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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Mar 05. 2022

조영석 <바느질>, 아돌프 아츠 <코트베익 고아원에서>

조선과 서양의 풍속화

<조선과 서양의 풍속화, 시대의 거울>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이곳엔 글의 일부만 남기고 많은 부분을 삭제합니다. 이해를 바랍니다. 



발달한 IT기술로 글쓰기 플랫폼이 많이 생겼다. 전문 작가의 개념도 점차 흐려지고 있다. 주제가 독특한 글 뿐만 아니라 일상의 기록들도 많이 눈에 띈다. 일상을 글로 기록하면 ‘수필’이 되고, 그림으로 기록하면 ‘풍속화’가 된다. 여러 글쓰기 플랫폼에는 수필이 넘쳐난다. 쓰는 사람도 남녀노소로 구분할 수 없이 다양하다. 바로 이전 시대인 조선시대에는 시서화詩書畵가 주로 사대부가의 남성들이 누리던 문화였었다. 신사임당 같은 여성은 극히 드물었다. 드문 여성 문예작품 가운데 작가 미상의 글이 조선 여성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규중칠우쟁론기>이다. 현대에서 수필이라고 분류하는데 원래는 가전체假傳體라는 문학의 한 갈래가 고려 후기부터 조선 전기까지 문인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었다. <규중칠우쟁론기>가 바로 가전체에 속한다. 규중부인의 일곱 친구들(자; 척尺부인, 가위; 교두交頭각시, 바늘; 세요細腰각시, 실; 청홍각시, 인두; 인화引火부인, 다리미; 울熨낭자, 골무; 감투할미)이 등장하여 대화를 나누는 풍자 글이다. 순조 때 유씨兪氏부인이 지은 <조침문弔針文 /제침문祭針文>과 더불어 여성 고전 수필의 쌍벽을 이룬다. 남녀가 함께 이루는 사회에 남성들의 친구인 문방사우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규중칠우 같은 여성들의 친구도 있다. 

7월 7일, 칠석날은 명절로 여기고 제사를 지냈다. 특히 여성들은 바느질을 잘하게 해달라는 제사를 지냈는데 바로 걸교제乞巧祭이다. 칠석날의 주인공은 견우와 직녀, 직녀라는 이름의 ‘직織’자가 길쌈과 바느질에 연관되어 칠석날 걸교제를 지낸 것이다. 한漢나라 시대부터 지내던 걸교제가 우리 역사에 기록된 것은 고려 공민왕 때이다. 조선시대에도 칠석날 궁중에서 연희를 베풀고, 과거를 보게 하는 등 칠석은 중요한 명절로 여겼다. 바느질을 얼마나 중히 여겼으면 바느질 잘하게 해달라는 제사까지 지냈겠는가. 

조선시대 여성들에게 바느질은 필수 가사노동이었고, 내면을 표현하는 예술이었고, 마음을 위로하는 취미생활이었다. 신분에 따라 바느질의 역할은 달랐다. 노비에겐 밤잠 못 자고 과로에 등골 휘는 고된 노역이었다. 부잣집 여자들에겐 우아한 소일거리였다. 여자들이 하는 일이려니 하고 당연시 여기던 일 ‘바느질’을 눈여겨 본 사대부가의 사람 관아재의 그림을 보자.


https://gongu.copyright.or.kr/gongu/wrt/wrt/view.do?wrtSn=13216971&menuNo=200018 

조영석 <바느질> 종이에 담채, 22.4x23㎝, 간송미술관 소장,  CC BY공유마당


두터운 한지에 유탄柳炭이나 먹선으로 스케치를 한 뒤에 그린 것이다. 그림 속엔 세 여인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바느질에 여념이 없다. 여인들은 평행으로 나란히 앉아 수평 구도를 이룬다. 배경은 모두 생략됐다. 오직 인물에만 초점을 맞췄다. 


종이책 출간으로 설명 일부를 삭제함.


