다. 대상의 참 모습과 꼭 닮아야만 붓을 놓았다고 한다. 아들 윤덕희는 아버지가 반드시 연구 조사하고 뜻을 파악하여 실사에 비춰서 밝혀내고 배운 것을 실득했다고 <공재공 행장>에 기록했다.  

남태응南泰膺(1687-1740)의 회화비평집 『청죽만록聽竹謾錄』중 <화사畵史>에서 사람들이 한쪽에 치우쳐서 다 잘하지 못하거나, 두루 잘하기는 하지만 공교하지 못한데, 그 모두를 집대성한 자는 오직 윤두서 뿐이라고 했다. 

윤두서의 제문을 쓴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은 그의 형제(둘째 형 섬계剡溪 이잠李潛, 셋째형 옥동玉洞 이서李漵)는 자신이 없었지만 윤두서의 칭찬을 듣고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이익

李瀷이 윤두서의 영향을 받았다는 의미가 된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는 우리나라 옛 그림을 배우려면 윤두서에서부터 시작하라는 찬사를 남겼다. 윤두서가 조선 후기 회화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했다. 

윤두서는 조영석-김홍도-신윤복-김득신으로 이어지는 조선 시대 풍속화의 시조라는 점만으로도 한국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낙서駱西 윤덕희 尹德熙

윤덕희의 생애에 대해서는 녹우당에 소장되어 있는 유고집인 『수발집溲勃集』에서 엿볼 수 있는데, 그의 나이 21세에서 82세까지의 시문이 연대기로 쓰여 있어 그의 생애와 교유관계, 회화관을 살필 수 있다. 

윤덕희尹德熙(1685-1766)의 자는 경백敬伯, 호는 낙서駱西, 연옹蓮翁, 연포蓮圃, 현옹玄翁이다. 윤두서의 맏아들이다. 가선대부(嘉善大夫-종이품從二品의 문관과 무관에게 주던 품계) 동지중추부사에 추증되었다

초년에 그는 서울 회동에 살며 이저李渚에게 학문을 배웠다. 윤덕희는 일찍부터 진경에 관심을 보여 25세인 1709년에 사촌 윤덕부에게 삼각산 팔경 중 하나인 ‘백운대’를 부채에 그려줬다. 부채 그림에 차운한 시에서 ‘진경 眞景’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조선후기 회화사의 큰 흐름인 ‘진경산수화’의 진경을 처음 사용한 사람이 윤덕희이다. 현재 전하는 진경산수화는 <도담절경도 島潭絶景圖>(1763)가 유일하다.   숙종어진중모肅宗御眞重模에 참여했을 만큼 당시 인정받은 화가이다.


https://gosan.haenam.go.kr/bbs/board.php?bo_table=exhibit_hall1&wr_id=33#menu_head 

<도담절경도> 1763. 윤덕희가 그린 진경산수화의 대표작으로 충청도 단양의 단양팔경 중 하나인 도담삼봉을 그린 것이다.  ⓒ고산 윤선도 박물관

 

1713년 아버지 윤두서와 함께 해남으로 내려와 집안을 돌보면서 서화도 수련하였다. 윤두서는 아들 덕희에게 그림을 가르치지 않으려고 했었다. 그림 공부의 최종 목표는 도道라고 하던 윤두서는 덕희가 자신의 그림을 곧잘 따라하는 바람에 결국 마음을 바꿨다고 한다. 윤덕희의 풍속화는 현실적인 풍속을 그린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은 윤두서의 그림이나 화보에서 일부 혹은 전체를 차용하여 조선풍으로 번안을 시도하였다. 

1718년 선조들의 유묵을 모아 서화첩을 꾸미는 등 집안의 유물 정리와 보존에 힘을 쏟았다. 1719년에는 윤두서의 그림을 모아 《가전보회 家傳寶繪》와 《윤씨가보 尹氏家寶》 두 권의 화첩으로 꾸몄다. 1731에 다시 상경하였다. 

