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과 서양의 풍속화
동물과 다른 인류 문명과 문화의 발달을 논할 때는 불의 사용을 첫째로 꼽는다. 인간이 직립하여 손의 사용이 자유로운 것은 물론 불보다 더 앞선 이야기이다. 석기, 동기, 청동기, 철기시대로 이어지는 과정은 ‘불’이 주도했다.
우리나라 철 제련의 역사는 기원전 4~3세기쯤부터 시작되었다. 이 시기의 다양한 철제품이 발견되었고 가야 문화권에서도 갑옷, 투구, 마구류 등의 철제품이 출토되었다.
철을 제련하게 되자 농사의 필수품인 농기구 제작이 활발해졌다. 나라에서도 농기구 보급에 힘썼다. 조선 후기 실학자 북학파의 거두 박제가朴齊家(1750-1805)는 청나라에서 농기구와 농사 기술을 도입하여 중앙에서 시험한 다음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방안을 제안하였다. 대장간을 설치하고 청나라 요양遼陽에서 농기구를 수입하여 직접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세종조에는 대장간 설치를 늘리고, 농기구 뿐 아니라 돈을 주조하기에 이른다.
세종 6년 (갑진, 1424) 7월 26일(기해) 기록.
사섬서제조司贍署提調가 계하기를,
“나무와 숯이 유여(有餘)한 곳에 대장간 50군데를 설치하여 주전하는 공장 50명과 조역 1백 명을 주고 본감(本監) 관원과 서(署)의 제거(提擧)·별좌(別坐)와 합동하여 감독 주조하게 하고, 또 경상도·전라도에도 역시 월정으로 부과한 군기(軍器)를 정지하고 대장간을 더 설치하여 돈을 주조하게 할 것입니다.” 1
우리네 일상을 담은 풍속화에서 불을 다루는 ‘대장간’이 등장함은 당연하다.
대장간을 구성하는 필수 인원과 도구들을 꼽아본다. 쇠를 달구는 화덕이 있어야 한다. 대장간 그림마다 큰 굴뚝이 우뚝 서있는 이유이다. 화덕에 불을 때려면 화력을 높이기 위해 바람을 불어주는 풀무가 필요하다. 불에 달궈진 쇳덩이를 올려놓을 모루, 쇠를 두들기는 큰 메와 작은 망치, 쇠를 집는 집게, 달구어진 쇠를 물에 넣는 담금질 물통, 만든 칼을 가는 숫돌이 필요하다.
대장간의 우두머리는 경험이 많아 최고의 기술을 갖춘 연장자 대장장이이다. 메를 잡고 쇠를 두드리는 일꾼은 메질꾼인데 3-4명이 필요하다. 풀무질하는 사람, 칼을 숫돌에 가는 사람이 대장간의 필수 구성원이다. 대장간의 기능은 철물을 만드는 것뿐 아니라 사랑방 역할도 했다. 농경시대에 농기구는 필수적이고 장날이면 사람들이 대장간으로 모여들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모이니 대장간은 자연스럽게 뉴스센터가 된다. 지금은 대장간을 찾기가 어렵지만 아직도 대장간을 운영하는 곳이 있다.
2021년 12월 서울 역사 박물관에서는 서울미래유산기록 2번째로 『서울의 대장간』을 발간했다. ‘서울’이라는 특정 도시의 역사는 한 지역의 역사에 한정되지는 않는다. 서울의 역사는 조선시대를 들여다보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서울의 대장간』에서는 책 제목 그대로 서울에 있는 대장간을 심층 취재한 연구 기록이다. 책에 의하면, 조선 후기에는 군기시軍器寺를 중심으로 한 무기 생산이 각 군영(軍營)으로 나뉘는데, 지금의 서울 을지로7가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자리가 훈련도감 동영이 있던 곳이다. 인근은 훈련도감에 소속된 140명을 비롯한 수많은 대장장이들의 활동 무대였다. 해방 이후 이 일대가 한국 철물산업의 중심지로 떠올랐으며, 1970년대 말까지 70곳 넘는 대장간이 운영됐던 데는 이같은 역사적 배경이 있다. (참고-https://museum.seoul.go.kr/archive/NR_index.do 서울 역사 아카이브)
https://gongu.copyright.or.kr/gongu/wrt/wrt/view.do?wrtSn=13216328&menuNo=200018
김득신 <대장간> 조선. 종이에 담채. , 27×22,4cm, 간송미술관 소장. CC BY 공유마당
풍속화 <대장간>의 원제는 <야장단련冶匠鍛鍊>이다.