 



https://www.nfm.go.kr/k-box/ui/anbang/sewing.do  ⓒ국립민속박물관 한국문화상자

 

https://artvee.com/dl/in-the-orphanage-at-katwijk-binnen/ 

아돌프 아츠 David Adolph Constant Artz <코트베익 고아원에서 In the Orphanage at Katwijk-Binnen> c.1870-c.1890 캔버스에 유채. 97×13Cm.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 아래서 바느질을 하고 있다. 안경 쓴 어른은 아마  고아원 원장(Binnen-moeder)일 것이다. 소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다소곳한 자세로 서있고, 원장은 직접 바느질 실기를 보여주고 있다. 실내는 제법 잘 갖춰진 인테리어를 했다. 세탁실 옆에 붙어있는 작업실은 아닌 것 같다. 원장의 방이든지, 사무실일 것이다. 벽걸이 시계, 장식장과 벽선반 위에 올려놓은 델프트 블루 도자기(청화백자)들이 품위있다. 왼쪽편 보면대에 놓인 것은 악보가 아니라 책이다. 단단한 표지에 금속 코너장식을 붙였고 책이 두꺼운 것을 보아 악보는 아니다. 고아원을 운영하는 종교단체의 경전으로 짐작된다. 그림의 모델이 된 실제 고아원(Het Weeshuis)은 교단에서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 양노원, 교회, 고아원으로 사용되었다. 고아원은 1859년부터 1929년까지 독립 재단의 고아원으로 운영되었다.

고아원에는 많은 아이들이 있는 만큼 할 일도 많다. 보모들은 틈틈이 헤어진 옷이나 이부자리를 꿰매야 했다. 여자 원아들에게 바느질을 가르쳐주는 것도 보모들의 몫이었다.

덧문을 위로 걷어올린 창으로 한낮의 햇빛이 방안 가득히 들어온다. 바닥에도 햇빛이 놓여있고, 벽에는 천장 높이까지 햇빛이 비친다. '고아원'이라는 특정 장소가 주는 선입견과는 거리가 멀다. 고요한 실내 분위기는 밝고 따뜻하고 평화롭다. 네 사람이 테이블을 중심으로 둘러있는 구도는 새하얀 머릿수건으로 점을 찍으며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다. 역시 하얗게 빛나는 바느질감과 어우러져 그림에는 흰색의 타원이 그려졌다. 바닥과 천장이 동시에 다 노출된 구성이 산만해 보이지 않는 것은 이 타원이 시선의 중심을 잡아주기 때문이다.

코트베익Katwijk은 현재 코트베익 안 덴 린Katwijk aan den Rijn이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하며, 그림의 주제가 된 커크스트라트Kerkstraat의 코트베익 고아원은 1929년 건물이 철거되었다.


https://en.mng.hu/artworks/orphan-girls-of-katwijk/ 

요제프 이스라엘스Josef Israëls <코트베익의 소녀Orphan Girls of Katwijk> 캔버스에 유채. 85x117. Cm. 헝가리 국립 미술관, 부다페스트, 헝가리.


아돌프 아츠가 추종하던 헤이그 학파의 요제프 이스라엘스 작품. 두 사람은 같은 주제의 작품을 그렸다.


조선과 서양의 두 그림 모두 바느질하는 여성들의 모습이 조신해 보인다. 앉아서 집중하는 작업이라 그런 것일까? 화가의 시선과 설정이 그러한 것일지도 모른다. 잠깐 이런 생각을 해본다. 

조선의 바느질하는 그림을 김홍도가 그렸다면 세 여인들의 수다 소리가 그림 밖으로 들려왔을지도 모른다. 서양의 바느질 그림을 얀 스테인Jan Steen(c.1626-1679)이 그렸다면 바닥에 바느질감이 널브러져 있었을 것이다. 피터르 브뤼헐 Pieter Bruegel the Elder(c.1525-30 -1569)이 그렸다면 오밀조밀한 바느질 소품으로 테이블이 화려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결국은 화가의 구성과 설정에 따라 이 그림들은 완성된 것이다. 얌전하고 점잖은 사대부 관아재, 그림의 정석에 충실한 아돌프 아츠의 그림이다. 


