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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Feb 16. 2022

조영석 <말 징 박기>, 테오도르 제리코 <장제사>  

조선과 서양의 풍속화

<조선과 서양의 풍속화, 시대의 거울>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이곳엔 글의 일부만 남기고 많은 부분을 삭제합니다. 이해를 바랍니다. 



백낙일고伯樂一顧라는 고사가 있다. 문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백락이 한 번 뒤돌아본다는 뜻이다. 어떤 경우에 사용하는가? 누군가의 재능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야 그 재능이 빛을 본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말言의 근원은 이렇다. 한 사람이 말馬을 팔려고 했는데 아무도 그의 말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유명한 말 감정사 백락에게 간청하여 백락이 그 말을 보러갔다. 백락이 보기에 그 말은 준마였다. 깜짝 놀라며 한동안 말을 살피다 돌아갔다. 백락의 감탄하는 표정을 본 사람들이 너도나도 그 말을 사겠다고 나서서 말은 생각했던 값의 열 배나 되는 값에 팔렸다. 

백락伯樂은 천마天馬를 주관하는 전설의 별자리이다. 주周나라의 뛰어난 말 감정사 손양孫陽(생몰년 미상)이 별칭으로 백락이라 불리게 되었고, 백낙일고伯樂一顧라는 고사가 전해져 온 것이다. 『삼국지』의 ‘적토마’도 여포가 그 말의 가치를 알아보고, 믿고, 잘 관리하여 싸움터를 누비는 준마가 될 수 있었다. 

이익의 『성호사설』에는 말 징박기가 아주 나쁜 방법이라고 기록돼있다. 

또 이보다 더 해로운 것이 있으니, 발굽에 대갈(代葛)을 박아 일년 내내 쉴 새 없이, 들어오면 우리 안에 가두어 두고 나가면 무거운 짐을 싣게 되니, 아무리 좋은 말인들 어찌 쉽게 늙어 죽지 않겠는가? 그런 까닭에 맨 먼저 대갈을 만들어낸 자는 마정(馬政)의 죄인이다. 『성호사설』 제4권 만물문 萬物門 <마정馬政> 1

편자에 박는 쇠못은 ‘징’ 또는 ‘대갈代葛’이라 부른다.

말 기르기 중의 한 방법인 편자에 관한 자상한 기록을 찾아본다. 조선의 학자 청성靑城 성대중成大中(1732-1809)이 쓴 『청성잡기靑城雜記 4』 <성언醒言> 무쇠 말발굽의 유래 기록이다.

옛날에는 말편자를 칡 줄기로 만들었는데 ‘대갈(代葛)’은 윤필상(尹弼商)에게서 시작되었다. 윤필상이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할 때 두만강이 얼어 말이 미끄러지며 건너지 못하자 철편(鐵片)을 둥글게 만들어 끝부분을 틔우고 좌우로 구멍 여덟 개를 뚫었다. 못은 머리는 뾰족하게 하고 끝은 날카롭게 하여 쇠 편자를 말굽에 박으니 말이 과연 쉽게 건넜다. 그것이 칡 줄기로 만든 편자를 대신하였기 때문에 ‘대갈’이라 하였다. 그러나 ‘목삽(木澀)’은 이목(李牧)이 만든 것으로 칡 줄기보다 먼저 사용하였다. 대갈을 사용한 이후로 말발굽은 더욱 상했으니 말이 쉴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구가 정교해질수록 부림받는 동물은 더 고달파지니 예로부터 그러하다. 2

일본에서는 짚신으로 말발굽을 감쌌다고 한다. 

