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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Mar 18. 2022

김득신 <귀시도>, 쿠르베 <플라기의 농민들>

조선과 서양의 풍속화

<조선과 서양의 풍속화, 시대의 거울>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이곳엔 글의 일부만 남기고 많은 부분을 삭제합니다. 이해를 바랍니다. 



정치인들이 민생행보를 나선다면 우선 시장 방문이다. 시장은 민심의 바로미터이기 때문일 것이다. ‘시장’이란 무엇일까? 장소처럼 구체적인 뜻도 있고, 경제의 흐름 같은 추상적인 의미도 있다. 정기적, 또는 부정기적인 시간에 따른 시장도 있다.조선 후기 문신 서영보와 심상규가 왕명으로 재정과 군정에 관한 내용을 수록한 행정서에 시장에 대한 기록이 있다. 1808년(무진, 순조8)의 행정 기록 『만기요람萬機要覽』 권5에는 송정松政 황정荒政 휼전恤典 등 국내의 정시와 각전各廛 향시鄕市 등 국내 상업 활동, 국제 무역 및 외교 관계에 관한 사항들이 서술되어 있는데 각전조各廛條에서 시장을 설명한다. “행상이 모여서 교역하고는 물러가는 것을 장(場)이라고 이른다.” 장이 서는 일정도 자세히 기록했다.

 5일장·10일장 주시週市 연시年市, 그리고 대구 원주 등의 약령시藥令市 따위는 일정한 기간을 두고 열리는 정기시장이다. 고려 송도松都의 방시坊市, 조선 한양의 육주비전(六注比廛, 六矣廛), 그리고 오늘날의 남대문시장 동대문시장 등은 상설시장이다. [출처: 시장-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 

태종실록 은 한양의 행랑터 닦은 일을 기록했다. 

태종12년(임진, 1412) 2월10일(을축)
비로소 시전市廛의 좌우 행랑行廊 8백여 간의 터를 닦았는데, 혜정교에서 창덕궁 동구에 이르렀다. 2
태종 14년(갑오, 1414) 7월21일(임진)
도성의 좌우 행랑을 지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였다. “종루鐘樓에서 남대문에 이르기까지 종묘앞 누문樓門에서 동대문 좌우에 이르기까지 행랑을 짓고자 한다.” 3

행랑 조성이 계속됨을 기록했다. 


운종가雲從街(혜정교<-->창덕궁)의 시전에 건설한 행랑은 800여칸으로 상인들에게 점포를 분양하였고 이로써 태종 14년 무렵에는 도성내 설비 건설이 거의 끝났다. 사람들의 생활에는 물건이 필요하고 자급자족 시대를 지난 도시에서 시장은 꼭 필요한 시설이었다. 

기록에 의하거나 현실에서 체험하거나 장소 의미의 시장은 필요에 따라 ‘가고’ ‘오는’ 곳이다. 사러 가고 사서 오고, 팔러 가고 팔고 오는 시장길은 풍속화로 남아있다. 


https://gongu.copyright.or.kr/gongu/wrt/wrt/view.do?wrtSn=13216329&menuNo=200018 

김득신 <귀시도歸市圖> 조선. 종이에 담채. 33.5 x 27.5 cm. 간송미술관 소장. CCBY 공유마당.


김득신의 <귀시도 歸市圖>이다. 제목 때문에 논란이 많은 작품이다. 그림 속 사람들이 시장에 가는 행렬인지, 시장에서 돌아오는 길인지 알 수 있는 징표는 없다. 시장을 보고 마을로 돌아오는 장면이라는 설이 우세하다. 

말과 소를 앞세운 긴 행렬이 나무로 된 다리를 건너고 있다. 다리를 떠받치고 있는 나무 기둥을 짙은 먹으로 칠해 다리의 안정감을 더해준다. 사람들은 두 세 명씩 몰려있는데 앞선 두 남자는 소와 말을 몰고 아이를 데리고 간다. 다음 세 남자는 등짐을 졌다.


종이책 출간으로 설명 일부를 삭제함.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search/view?relicId=1223

이형록 <설중향시> 조선. 종이에 채색 38.8x28.2cm. ⓒ국립중앙박물관


https://www.gustave-courbet.com/the-peasants-of-flagey.jsp#prettyPhoto[image1]/0/ 

구스타프 쿠르베Gustave Courbet <플라기의 농민들The Peasants of Flagey1850. 캔버스에 유채. 210 x 276 cm. 브장송 공립박물관, 브장송, 프랑스.

 

1850-51년의 살롱에서 쿠르베는 <돌 깨는 사람>, <오르낭의 매장>, <플라기의 농민들>을 전시했다. 세 작품 모두 쿠르베의 고향 오르낭의 시골 생활을 대규모로 표현하고 있다. 이 세 가지 작업에서 쿠르베는 빈곤층의 힘든 일상, 중산층을 위한 사회 행사, 주요 통과 의례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평범한 삶들은 현실에 기반을 둔 쿠르베의 새롭고 사회적인 역사 회화의 일부였다.