위험하고 힘든 일이지만 이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표정엔 미소가 있다. 쇠가 달궈졌을 때 재빠르게 작업을 해야 하므로 두 사람 이상이 동시에 작업을 한다. 붉게 달궈진 쇠덩이를 집게로 모루 위에 대주고 있는 사람이 우두머리 대장장이로 대장간 주인일 것이다.
종이책 출간으로 설명 일부를 삭제함.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treasure/view?relicId=533
김홍도 <대장간> 《풍속도첩》 27.9x24cm. 국립중앙박물관.
왼쪽 -김득신 <대장간> 조선. 종이에 담채. , 27×22,4cm, 간송미술관 소장. CC BY 공유마당
피터 루벤스Peter Paul Rubens <제우스의 번개를 만드는 헤파이스토스 Vulcan forging the Thunderbolts of Jupiter>.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스페인
https://artvee.com/dl/the-forge-3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대장간The Forge> c.1817. 캔버스에 유채. 181.6 × 125 cm. 프릭 콜렉션, 뉴욕, 미국.
나폴레옹 전쟁과 스페인 정부의 내부 혼란 이후, 프란시스코 고야는 인류에 대한 적개심을 갖게 되었다. 고야의 말년(1819-1823으로 추정)에 그린 어두운 그림들은 광기에 대한 두려움이 드러나는 강렬한 주제였는데 이를 “검은 그림 (Spanish: Pinturas negras)”이라고 칭한다. 검은 그림들은 인간에 대한 암울한 시선으로 제작한 작품들이다.
고야는 궁정화가였지만 평생 서민의 어려운 생활에 관심을 보였고, 노동의 존엄성이나 전쟁의 고통을 강조하는 그림을 자주 그렸다. <대장간>은 힘든 노동의 강도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그림에는 대장간에서 일하는 세 남자가 등장한다. 격렬한 붓놀림으로 대장간에서 일어나는 일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작업에 전념하는 굵고 강한 팔과 남성적인 근육질 등을 보여준다. 붉게 달아오른 쇠에 전력을 다하여 메질하는 대장장이의 집중력이 그림에서도 느껴진다.
왼쪽에 있는 남자는 정면을 향하고 집게를 사용하여 물건을 모루에 단단히 고정한다. 등을 보이고 있는 흰색 셔츠의 남자는 큰 망치를 머리 위로 향하게 하여 모루에 내려칠 찰나이다. 다른 두 사람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세 번째 남자가 모루 위로 몸을 굽히고 있는데 그의 역할은 불분명하다.
어두운 배경은 벽과 바닥이 짙은 회색과 파란색 음영으로 채색되었으며 흰 셔츠의 등과 바지를 걷어올린 다리의 살빛이 밝은 색상을 보여준다. 모루 위에 얹혀진 시우쇠는 선명한 빨간색의 작은 불꽃을 튕긴다.
이 그림은 뉴욕시 프릭 컬렉션 소장품이다. 철강왕 프릭Henry Clay Frick(1849-1919)의 딸 헨렌Helen에 따르면 카네기 철강의 1892년 격렬한 홈스테드 파업 후 은퇴한 프릭에게 강한 반향을 일으켰다고 한다.
동서양 마찬가지로 개인이 운영하는 작은 대장간들은 거의 문을 닫았다. 대장간 뿐 아니라 옛 풍습들은 점점 사라져간다. 세월이 변하는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진다. 많은 것들이 시간의 무덤 속에 파묻힐 것이다. 수백년 전 풍속화속 실물은 없어졌으나 그림으로나마 남아있으니 참 다행이다.
조선의 화가들은 풍속화로 그 시대를 남겼는데 표현이 사실적이면서도 은근한 부드러움이 있는 반면, 서양 화가들은 사실과 감정을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작가 알기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José de Goya y Lucientes, 1746. 03.30 스페인 푸엔데토도스 출생, 1828. 04. 16 프랑스 보르도 사망)는 스페인의 낭만주의 화가이자 판화 제작가이다.
14세 때부터 호세 루잔José Luzán y Martinez(1710-1785)에게 후기 나폴리 바로크 스타일로 그림을 배웠고, 마드리드로 건너가 안톤 라파엘 멩스Anton Raphael Mens(1728-1779)에게 사사했다. 초기에는 모방으로 시작했다. 벨라스케스, 렘브란트 같은 대가들의 작품에서 영감을 찾아 작품들을 복사했다.