『동사일기 곤 東槎日記 坤』
말(馬)은 갈기를 다 깎고 발굽에 편자를 붙이지 않은 채 짚신으로 발을 쌌으며 3
『청장관전서』 제59권 「앙엽기盎葉記」 6 <말굽쇠>
우리나라에서는 말의 네 다리를 묶어 하늘을 보게 하고 칼로 굽 바닥을 깎은 다음 못을 박는다. 중국에서는 말을 세워둔 채 끌로 먼저 말굽 가장자리가 고르지 못한 것을 다듬은 다음 굽을 들어 무릎에 얹고 못을 박는다. 4

여기 “말 네 다리를 묶어 하늘을 보게”한 뒤 징을 박는 그림이 있다.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search/view?relicId=1806   

조영석 <말 징 박기> 조선시대, 종이 수묵담채 36.7 X 25.1cm.  동원2307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말 한 마리가 하늘을 보고 누워 있고 머리 밑에는 가마니가 깔려있다. 몸통 가장자리와 다리 부분에 흑백 대비를 주어 말이 입체적으로 보인다.
 편자를 박기 위해 사람들은 말의 앞다리와 뒷다리를 서로 교차하여 묶어 말굽을 모은 뒤, 말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네 다리를 다시 묶어서 끈을 옆에 있는 나무에 고정시켰다.


종이책 출간으로 설명 일부를 삭제함.


https://images.metmuseum.org/CRDImages/dp/original/DP837360.jpg 

테오도르 제리코 Théodore Gericault <플랑드르 장제사The Flemish Farrier1822. 크림색 종이에 석판. 종이: 42.1x57.9 판: 24.3x32.2cm. 메트로폴리탄 뮤제움 오브 아트, 뉴욕, 미국.

 

마구간에 커다란 말이 한쪽 뒷발굽을 들고 서 있다. 한 남자는 길다란 나무 봉 위에 말의 발을 걸쳐놓아 고정시키고 편자를 박고 있다. 말도 괴롭겠지만 작업을 하는 사람도 힘이 드는지 근육질 팔뚝에 힘줄이 울퉁불퉁하다. 맞은편의 남자는 태평하게 마구간 기둥에 기대어 서있다. 괴로워하는 말의 목덜미라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면 얼마나 좋을까. 고통이 줄어들지는 않겠지만 아무리 짐승이라도 마음의 위로는 받을텐데, 저 남자는 그저 무심한 표정이다. 오히려 어린 아이가 말에게 손을 내밀지만 말에게 닿을 듯 말 듯 닿지 않는다. 강아지는 아이 곁을 지키고 있다. 말꼬리를 똬리틀어 묶어올린 모습이 눈에 띈다. 달궈진 금속 편자에서 증기가 피어오른다. 

말은 테오도르 제리코의 회화와 석판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주제였다. 이 석판화는 제리코가 1820-21년에 런던에 있을 때 완성한 일련의 12개 판 중 하나이다.  석판화는 그리스(grease 기름, 윤활유)와 물이 섞이지 않는 것을 이용한 인쇄 기술이다. 인쇄할 영역은 그리스로 덮고, 비워둘 곳은 습기를 준다. 유성 잉크를 인쇄면 전체에 바르면 그리스로 덮은 부분에는 달라붙지만 젖은 부분에는 달라붙지 않는다. 그 상태로 압력을 가하면 잉크가 종이에 묻어 인쇄가 된다. 이 판화에서 작가는 물감처럼 기름진 용액을 사용하여 마치 대장간 내부에 증기가 피어오르는 형상을 만들어냈다. 불에 달군 편자가 말발굽에 닿는 순간을 절묘하게 묘사했다. 