갑술환국(1694) 때 남인이 축출되고 소론少論과 노론老論이 다시 정권을 잡게되자 남인南人 집안이었던 윤두서가 과거에 응시하지 않은 것처럼 아들들도 모두 과거를 보지 않고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실권한 가문으로 견문을 넓히며 학문에 정진했다. 종손인 윤덕희는 선대부터 집안에 전해져 오는 수많은 고적들과 유물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데 주력하였고, 그림 그리는 일에도 집중했다. 그의 노력 덕에 해남윤씨의 족적은 <녹우당>에 잘 정리되어 남아있다. 

 

1747년 3월 22일-4월 27일까지 35일 동안 순의군順義君 이훤李煊 (1638-1720)과 함께 금강산 일대를 유람하고 금강산 기행문인 『금강유상록金剛遊賞錄』을 남겼다. 1748년(영조24)에 선원전에 있던 숙종 어진을 다시 모사하여 영희전 제4실에 모셨는데 재능을 인정받아 조영석과 함께 감동(監董-조선시대 국가의 토목공사, 서적 간행의 특별사업을 감독하고 관리하는 임시직 벼슬)으로 참여하였다. 1749년 봄에 윤덕희는 6품직인 사옹원 주부를 제수받고 2년 동안 관직 생활을 하였으나 병으로 사임하였다. 만년에 해남으로 낙향하였으나 한쪽 눈을 실명하여 작품 활동에는 주력하지 못했고 시를 쓰는 데 몰두하였다. 

 

왼쪽 윤덕희 <독서하는 여인> 비단에 수묵담채, 20×14.3㎝,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CC BY 공유마당.

오른쪽 윤두서 <미인독서 美人讀書> 비단에 채색 61x40.7cm. 개인소장.

위의 두 그림은 파초, 삽병, 독서하는 여인의 구도가 같다. 다른 점은 윤두서의 그림은 책을 읽지 않는 다른 여성과 배경과 전경이 있는 반면에 윤덕희의 그림은 책 읽는 여성에게 집중하고 있다.


윤덕희의 풍속화는 현실적인 풍속을 그린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은 윤두서의 그림이나 화보에서 일부 혹은 전체를 차용하여 조선풍으로 번안을 시도하였다.


청고靑皐 윤 용 尹

1708.07.27일에 출생하여 1740.03.08일에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자는 군열君悅, 호는 청고靑皐. 윤선도의 후손으로 윤두서의 손자, 윤덕희의 차남이다. 1735(영조 11)년 5형제 중 유일하게 28세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윤용은 시율과 시부를 잘 지어 여러 번 과시에 합격하였고 성균관에서 함께 공부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명성이 자자했다.  남인 집안의 전통에 따라 관직에 마음을 두지 않고 시문학과 예술 방면에 재능을 보였다.

윤용의 작품들은 그림 위에 제시題詩를 쓰거나 시화합벽첩詩畵合璧帖으로 제작하여 '시중유화詩中有畵, 화중유시畵中有詩'의 경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윤두서로부터 가법으로 이어온 관찰과 사생을 중시하는 사실주의적 회화관을 엿볼 수 있다. 나비와 잠자리 등을 잡아 수염과 분가루 같은 미세한 것까지도 세밀히 관찰하여 거의 실물에 가깝도록 그렸다. 

정약용은 강진 유배시절에 해남 외갓집을 방문하여 외숙인 윤용이 그린 화첩 《취우첩翠羽帖》을 보고 발문을 썼다. 《취우첩翠羽》은 군열(윤용)이 스스로 자기 그림을 사랑하는 것이 마치 물총새(翡翠 비취)가 스스로 제 깃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석북 石北 신광수申光洙(1712-1775, 윤용의 고모부)는 윤용의 그림을 극찬하여 『석북집石北集』에 평을 남겼다. 

『石北先生文集』 卷之十四 靈川 申光洙 聖淵甫著 / <祭文> 
祭尹君悅 偶然揮洒。亦自天縱。烟雲草樹。花鳥虫魚。春夏秋冬。濃淡慘舒。回薄萬變。窮神入虛。1

(제윤군열, 우연휘쇄 적자천종 연운초수 화조충어 춘하추동 농담참서 회박만변 궁신인허)

우연히 붓을 놀리면 역시 하늘이 낳은 재주라 안개 구름, 풀 나무, 꽃 새, 곤충 물고기, 봄 여름 가을 겨울, 깊고 엷고, 쓸쓸하고 여유 있는 것들이 모여서 끊임없이 변화하여 신의 경지를 다하고 허공에 들어갔다. 