파리지앵들에게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플라기의 농민들>은 파리지앵들의 목가적인 환상을 멀리하고, 도시의 아스팔트와 마카담(Macadam 쇄석 도로)을 소중히 여기게 만들만한 그림이었다. 그러나 그림 속 인물들은 두Doubs의(플라기는 두에 있는 코뮌임) 토지 소유자인 실제 농부로 결코 빈민층이 아니라 중산층 농부들이다. 짐을 짊어지고 돼지를 묶은 끈을 메고 걸어가는 남자와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걸어가는 여자가 천해보이지만 이들은 가축을 매매할  경제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중앙에 말을 타고 있는 남자는 쿠르베의 아버지 레지스(Régis Courbet)로 플라기의 시장이었다. 첫 눈에 보이는 왼쪽 소는 살집이 없지만 당당하게 잘 생긴 뿔을 가지고 있다. 시선은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찾는 듯한 표정이다. 소 아래쪽의 하얀 돼지는 바닥에서 먹을 것을 찾는 것 같다. 

그림이 첫 선을 보였을 때 비평가들은 그림의 주제를 무례하고 추하다고 조롱하면서도 그 규모에 충격을 받았다. “이토록 큰 그림에 하찮은 농민들이나 그려넣다니!” 이러한 조롱이었다. 그러나 철학자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1809-1865)은 쿠르베는 천성적으로 성실한 프랑슈콩테(Franche-Comté 스위스와 프랑스 국경 마을) 농민이라고 했다. 프랑슈콩테의 농업공동체에서 태어난 쿠르베는 20세 때 파리로 이주했지만 그의 작품에는 프랑슈콩테 사람들이 많이 등장했다. 

 

쿠르베의 그림이 파리 오르세 미술관 공식 타이틀은 <Les Paysans de Flagey>, <Le Retour de la foire.>로 쓰여있다. 영문 번역은 <The Peasants of Flagey Returning from the Fair.>가 주를 이룬다. 제목이 어떠하든지 김득신의 <귀시도>와 그림의 이미지가 비슷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지금도 5일장이 서는 곳이 많다. 외국에서도 주 단위로 정기적인 장이 서는 곳이 많다. 사람이 사는 곳엔 물건이 필요하고, 그 물건들을 유통하는 시장이 필요하니 동서고금 시간대를 초월하여 시장은 항상 우리 곁에 있다.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는 풍속화 화가들에게 시장에 오가는 사람들은 매력있는 주제다. 시장은 생생한 삶의 현장이기도 하다. 

 

작가 알기

구스타프 쿠르베(Jean Désiré Gustave Courbe 1819. 06. 10 프랑스 오르낭 출생, 1877. 12. 31 스위스 라 투르 드 페일즈 사망)는 프랑스 동부 오르낭의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났다인근 브장송Besançon에서 교육을 받았고, 1839년 체계적인 미술 교육을 받기 위해 파리로 갔다. 파리에서 그는 타치아노Tiziano Vecellio(c.1488-90 - 1576)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1571-1610)벨라스케스  Diego Velázquez (1599-1660)와 같은 노련한 미술계 영웅들을 따라 루브르 박물관을 맴돌았다. 

1840년대 초반, 그는 자신의 초상화를 다양한 모습으로 그렸다. 1848년, 시골에서 일어난 민주화 봉기의 여파로 쿠르베의 오르낭 시골 중산층에 대한 묘사는 살롱 미술 애호가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1849년, 쿠르베는 <오르낭에서의 저녁 식사 후>라는 걸작으로 살롱에서 첫 성공을 거두었다. 이 그림은 그에게 1857년까지 살롱 배심원 승인에서 면제되는 금메달을 받았다. 

객관적이지 않은 쿠르베의 사실주의적 작품은 허구적이고 수사학적이다. 1855년, 나폴레옹 3세가 그의 통치 7년을 기념하기 위해 시작한 만국 박람회 외부의 파빌리온에서 쿠르베는 전시를 열고 “사실주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1850년대에 쿠르베는 근대성을 포용하므로써 오르낭 주제를 넘어서 파리의 카페 문화에 눈길을 돌렸다. 시민들의 초상화와 샹송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들을 그렸다. 

1863년, 마네의 <올랭피아>와 마찬가지로 쿠르베의 누드는 비너스와 이브가 아닌 실제 프랑스 여성을 그렸다. 그는 자신이 살고있는 사회에는 부와 빈곤, 불행, 고통 등 다양한 요소가 있다고 설명하며 무덤을 파는 사람과 매춘부와 성직자 같은 여러 인물들을 작품의 주제로 삼았다. 1871년 파리 코뮌(Paris commune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하고 나폴레옹 3세의 제2제정이 몰락하는 과정에 파리에서 일어난 민중봉기)직전에 정계에 뛰어들어 사회주의 정부의 정치적, 예술적 삶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코뮌이 몰락하자 그는 나폴레옹 권위의 상징인 방돔Vendôme 기둥 파괴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어 6개월 형을 선고받고 1873년에 스위스로 망명했다. 쿠르베는 스위스에서 1877년 사망했다. 

 

낯선 말 풀이

술띠         – 양쪽 두 끝에 술을 단 가느다란 띠. 허리띠나 주머니 끝 따위로 쓴다. 

황정荒政   – 흉년에 백성을 구하는 정책. 

휼전恤典   – 정부에서 이재민 등을 구하기 위하여 내리는 특전.

각전各廛   – 각각의 가게. 여러 가게.


1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67A_0050_050_0010_2002_001_XML +

https://sillok.history.go.kr/id/wca_11202010_001

3 https://sillok.history.go.kr/id/kca_11407021_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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