 

조선시대에는 말의 네 발을 묶어 땅바닥에 자빠뜨리고 편자를 박았다. 중국에서는 말을 세워둔 채 발굽을 갈고 그 뒤에 편자를 박고, 일본에서는 말에게 짚신을 신겼다. 서양에서는 제리코의 판화처럼 말을 세워둔 채 편자를 박는다. 같은 일을 하는 모양새가 다르지만 동물과 인간, 말과 사람의 관계를 생각해본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말을 기르는 것과 부리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라고 했다. 부리는 것은 사람에게 편하게 하는 목적이고, 말을 기른다는 것은 말을 편하게 해주는 것이 잘 기르는 것이라고 했다. 비단 말에게만 해당되는 생각은 아니다. 현대인들이 키우는 애완동물에 대한 생각도 일깨워주는 그림이다. ‘애완용 장난감’이 아닌 살아있는 동물을 기르고 돌보는 일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작가 소개

테오도르 제리코(Jean-Louis André Théodore Géricault 1791. 09. 26 프랑스 노르망디 루앙 출생, 1824. 01. 26 프랑스 파리 사망)는 프랑스의 낭만주의 예술가이다. 그의 가족은 제리코가 다섯 살 때 파리로 이주했다. 아버지는 예술 교육을 반대했지만 어머니의 유언과 삼촌의 도움으로 미술을 시작할 수 있었다. 1808년에 칼 베르네Carle Vernet(1758-1836)의 작업실에 들어갔다. 베르네 작품의 주제는 말과 군사, 풍속 장면이었다. 2년을 베르네의 작업실에 다닌 제리코는 평생을 말에 열중했다. 

1811년 2월 에콜 데 보자르에 들어가 엄격한 고전주의자인 피에르 게랭Pierre-Narcisse Guérin(1774-1833)의 제자가 되었다. 1812년 나폴레옹 서사시에 대한 기념비적 찬사인 <샤쇠르 Chasseur 돌격하는 엽기병>으로 데뷔했다. 1814년 봄, 파리 방위군의 기마 2중대에 합류했고, 그 다음해 루이 18세를 따라 망명한 왕의 총사 1중대에 합류했다. 게랭의 고전주의에 반발하여 그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의 극적인 색채 화가들, 티치아노Tiziano Vecellio (c.1488-90-1576), 루벤스 Peter Paul Rubens(1577-1640), 반 다이크 Anthony van Dyck(1599-1641), 렘브란트 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의 그림을 모사했다. 동맹국들이 나폴레옹의 루브르 박물관을 박탈한 1815년까지 그의 작업은 당시 프랑스 미술의 주요 경향인 민족적 근대성의 흐름에 속해 있었다.  1816-1817년에 이탈리아에 머물면서 게랭에게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던 고전주의적 주제로 눈을 돌렸고, 벽을 가득 채운 규모의 작업에 대한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1817년 파리로 돌아왔다. 1817년에 석판화 공정을 최초로 시행했다. 1819년 살롱에서 정부에 대한 공격으로 잘못 해석된 <메두사의 뗏목>은 주로 적대적인 반응을 받았고, 1820년 <메두사의 침묵>을 전시하기 위해 영국으로 가서 2년을 머물렀다. 석판화의 전문 지식을 잘 활용하여 영국 빈곤층의 삶을 보여주는 석판화를 제작했다. 1821년 12월 건강이 악화되어 파리로 돌아왔고, 계속되는 승마 사고로 몸이 약해졌고, 1824년 1월에 사망했다.

제리코는 자신의 그림을 구상할 때 중점을 둔 것은 즉각성, 영속성, 안정성을 결합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역사적 사실주의와 영웅적 일반성을 조화시키면서 그의 예술의 두 가지 상반된 측면을 통합하려고 노력했다.

 

낯선 말 풀이

적삼             - 윗도리에 입는 홑옷. 모양은 저고리와 같다.

굴레             - 말이나 소 따위를 부리기 위하여 머리와 목에서 고삐에 걸쳐 얽어매는 줄.

편자             - 말굽에 대어 붙이는 ‘U’ 자 모양의 쇳조각.

주릿대          - 주리를 트는 데에 쓰는 두 개의 긴 막대기.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68A_0050_010_1100_2002_002_XML

http://db.itkc.or.kr/inLink?DCI=ITKC_GO_1436A_0040_010_1080_2008_001_XML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02A_0020_030_0010_2003_009_XML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77A_0590_010_0350_2000_010_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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