작가 알기

데이비드 아돌프 콘스탄츠 아츠(David Adolph Constant Artz 1837. 12. 18 네덜란드 헤이그 출생, 1890. 11. 08 네덜란드 헤이그 사망)는 헤이그 학파의 회장이던 요제프 이스라엘스Josef Israëls(1824-1911)의 가장 중요한 추종자였다.

1855년부터 1864년까지 J.H.암스테르담 아카데미의 이스라엘스를 만났다. 이 기간동안 그는 암스테르담 국립미술아카데미의 회원이었다. 이스라엘스는  ‘낚시’를 그림의 주제로 삼았는데 아츠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1859년에 잔트포르트Zandvoort에서 이스라엘스와 함께 일하면서 아츠는 어부의 쾌활한 면을 묘사했다. 초원, 수로, 모래 언덕, 숲으로 둘러싸인 반 시골 지역이었기 때문에 해안과 어촌을 그리려는 예술가들에게 풍부한 영감을 주었다.기술적으로 그는 날카로운 윤곽선과 밝은 색상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스와 구별되었다. 

1866년부터 1874년 사이에 아츠는 파리에 머물면서 쿠르베 Gustave Courbet (1819-1877)의 제안에 따라 자신의 스튜디오를 차렸다. 제이콥 마리스Jacob Maris(1837-1899), 프레데릭 캠머러Frederik Hendrik Kaemmerer(1839-1902)와 함께 스튜디오를 공유했다. 파리에서 그는 미술상인 구필 앤 씨Goupil & Cie와 가까운 사이로 지냈으며, 아츠는 파리에서 인정받은 최초의 네덜란드 화가 중 한 명으로 연례 살롱에서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파리에 머무는 동안 일본 예술이 유행했다. 일본에 대한 열정은 미술계 전체를 가득 채웠고, 비벨로트 컬렉션과 일본 가구와 예술품으로 꾸며진 집의 실내 장식뿐만 아니라 시각 예술가의 주제에서도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 기간동안 아츠는 주로 유행하는 장르 장면(풍속화)과 일본 주제를 많이 제작했다. 일본 판화에 관심을 갖게 되어 일본 장식과 인테리어 장면들을 그렸다. 선과 색에 대한 그의 통제력은 더욱 강력해졌다. 1869년 5월에서 6월 사이에 스코틀랜드로, 1870년에는 영국으로, 1872년 1월에는 이탈리아로 여행했다.

1874년 헤이그로 돌아와 네덜란드 드로잉 협회 회원이 되었고, 1879년 윌리엄 3세로부터 오크 왕관 훈장을 받았다. 뮌헨과 비엔나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금메달을, 드레스덴에서 디플로마와 메달 오브 아너를 수상했다. 

1880년 그는 파리 살롱에서 가작을 받았고, 1883년 암스테르담 국제 및 식민지 박람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했다. 1889년, 레지옹 드뇌르(Légion d’honneur 명예군단훈장)의 슈발리에(Chevalier 기사)가 되었다. 또한 1889년, 사망하기 전 해에 파리에서 열린 만국 박람회에서 국제 심사 위원단의 부회장을 역임하며 무거운 의무에 건강을 희생했다.

후손들은 그의 작품을 네덜란드 화파의 부흥에 강력한 공헌을 한 대가의 작품으로 기릴 것이다.


낯선 말 풀이

살강            - 그릇 따위를 얹어 놓기 위하여 부엌의 벽 중턱에 드린 선반. 발처럼 엮어서 만들기 때문에 그릇의 물기가 잘 빠진다. 


1.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77A_0520_000_0010_2000_008_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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