남태응은 『청죽만록聽竹謾錄』중 <화사畵史>에서 재주가 빼어나 앞으로 나아감을 아직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그 성공이 어떠할지 기다릴 뿐이라고 하였다. 


왼쪽 윤 용 <협롱채춘挾籠採春>. 종이에 담채, 27.6×21.2㎝, 18세기, 간송미술관 소장. CC BY 공유마당

오른쪽 윤두서 <채애도> 8세기 초, 모시에 수묵, 30.2×25.0cm. 고산유물관 전시. CC BY 공유마당.

 

위의 두 그림은 여인의 뒷모습을 그린 것이 파격적이다. 윤두서의 그림 속 여인은 옆 얼굴을 보여주지만, 윤용의 여인은 얼굴조차 드러나지 않는 뒷모습이다. 윤두서의 그림에 관념산수의 배경이 있으나. 윤용의 그림은 인물에 집중하여 풍속화적인 요소가 더욱 강조된다.

호미를 수평으로 틀어쥐고 멀리 봄기운을 향한 뒷모습의 사람을 등장시키는 방식은 후에 김홍도나 신윤복의 풍속화에 계승된다. 윤용의 산수화는 가법(家法)으로 정착된 남종화풍(南宗畫風)을 따랐고 풍속화에서는 윤두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할아버지 윤두서의 혁신적 시각을 계승하여 민중적 소재를 화폭에 옮겼다. 

 

묘소는 해남군 현산면 공소동에 있었으나 현재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현존하는 작품은 불과 20점 안팎에 불과하다. 조부와 부친의 영향으로 산수화 · 풍속화 · 도석인물화 · 초충 · 화조화 등에 두루 재능을 보였다.

 

윤두서가 개척한 조선후기 회화의 신세계인 풍속화를 아들 윤덕희가 계승했고, 윤덕희의 아들 윤용도 이 가풍을 이었다. 풍속화는 해남 윤씨 집안에서 3대로 이어지며 한 때의 시도나 실험으로 끝나지 않았다. 조영석이 나타나 뿌리를 내리게 되고, 김홍도가 크게 발전시켜 새로운 장르로 만개하게 되었다.

 

낯선 말 풀이

문벌             - 대대로 내려오는 그 집안의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

행장             - 죽은 사람이 평생 살아온 일을 적은 글.

구휼             - 사회적 또는 국가적 차원에서 재난을 당한 사람이나 빈민에게 금품을 주어 구제함

추증追增되다    - 종이품 이상 벼슬아치의 죽은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에게 벼슬이 주어지다. 나라에 공로가 있는 벼슬아치가 죽은 뒤에 품계가 높아지다.

차운次韻하다  - 남이 지은 시의 운자韻字를 따서 시를 짓다.

번안        - 원작의 내용이나 줄거리는 그대로 두고 풍속, 인명, 지명 따위를 시대나 풍토에 맞게 바꾸어 고침.

시율詩律        - 시의 율격이나 운율.

율격             - 한시漢詩의 구성법에서 언어와 음률을 가장 음악적으로 이용한 격식. 평측, 운각韻脚, 조구造句의 세 가지가 있다.

시부詩賦          - 시와 를 아울러 이르는 말.

부賦                - 1.『시경詩經』에서 이르는 시의 육의六義 가운데 하나. 사물이나 그에 대한 감상을, 비유를 쓰지 아니하고 직접 서술하는 작법이다. 2.한 문체에서, 글귀 끝에 운을 달고 흔히 대對를 맞추어 짓는 글. 3.과문科文에서, 여섯 글자로 한 글귀를 만들어 짓는 글.



http://db.itkc.or.kr/inLink?DCI=ITKC_MO_0537A_0150_010_0010_2005_A231_XML   



이전 15화 윤용 <협롱채춘>, 쥘 브르통 <종달새의 노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