1769년에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는데 그 때부터 기록한 수첩이 현재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수첩은 이탈리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과 진행되고 있는 일, 방문을 기념하는 그림 작업,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1774년경 산타 바바라에 있는 로얄 타페스트리 공장을 위한 만화(cartoon) 제작을 의뢰받아 스페인 사람들의 일상을 밝은 톤의 로코코 방식으로 그렸다. 그 중 2개가 왕궁에 설치되었고, 1775년에 궁정에서 타페스트리 만화 화가로 일하게 되었다.
1779년 고야는 스페인 왕실에서 일하게 되었다. 지위가 계속 올라가 다음 해에 산 페르난도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1786년에 샤를 3세 치하에서 궁정화가로 임명되었고, 귀족 초상화를 그리는 한편 당대의 사회적 정치적 문제를 비판하는 작품을 만들었다.
1792년 고야는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청각장애자가 되었다. 그후 그의 작업은 점차 어둡고 비관적이 되었다. 마누엘 고도이 Manuel de Godoy(1767-1851)가 프랑스와 불리한 조약을 맺은 해인 1795년에 왕립 아카데미의 이사로 임명되었고, 1799년에 스페인 궁정의 최고 궁정화가(Primer Pintor de Cámara)가 되었다.
1799년, 고야는 애쿼틴트(Aquatint동판 또는 아연판을 부식시켜 표현하는 요판인쇄)로 80점의 에칭 시리즈 <카프리초Los Caprichos> 이미지를 만들었다. 당시 스페인에 만연한 부패 탐욕 억압을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1807년 나폴레옹은 프랑스군을 이끌고 스페인과의 반도 전쟁에 참전했다. 고야는 전쟁 중에 마드리드에 남아 있었고, 1814년 스페인 왕실이 왕좌를 되찾은 후 그는 전쟁의 진정한 인명 피해를 보여주는 <5월 3일>을 그렸다. 이 작품은 마드리드에서 프랑스군에 대항하는 봉기를 묘사했다.
1814년 부르봉 왕조가 복원된 후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말기인 1819-1823년, 그가 거주하는 농아인의 집(Quinta del Sordo)의 석고 벽에 기름을 바르고 “검은 그림”을 그렸다. 그곳에서 스페인의 정치적, 사회적 발전에 환멸을 느끼며 거의 고립되어 살았다. 고야는 결국 1824년 페르디난트 7세의 압제적이고 독재적인 정권을 피해 보르도로 이주했다. 뇌졸중으로 오른쪽이 마비되고 시력 저하와 그림 재료에 대한 접근이 어려웠다. 1828년 4월 16일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고야의 넓고 눈에 띄는 붓놀림은 그의 예술의 본질적인 스페인 주제와 마찬가지로 인상주의의 즉흥적인 스타일을 위한 길을 닦았다. 마네의 <올랭피아>는 고야의 <누드 마야> 의 영향을 받았다.
낯선 말 풀이
군기시軍器寺 - 고려ㆍ조선 시대에, 병기ㆍ기치ㆍ융장ㆍ집물 따위의 제조를 맡아보던 관아. 몇 차례 군기감으로 이름을 고치다가 고종 21년(1884)에 폐하고 그 일은 기기국으로 옮겼다.
모루 - 불린 쇠를 올려놓고 두드릴 때 받침으로 쓰는 쇳덩이.
외씨버선 - 오이씨처럼 볼이 조붓하고 갸름하여 맵시가 있는 버선.
시우쇠 - 무쇠를 불에 달구어 단단하게 만든 쇠붙이의 하나.
불림 - 금속을 달구었다가 공기 중에서 천천히 식혀서 보다 안정된 조직과 무른 성질을 갖게 하는 열처리 방법. 주로 강철을 처리하는 데 쓴다.
벼림질 - 금속에 열을 가한 상태에서 두들기거나 눌러, 탈탄 과정을 거쳐 결정이 조밀하고 단단한 금속을 만드는 공예 기법. 주조법과 더불어 금속 공예의 대표적 기법이다.
벼리다 - 무디어진 연장의 날을 불에 달구어 두드려서 날카롭게 만들다.
1 https://sillok.history.go.kr/id/kda_10607026_004